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자발적 주부'로 생활하기 위한 3년의 준비
나는 미국에 올때부터 꽤 높은 연봉의 직장을 잡아 왔었고, 남편은 겨우 생활할 수 있는 인턴의 주급을 받았었다. 나와 남편의 나이 차이 만큼 경력이 다르므로 우리의 연봉이 차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 경험이 조금 더 많은 만큼 사람보는 눈도 커 있었다. 남편의 성실함과 잠재된 능력은, 내가 만약 회사를 차린다면 꼭 고용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꼭 좋은 회사에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게 말이다.
나는 우리 집 돈관리를 도맡아 했다. 엑셀로 매달 가계부를 작성했고, 남편이 갖고 있던 돈과 내가 갖고 있는 돈을 모아 Joint checking account를 만들어 관리했다. 나는 남편에게
우리는 당신이 벌어온 돈으로만 생활할 거야. 내가 벌어온 돈은 무조건 저축이야. 그러니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고 싶다면 당신이 더 벌어와야 해. 그리고 투잡도 해서는 안 돼.
라고 말했었다.
그때 남편의 연봉은 내 연봉의 반쯤 되었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남편한테 참 잔인한 말일 수도 있겠다 싶다.
내가 말한 대로 우리는 남편의 연봉에 맞춰 생활했다. 집 렌트비, 생활비를 남편 연봉에 맞추면서 비싼 뉴욕에서 살아야 하니 스튜디오 렌트하는 것도 꿈을 못 꿨다. 우리는 퀸즈 우드사이드에 지하집에 방 1개를 빌려 생활했다. 나머지 방 2개에는 다른 룸메이트가 살고 있었다. 지하집에 룸메이트 생활로 시작하는 신혼이라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내가 이직을 하게 되어 뉴저지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플러싱에 뉴저지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우린 플러싱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 이사 간 집은 2층이었지만 여전히 룸메이트가 둘 있었고, 부엌엔 바퀴벌레가 나왔고 천장에서는 쥐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사실 뉴욕에서야 바퀴벌레고 쥐고 놀라울 건 없었지만, 엄마 아빠돈으로 맨해튼 어퍼이스트에서 생활했던 나로서는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살 수도 있을만한 컨디션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오로지 우리 힘으로, 사실 내가 버는 돈까지 합쳐서 같이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이렇게 같이 견뎌나간다는 사실이 나에겐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는 듯했으니까.
그리고 또 내가 이직을 했다. 맨해튼으로 출근을 했기에 우린 플러싱을 벗어나 퀸즈 써니사이드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이때 처음으로 우린 우리만의 집을 빌릴 수 있었다. 방 1개, 거실 1개. 커다란 나무에 둘러싸여 햇 빛도 잘 들어오는 포근한 집이었다. 뉴욕의 대부분의 집들이 그렇듯 삐걱대는 나무 바닥 소리와 방음이 잘 되지 않은 옆집의 소음이 있었지만 그 마저 우리에게는 낭만이고 성공이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기까지 이 정도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것도 우리에겐 성공 스토리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버는 돈은 대부분 저축했다.
남편은 이때까지만 해도 한 번의 이직을 했을 뿐, 더 이상의 이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연봉을 높이기 위해 이직을 좀 많이 했을 뿐이고, 남편은 영주권을 받고 이직 대신 그 산업에서의 경력을 조금 더 늘리는 데에 집중했다. 남편은 회사에서 영주권을 받고 6개월 정도 더 일한 후에야 이직을 준비했다. 미국에서는 건강보험비가 매우 많이 드는데 이런 부분에서는 내가 다닌 회사에서 베네핏을 받았다. 지하방 룸메이트 생활부터 우리의 서니사이드 집을 렌트하기까지의 기간은 채 2년 정도가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