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그림자 2부] 선거 전 낙서 사건에 얽힌 비화
선거도 끝나고 조용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때는 주민들 속에서 낙서사건에 대한 기억도 잊혀 가고 있었다. 그런데 낙서를 한 자가 잡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다시 사람들이 기억을 들추어냈고 소문이 빠르게 전파되어 시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극도로 호기심을 드러냈고 여러 가지로 말하고 판단했다.
낙서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시내의 중소기업 당 비서인 김영훈(가명)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 사람의 글씨체가 낙서의 글씨체와 똑같다고 했다. 그는 반당분자로, 간첩으로 몰려 족쇄를 차고 보위부에 끌려갔다고 한다. 시내가 벌 둥지를 쑤셔놓은 것처럼 떠들어댔다.
나는 사실인지 궁금해서 보위원 남편을 둔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친구가 사실이라고 말했다. 웬일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김영훈에 대한 연민이 밀려들었다. 어쩌다가 잡혔을까, 끝까지 드러나지 말아야 할 사건인데… 하고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김영훈 당 비서는 40대 초반의 나이인데 아버지 때부터 당 일군(일꾼)을 한 성분도 좋고 당의 신임이 두터운 집안 출신이었다. 또한 공장에서 노동자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고 충성분자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10년 가까이 당 비서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들과 현장에서 같이 어깨를 들이밀고 당에서 맡겨준 혁명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해나갔다. 모두 천성이 근면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 일군을 하면서 이내 유명해진 사람이었다. 그의 남다른 충성심은 상급 당 위원회에도 널리 알려졌고, 늘 당 책임비서의 환대를 받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 말이 다 퍼져나갔다. 반당분자, 간첩들은 원래 자기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당에 더 충실한 흉내를 낸다느니, 당에서 사람을 잘못 보았다느니, 사람을 보증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라고 책임비서가 자책했다느니 실로 많은 말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 중에도 보위부나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같이 일한 노동자들 속에서는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누명을 쓴 것은 아닌지 하고 걱정을 했다. 노동자들은 김영훈에 대해 요해(파악)사업을 나온 보위원들에게조차 한결같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 사람은 타고난 성품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진심을 다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보증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들의 진심으로 묻힐 뿐, 김영훈의 무거운 죄를 감소시키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보위부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며칠간은 매일 불러내서 그의 글씨체 감정을 위해 여러 형태로 글을 씌워보았다. 끝내 유사체라고 판정이 났다. 그날부터 매일같이 때리고 차고 두들기는 고문이 시작되었다. 김영훈은 그런 속에서도 자기가 쓴 필적이 아니라고 고집했다. 아니, 고집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 절해고도(絶海孤島,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의 감방 안에서 필적이 같다는 것을 부정하기엔 어떤 감언이설(甘言利說, 귀가 솔깃하도록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꾀는 말)로도, 항변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해명하기 버거운, 참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상부에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해서라도 무조건 자백을 받아내라고 매일같이 추궁해댔다. 누구에게든 감투를 씌우지 않으면 사건이 해명되지 못해 매일같이 국가보위부의 추궁이 날아들었다. 그 추궁을 피하기 위해서도 범인으로 잡혀온 김영훈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했다.
의식을 잃으면 물을 들이 붓고 깨어나면 또 때리고 자기들의 힘이 꺼져들면 때리기를 그만두는 정도였다. 그는 매일같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죽더라도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굴복하면 뒤에 있는 가족들의 운명이 더 비참할 것을 생각했다.
간첩이며 반동분자로 낙인된 자기를 따라 대가족의 식솔이 전부 정치범수용소로 가거나 아니면 어느 보이지 않는 산골 군(郡)에 추방되어 사람이 아닌 짐승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그 때문에 절대 굴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위부의 힘 앞에서 김영훈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김영훈은 이미 이곳에 들어설 때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각오를 했다. 보위부의 지하 감방에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북한 백성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술 마시고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이슬처럼 사라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여기서 살아날 길이 없음을 단정했다.
