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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D 문화 브로셔 Mar 28. 2023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리뷰

- 영원회귀의 무의미와 타자에 대한 환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리뷰

영원회귀의 무의미와 타자에 대한 환대     


과거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가장 좋아했던 이유는 세계관의 바탕에 깊이 있는 철학적 베이스를 깔아놓음으로서 깊이를 상징적으로만 드러내주고, 겉으로 드러나는 내러티브와 연출은 매우 대중적으로 재미있는 현상으로 나타냈다는 점이었다. 영화의 대중적 재미를 살려내면서 겉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징들을 해석하는 재미까지 더해진 영화였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이하 에에올)의 경우 딱 그런 매트릭스의 재미 케이스가 같아보인 영화였다. 이 글에는 내용과 줄거리를 다루고 있는 글인만큼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 영화적 요소들만 본다면 삼류 B급 영화로 매우 가볍고 싸보이는 키치 같은 영화이다. 이면의 철학적 요소를 해석에 붙이지 않는다면 싼 키치적 영화에 메시지조차 클리세 범벅으로 보이는 영화이며 아카데미상을 휩쓴 아카데미의 선택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영화이다. 빠른 전개와 이미지들의 소모적 번뜩거림 그리고 대중적 패러디의 연속과 값 싸보이는 코미디들이 포스트모던한 현재의 젊은 층에게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로 다가갈수 있다는 평도 있긴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철학적으로 해석해내는 일은 영화의 재미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제 에에올의 철학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영화에서 모든 토핑이 올려진 검은 베이글이라는 이미지를 보자마자 영원회귀가 떠올랐다. 영원회귀의 상징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둥글게 있는 뱀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회귀가 극도의 허무함을 나타내기에 영화에서의 검은 베이글은 영원회귀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니체가 문득 떠올린 생각으로 인간의 삶이 동일하게 영원히 반복된다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하나도 달라지는 것 없이 똑같은 삶을 동일하게 다시 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처럼 무상하고 허무한 것이 없다. 니체는 그러한 영원회귀를 운명에 대한 열정적 사랑 즉 아모르 파티로 극복한다는 답안을 제시했다.


에에올에서는 동일함의 영원한 반복 대신에 어찌 보면 그 반대인 무한한 다름이 존재하는 멀티버스를 상상해낸다. 니체가 동일함의  영원한 반복인 영원회귀라는 사유실험에서 극도의 허무함을 이끌어냈다면 에에올은 다름의 무한한 생성이라는 멀티버스라는 사유실험에서  극도의 허무함을 이끌어냈다. 조부 투파키는 바로 그러한 영원회귀와 극도의 허무함 그럼으로 무의미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멀티버스의  모든 우주를 동시에 경험함으로서 오게 되는 현재 존재하는 우주에 대한 무의미성을 깨달은 것이다. 

꼬리를 물고 있는 뱀 - 영원회귀의 상징

현세계의 무의미성을 깨달으라는 점에서는 카뮈의 부조리 철학이 떠오른다. 카뮈는 그러한 무의미에 대해서 무의미하니 죽는다는 결정과 허위로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두가지를 모두 비판한다. 조부 투파키는 그런 무의미에 의해 죽음을 선택하는 케이스이다. 그런 무의미를 받아들인 이후에 카뮈는 담담하게 무의미에서 주어진 삶을 직접 대면하며 살아가기를 권한다. 영화에서 에블린이 조부투바키의 허무로의 초대에 빠져들면서 그것에 유혹 당하다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실 카뮈가 말하는 무의미에 대한 담담한 수용 과정이 있었으나 영화에서는 그 부분이 드러나보이지는 않는다.     


주인공인 에블린은 그러한 무한한 생성의 멀티버스를 경험한 이후에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한다. 영화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단순하게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라는 뜬금없는 답이 제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서 영원회귀와 부조리의 고민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사유로 지나쳐온다면 단순한 그 답이 단순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카뮈의 답처럼 무의미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당장 앞에 놓여진 사람들과의 만남의 그 순간들에 대면하고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도 엿볼 수 있다. 타자에 대한 환대가 레비나스의 윤리에 대한 답변이었다. 물론 영화에서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드러나거나 설명되어지지는 못한다.     

 

영화에서 친절함을 답으로 제시하게 되는 논리적 과정은 이렇다. 모든 세계를 경험해보면 어느 세계에선가는 지금의 적이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것이다. 따라서 지금 세계에서는 적일지언정 모든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람을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경험하였고, 그럼으로 사랑하고 환대할 수 있는 것이다. 버스 점핑할 때 에블린의 현재 가장 적인 세무원에게 사랑하라고 말하라는 장면은 바로 그러한 부분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지금 적인 그 세무원도 다른 세계에서는 사랑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버스 점핑을 할 때 괴기스러운 행동을 해야 넘어갈 수 있는 것도 현재 가장 이상스러운 행동도 다른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즉 현재 세계로 한정되어 경험하고 생각하던 것을 넘어서 수많은 다른 세계에서는 다른 모습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라는 것이다. 이로서 모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환대해야할 논리적 전개가 완성되었다. 이는 니체가 영원회귀라는 사유실험을 통해 아모르파티를 이끌어내었던 것처럼 멀티버스라는 사유실험을 통해 타인에 대한 환대를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다원주의 세계에서는 나와 다른 타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반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핵심 문제이다.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화두라 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마치 니체가 영원회귀라는 사유실험적 가정을 생각해냈듯이 무한한 멀티버스라는 사유실험적 가정을 가졌던 것이다. 모든 가능성이 펼쳐지는 무한한 멀티버스에서는 어떠한 것도 가능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타자도 품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거기서 가져야 할 자세는 무조건적인 친절함이다. 친절함이란 번역이 약간 늬앙스를 다르게 주지만 누구에게든지 좋은 자세로 대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 멀티버스를 통해 타자에 대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어낼 수 있다.     


