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인생 첫 비행기는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국내선이었다. 30대의 나도 모르는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유를 7살의 나는 더더욱 알 수 없었지만, 이 거대한 기체가 땅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는 순간만은 너무나도 사랑했다. 내가 아동바동 붙어 있던 세상이 점점 멀어지는 것이 좋았고, 이륙 시 몸이 눌리는 그 느낌이 좋았다. 비행기 탑승 횟수를 자랑처럼 세기 시작했다.
2. 비행기 탑승 횟수를 손발을 다 합쳐도 셀 수 없게 된 어느 무렵부터 더 이상 비행 횟수를 세는 것을 잊어버렸다. 독일의 아주 작은 소도시에서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 간 체류하면서 햇볕을 찾아 남쪽 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3. 내 첫 해외여행은 미국이었다. 친구가 한 달 간의 홈스테이를 권했고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친구를 따라 나섰다. 산에도 아파트에도 가려지지 않은 하늘이 그렇게 넓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도로가 그렇게 끝없이 직선으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이 시리도록 많은 별들의 강을 봤다. 디즈니 월드에 갔다. 압도될 만큼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봤다. 그 한 달은 모든 것이 새로웠고 내 유년시절의 시간의 체감처럼 아득히도 길었다.
4. 두 번째 해외여행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간 일본이었다. 3박 4일 동안 오사카, 교토, 나라, 후쿠오카를 잇는 대장정이었다. 아주 짧은 자유시간에 게임샵에 들러서 레이튼교수 게임을 중고로 사 왔다. 원하는 게임을 찾는 이런 말을 일본어로 할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녁에 친한 친구들과 방을 바꿔 한 방에서 자면서 같이 수수께끼를 풀었다. 수학여행 가이드 분은 내가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하니까 농담으로 졸업하고 같이 가이드로 일하자고 했다.
5. 그다음 여행은 내가 계획해서 친구와 함께 내 발로 떠난 유럽 여행이었다. 파리에 1주일,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1주일 있는 플랜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서툴렀던 게 너무 많고 그 친구가 나랑 더 연락 안 하는 게 우연은 아닌 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 그 후로는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졸업 후에는 독일로 나가면서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먹기보다는 그냥 기회가 될 때마다 가끔씩 어디론가 놀러 가곤 했다.
7. 그렇게 쌓이고 쌓여 16개의 국가, 100개의 도시. 내 세계는 이만큼 조금은 넓어졌을까?
8. 다녀온 세상은 항상 내 마음에 남아 역사를 쌓아간다. 다녀오지 않았다면 나는 바르셀로나가 네모네모 도시인 것을 몰랐을 거고, 라스베이거스가 그렇게 전 세계의 모든 유명 건축물을 작게 줄여 만든 지 몰랐을 것이다. 그 모든 곳들은 아직까지도 내게 반가움과 그리움을 선사한다. 알리칸테의 어느 광장에서 춤추던 사람들이나, 안탈리아의 어느 시장에서 백개먼을 하던 아저씨들, 런던의 어느 책방에서 나에게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라고 내가 고른 닐 게이먼의 Neverwhere를 추천해 주던 점원, 내가 고민하다 카드를 받은 탓에 딜러가 burst 되자 나를 칭찬해 주던 라스베이거스의 블랙잭 테이블의 옆 사람들 같은 것들은 영원히 내 세계에 살아 있을 것이다.
우비로는 소용없을 만큼 거세게 비가 오던 리스본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 걷고 나와 포르투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아득하리만큼 파랬던 안탈리아도, 햇볕을 받으며 발코니에서 책을 읽었던 두브로브니크도, 우리 엄마가 영어로 길 물어봤는데 너무 당황한 콘서트장 안내하던 스태프에게 내가 일본어 할 수 있다고 하자 너무나도 안심하던 그분이 인상에 깊게 남았던 도쿄도.
예약할 때 본 요금과는 다른 요금을 청구한 파묵칼레도, 영어가 한 마디도 통하지 않아 지친 마음에 울고 말았던 앙카라도, 한국어 한다면서 숙소까지 나를 끈질기게 따라온 사람이 있었던 이스탄불도,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응급실 구경을 하게 되고 아직도 그때 다친 앞니로 인해 업보를 청산 중인 위트레흐트도, 42도라서 여행 일정을 수정해야만 했던 파리도, 베드버그에 잔뜩 물려 가려워서 미쳐버릴 뻔하고 베드버그가 좋아하는 환경에 대해서 잘 알게 해 준 브뤼셀도.
모두 다 나의 한 조각으로 남았다.
9. 가만 떠올려 보면 외국어를 하는 외국의 사람들이 신기하던 때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일본어를 한두 마디 해보고 그 사실 자체가 기쁘던 때. 영어를 하기가 민망하고 조심스러워 잘하지 못하던 때. 맞아, 아주 오래간 잊고 있었다. 외국이 외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신기하던 때가 있었다.
10. 100번째 장소는 일본의 닛코가 되었다. 여행 온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자연과 문화유산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힘들게 다니느라 엄청 피곤했지만 제법 좋았다.
11.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여행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이 두려워서 최대한 그런 영역을 없애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한번 보고 배우고 들은 것들이 마음에 남아서 오래간 울림을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백 군데를 다녔다. 나는 이로 인해서 얼마나 변화했을까? 대조군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순 없겠지만, 그래도 제법 멋진 사람이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