햇빛이 새어 들어올 틈이 없는 1평방짜리 감방 안에서 가족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는 이 나라에서 태어난 죄를 원망했다. 죽을 운명을 앞에 두고 원망도 소용없지만 마지막으로 하는 한탄이었다.
그렇게 그는 온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처절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보위부는 그를 계속 끌어냈다. 이 사건을 마무리 못하면 모두 해임철직될 것이라는 정부의 위협 때문에 상부의 지시를 받은 자들이 그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어느 날, 김영훈은 자기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했다. 이제는 그자들의 몽둥이에 감각도 미미해져갔다. 상처투성이, 꺼져가는 생명을 붙들고 그자들은 지지리도 매달렸다.
“낙서를 했다는 한 마디만 하라고, 그 한 마디만 하면 살려줄 수도 있다”고 어르기까지도 했다. 그는 운명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힘없는 입술을 놀려 겨우 마디마디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죽을 운명인데, 마음대로 해라, 때려라, 죽여라. 너희들이 믿지 않으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이다. 죽여 달라!”고 웨쳤다(외쳤다).
그러자 그 자들은 오히려 더 화가 난다면서 “넌 죄를 고하기 전에는 죽을 자격도 없다. 대라, 대고 죽어라, 이 악질 같은 자식아” 하고 더 분격에 차서 달라붙어 때렸다. 그렇게 김영훈은 보위부의 감방 안에서 6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보위부의 감방 안에서 죽은 시신은 가족 측에 넘겨 보내지 않는다. 시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후에 보위원들의 입을 통해 새어 나온 말에 의하면 김영훈의 시체를 2200볼트의 전기에 연결시켜 흔적도 없이 태워버렸다고 했다. 가족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 후에 김영훈이 감옥에서 끝내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자 그의 가족들은 ‘정치범 가족’이라는 딱지를 안고 추방당했다.
이렇게 죄 없는 그림자, 김영훈의 인생은 ‘1호 낙서사건’이라고 불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건에 말려들어 졸지에 동강나고 말았다.
그렇게 김영훈이 죽고 1년이 지났다. 신의주 보위부에서 청진시 보위부로 연락이 왔다. 낙서 반동한 놈을 잡았는데 취조과정에 그자가 저지른 죄행들 중에서 1998년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시기를 맞추어 청진시내의 여러 공동변소들에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글을 썼다는 확인이 담긴 통지가 날아들었다.
그 자의 필적이 청진시 보위부로 보내어 졌다. 필적감정에 들어갔다. 필적이 꼭 맞아 떨어졌다. 김영훈의 필적도 앞에 놓고 감정분석을 했다. 김영훈의 필적은 유사했을 뿐 완전히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에야 비로소 보위부는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김영훈은 이미 죽은 후이고 그의 가족들도 추방지에서 생사를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보위부가 김영훈이 아닌 진짜 반동분자를 잡았다는 소식이 온 시내에 퍼졌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까운 사람을 죽였다고 쉬쉬하는 소문이 돌았다.
보위부는 이때에라도 죄 없는 김영훈의 가족들에게 무죄를 선거하고 풀어줄 대신 오히려 잘 못 다룬 사건이 위에 반영되면 자기들의 목이 날아갈까 우려하면서 끝내 묻어버렸다. 결국 김영훈의 가족들은 풀려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김영훈의 죄가 해명된 지도 모르고 있다.
북한에 이렇게 죽은 영혼들이 흔하다. 내 친구의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말 한마디를 잘 못했다가 보위부에 갇혀 취조를 받고 정치범수용소로 옮겨졌다. 정치범수용소에서 1년도 못 버티고 죽었다. 지금도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는 이렇게 죄 없이 잡혀간 사람들이 많다. 통탄할 일이지만 해결될 기미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불행한 영혼들이여, 고이 잠들라. 그리고 지켜보라. 언젠가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갈 날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의 원한이 풀릴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믿는다. (끝)
* 편집자주 : 북한 보안서(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