니체는 자신의 권력의지를 가지고 대립하고 투쟁하라는 결론이었다면 이 영화는 반대로 친절함을 전략으로 대하라고 하고 있다. 레비나스가 타자를 환대하라는 것은 유한한 개인 실존을 훨씬 앞서고 거대한 무한의 타자를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였지만 이 영화에서는 멀티버스에서의 무한한 경험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실제적으로 체험한다면 인간 실존의 유한성을 넘어서 무한으로 넓어지게 되면서 모든 타자와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에블린이 친절함으로 대할 때 보아야 할 점은 그저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기쁨의 순간을 일깨워주었다는 것이다. 허무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기쁨의 순간을 일깨워줌으로 허무를 극복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니체가 시로 읊었던 '낮이 밤보다 훨씬 깊다'는 문구가 떠오르게 한다. 낮은 기쁨이고 밤은 고통이다. 기쁨이 시간적으로 더 적더라도 고통보다 훨씬 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의 영원함을 원하기에 우리는 더 큰 고통의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조부 투파키는 그런 기쁨의 순간을 보여주는 에블린에게 그런 기쁨의 순간들이 모두 사라질 것들이라고 최종적으로 말한다. 이 부분에서는 명확히 베이글이 불교의 공이라는 해석 상의 발언이라 볼 수 있긴 하다. 공이라는 것이 영원히 존재하는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연기설에 따르기에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불교 공 사상과 맞닿아 있다. 더불어 후반부 해결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것은 대승불교의 자타불이 사상과 맞닿아 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아니한 유식학파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이들에게 환대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결론이 이상하지 않다. 사실 이 영화는 일관적인 철학적 흐름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양한 철학적 소스들을 복합적으로 또한 파편적으로 사용하고 있긴 하다. 중간 중간 make sense 가 되지 않는다는 대사들은 분명 카뮈의 부조리 철학이 인용되는 부분이다. 결국은 그래도 가끔씩은 make sense 하지 않냐는 것으로 부조리를 극복하자고 한다.     


이 영화를 단순히 헐리웃 영화의 아류로만 보면서 미국에서 성공한 외국인의 아메리칸 드림을 그렸다고 하는 비판과 가족 이데올로기에 매여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일단 이 영화에서 에블린에 대한 정의는 멀티버스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들 중 가장 최악의 세계에 존재하는 에블린이라고 정하고 있는만큼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반대로 그러한 아메리칸 드림의 모습처럼 보여주면서 그것을 비판하는 블랙코미디적 요소라고 보아야 한다. 


이 영화에서 감독들이 가족주의적 장치를 집어넣었던 것은 사실이나 영화를 단순히 흥미로운 장면들과 홍콩영화적 무술 장면, 그리고 화장실 유머 등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유행하는 멀티버스를 끌어들이다가 흔한 가족주의적 결론으로 가는 영화라고만 본다면 이 영화의 진정한 핵심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헐리웃의 대표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족을 우선시하는 모습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가족만을 우선하는 윤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환대하라는 메시지다. 모든 이들을 환대하라는 것은 사실 가족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자꾸 가족애를 그린 영화로 평가하는데, 기존 헐리웃의 가족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블랙 코미디로 봐야 한다. 


영화에서 가족으로 나오는 4명은 조이, 엄마, 아빠, 할아버지다. 조이는 니힐리즘에 빠진 사람을 대표하고, 할아버지는 도구적 이성주의를 대표한다. 할아버지가 나중에 로봇처럼 나오는 것을 보면 이성과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념으로 그것이 세상을 정의하는 것을 보여준다. 아빠는 지금 세계의 모습에 대한 대안적 자세를 대표한다. 엄마는 할아버지의 영향권인 현대의 도구적 이성주의에 빠진 워커홀릭형 인간이 깨달음을 얻고 남편의 대안적 삶의 자세로 변하는 입체적 캐릭터이다.


즉 가족으로 나오는 4명은 사실 이 세계를 대하는 4가지 자세와 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에블린이 깨달음의 시점에서 이마에 눈알을 붙이는 것은 명확하게 제3의 눈인 차크라를 인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웨이먼드가 구글리 아이를 이것 저것에 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이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웨이먼드는 레비나스를 대신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웨이먼드는 온갖 물건들에 눈을 붙임으로 무생물의 그것들조차 얼굴처럼 보이게 한다. 타자의 얼굴을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그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무생물에게도 공감하며 위층이 행복해보여서 올려놓았다는 웨이먼드의 모습은 확실히 레비나스적이다.     


에블린이 모든 싸움을 마치고 조이에게 마지막 결론처럼 하는 말은 이것이다.

'We can do whatever we want, Nothing matters'

Nothing matters 라는 말은 모든 것이 다 의미 없고 허무하다는 말로 조부 투바키가 했던 말이다. 이 부분은 번역에서는 동일하게 번역되지 않아서 조부 투파키의 말을 인용한 것의 맛이 살지는 않아서 아쉽긴 하다. 모든 것이 별 것 아니기 때문에 허무하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지만. 그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모든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다. 이것은 사실 니체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모든 가치가 사라지고 어떤 것도 의미가 없어진 극한 허무한 세계에서 드디어 각자 자신의 의미를 창조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니체 철학의 핵심이다.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고, 이 영화의 어떤 측면을 더 향유할지는 각자 다를 것이다. 해석 또한 캐릭터 분석, 이미지 분석, 음악 분석, 연출 방식 분석 등 다양하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이렇게 배경의 철학을 알고 볼 때 더욱 진하게 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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