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파 포레스트 검프의 아모르 파티
워낙 유명한 영화라서 두 번 정도 본 것 같다.
“삶은 한 상자의 초콜릿이다.”라는 명언 빼고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 명언이 영화를 관통한다는 걸 세 번째 보고 알았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지인이 이 영화를 아이들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그게 무슨 의미일지 물어볼 수도 있지만, 스스로 답을 내리는 좋은 나는 바로, 영화를 감상하기로 했다.
열 살 열한 살 남자 아이들에게는 이 영화가 매력적이지 않았다. 둘째는 원래 싫다고 하고, 첫째는 함께 봤지만 정사 장면과 전투 장면 때문에 중단했다. 아이들이 여름 야구 캠프에 간 사이, 아이들 몰래 나머지를 감상했다.
포레스트 검프의 내레이션을 통해 미국의 대중 문화의 흐름과 베트남 전쟁과 대통령 피살, 달 착륙,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 대홍수 등 굵직한 미국 역사가 스냅샵처럼 지나간다. 너무 빠르고, 현실적이지 않은 어색한 패러디 같은 면(그가, 여러 번 대통령을 만난 장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역사적 사건들을 알아볼 수 있는데 그런 배경이 없는 아이들은 오죽할까.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미국인의 피에 ‘신에 대한 믿음’이 흐른다고 했다. 영화 곳곳에 그런 멘트들이 등장한다. 특히, 포레스트 검프가 베트남 전에 따랐던 댄 중위(Lieutenant Dan)의 스토리에 두드러진다. 중위는 전쟁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 두 짝을 잃었다. 그의 운명은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었지만, 포레스트가 그를 구해준 덕분이다.
딘은 운명을 원망했고, 그걸 안 받아들이려고 미친 듯이 싸웠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신이 있다면, 운명이 있다면 나를 잡아가라고 살아있음에 분노했다. 그의 외침에도 꿈쩍하지 않는 포레스트 검프. 그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생각에 몰두 하기. 그 일 중에 동료 바버를 소원을 성취하는 일도 있었다. 새우잡이 선장이 되는 일이다. 댄 중위는 포레스트 검프와 동업하고 새우잡이로 큰 돈을 벌게 된다. 술이 아니라 닻에 올라 소리치는 댄 중위의 스토리 자체로 감동적인데, 그는 그렇게 원망하던 신과 포레스트에게 화해를 청한다.
“Forrest ,I never thanked you for saving my life.”
“포레스트,나를 구해줘서 고맙다고 한 적이 없었어.”
실은 이게 직접적인 감사의 말은 아니지만, 포레스트 검프는 “그가 신과 화해했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초콜릿 상자에서 맛없는 Marzipan(아몬드 가루 속)를 먹었을 때, 뱉어낼 수 있으면 좋으려만, 뱉어낼 수 없다. 오만상 얼굴을 찡그리며 삼킬지 말지 눈치 본다.
포레스트 검프도 자기 운명의 순간에 여러번 막부닥친다.
먼저, 어머니의 죽음과 사랑하는 제니의 죽음이다. 그는 운명에 대해 묻는다.
“저마다 운명이 있는지 아니면 그냥 바람따라 떠도는 건지 모르겠어… 내 생각엔 둘다 동시에 일어나는거 같아.”<포레스트 검프 중>라고 독백한다.
상자에서 꺼낸 초콜릿 중에는 어떤 것은 쓰고, 고소하고, 부드럽고 달다. 그러나 아까운초콜릿을 뱉을 수는 없다. 그걸 음미하다보면 다른 맛도 느껴진다. 우리에게 어떤 삶이 올지 모르지만, 입속에 들어온 초콜릿을 운명처럼 생각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면, 어떻게 할까?
“걱정마라. 포레스트.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란다. 포레스트,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거란다. 하느님이 주신것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자신만의 최선이란 스스로 알아내는 것이고.”라고 포레스트 검프 엄마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과 운명을 동의어로 본다면 미국인의 마음 속에 흐른 신에 대한 믿음은 아주 굳건한 것처럼 보인다.
<폭삭 속았수다>의 양관식, <노트북>의 노아, <패스트 라이브즈>의 해성.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의 포레스트 검프는 모두 순정파이다.
“You are my girl.”라고 포레스트 검프는 제니를 평생 추앙했다.
처음 스쿨 버스 안에서 함께 앉았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동안 제니는 마약 중독도 되었다가, 집시 생활을 하다가 남자 친구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스라이팅까지 당했다. 그럴 때마다 검프는 제니를 기다려 주었다. (나라면 떠났을 듯.) 검프는 줄곧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피그말리온 효과’가 연상된다. 석상도 인간으로 변하고, 나무 인형 피노키오도 사람으로 변하고,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창녀가 각성하고 새롭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전부 누군가를 믿어주는 한 사람의 진심 덕분이다. 그 진심은 하늘도 감동 시키고, 아주 여린 영혼 제니까지 돌아오게 한다.
포레스트 검프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제니에게 토라진 그는 이렇게 말한다. “I’m not smart enough. But I know what love is.” 검프는 똑똑하지 않아도 사랑이 뭔지, 인생이 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제니보다 잘 살았다.
포레스트 검프는 제니가 낳은 아들을 보자마자 묻는다. “저 아이가 똑똑하니? 나처럼…”라고, 말을 잇지 못한다. 댄 중위가 불구자로 그 운명을 이겨내는 게 힘들었든, 포레스트 검프가 멍청이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지 아는 그로서는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다. 거기서, 눈물 흘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명석하지 않는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예스하겠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을 떠올리게 할 만큼 그때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잘 살 수 있었던 이유에는 현명한 엄마, 사랑하는 제니, 그리고 좋은 친구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자기 삶을 아름답게 볼 줄 알았다.
제니가 병상에 누워있다. 검프에게 베트남 전쟁이 어땠느냐고 물어보았다. 검프는 비가 줄기차게 왔던 베트남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But after a while, I got used to the way things were. I even saw the sun sometimes. And then one day, it stopped raining. And after the rain stopped, the skies cleared, and it was beautiful — just like that."
“비가 언제 그칠지 생각하던 그 때, 하늘이 맑아졌어. 정말 아름다웠지”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달리던 때를 회상하며,
“사막을 달리면, 하늘과 땅의 경계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하나로 느껴졌어.”라고 한다.
포레스트 검프는 삶이 어려워도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찾아 낼 수 있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단이 높은 고수다.
즉, 영화는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 속에서, 여러 주인공들의 운명에 대한 겸허한 자세, 또 신(운명)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웃이 그 영화를 추천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