이 년 안 됐는데 제목을 대충 저렇게 달아본다. 브런치 글을 쓸 생각이 없었는데, 리포트를 받아보려면 15일 내에 쓴 글 한 편을 내 놓으란다. 리포트를 받고 싶어서 글 한 편을 부랴부랴 써 본다. 11월 30일까지 써야지 얼른 나오고 아니면 12월에 쓴 게 되어서 또 오만년 걸린다기에...
한국 이 년. 자전거를 세 번인가 타고서야, 길 가는 어떤 사람도 교통 규칙을 어기고 있다고 나에게 소리지르지 않을 것을 알았다. 일년 반쯤 지나고 엄마랑 꽤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다 먹고 일어나는 엄마를 보며, 아직 계산을 하지 않았는데 왜 일어나는지 어리둥절했다. 서울은 어떤 새로운 사상의 실험실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일상적 모습은 아직 대단히 고리타분하다. 대구는 더 고령화가 심해지고, 아직도 내가 떠났던 한국, 내가 떠났던 대구에서 한치도 사상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내 영혼에 너무 가까이 닿아있는 걸 만들어 어떠한 반응도 견디기 힘들 것 같았던 내 게임을 내고 나서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집에서 노는 게 심심하단 이유였다. 회사에서는 누군가가 가끔 밥이나 커피를 사준다. 어리둥절하다. 독일에서 나한테 밥을 사줬던 건 구남친의 아빠정도나 있었던 것 같다. 구남친도 데이트 시절 나에게 밥을 사 주지 않았는데. 사귄 후로 수퍼에서 장 보는 비용은 그냥 번갈아가면서 내고 딱히 반 나누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고맥락 사회는 내가 하는 말들을 가끔 곧이 곧대로가 아니라 넣은 적 없는 두 번째 의미를 부여해서 듣고, 가끔 뭐라고 하는 지 알 수 없는 지시를 한다.
취직 사유가 심심해서긴 하지만, 한국에서 일하는 것은 나 나름대로의 실험이기도 했다. 머리에서 독일어와 독일이란 긴장을 제거하고 밥을 아웃소싱하면, 일년에 한달 반을 더 출근하며 노동 시간은 그보다 더 긴 한국에서의 노동은 어쩌면 비슷한 노력이 아닐까? 일단 두 달을 살아본 결과 확연히 고통은 적긴 하다.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벌여놓은 일 가짓수에 비해 대단히 합당한 양의 고통만이 삶에 가해지는 중이다. 독일인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딱 반을 들었다면 기절하면서 왜 그따위로 사냐, 당장 집어쳐라라고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이다. (농담이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격한 감정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의사소통 장애 류의 문제를 앓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삶의 장점은 그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완전히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 취급받지 않는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런 사람들과 잔뜩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회적 비용은 누가 내고 있는 걸까?
사회 규범을 따르지 못하고 하찮은 문과생이었던 나는 한국 회사는 사람들이 과로사를 하는 무서운 곳이라고 들어 한국에서 취직 시도조차 하지 않고 졸업하자마자 한국을 떠났었다. 독일에서의 삶은 쉬웠고, 내가 상상한 것을 모두 이뤘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해외 유학 공학계열 석사+4개국어 초능력자(원래도 했는데 꾸질하게 하다가 제법 하게 진화함)+경력 2년 뿌라스 알파 맨이 되어있었고, 이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낮은 연봉을 부르고 오히려 회사들이 이를 높여줬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적게 주는 곳을 골라가는 방식으로 연봉 협상에 처절하게 실패했다.
한국 사람들은 소박한 부자가 되기를 꿈꿔 그렇게 돈 얘기를 하면서도 가만 들어보면 집 한채와 안정된 노후만을 바란다. 투기 목적의 집과 거주 목적의 집이 야릇하게 뒤섞인 이야기를 가만 듣는다. 나에게 집이란 그 도시에 평생 살겠노라 선언하는 삶의 종착역을 찍는 마침표 같다. 서울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이 거대한 도시는 모두의 마침표를 삼킨다.
단 한번도 계획하지 않은 삶의 한군자리 여정의 가운데 서서, 단 한 번도 꿈꾸지 않은 제법 흡족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일. 나의 다음 행선지는 존재할까? 나는 삶의 어디쯤 서 있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마음 속 어딘가를 빙글빙글 떠돌고 있는 걸까?
자 이제 글 썼으니 브런치 리포트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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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답니다. 올 한해 여러분도 수고 많으셨고 읽어주셔서 고마워용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