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장수의 말처럼, 인생은 허황하고도 진실
천명관의 『고래』는 약장수 같은 화법으로 삶의 욕망과 허무를 동시에 그려낸 이야기다. 이야기 속의 금복과 춘희는 인간 본능의 욕망, 혹은 자연과 하나 되는 감각의 존재로 제시되며, 그들의 삶은 결국 ‘파도처럼 일고 스러지는 인생’의 은유가 된다.
천명관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다소 거칠기는 해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들어맞겠다. 이와 비슷한 느낌이 나는 외국 작가는 <오베라는 남자><불안한 사람들>을 쓴 프레드릭 베크만이 있다. 마구잡이로 써낸 듯한 이야기(불안한 사람들)에서 따스한 감동이 있다. 천명관의 다른 소설, <고령화 가족>은 비슷한 반면, <고래>는 흥미롭게 이야기를 몰아가는 약장수의 말발에 첨벙 되다가 끝나는 순간, 잠시 침묵하게 된다. 이야기가 끝난 후에 밀려오는 경건함, 또 몰아치는 인생의 막이 내린 후에 오는 허무함도 있다.
<고래>는 <천일야화>처럼 이야기 속의 이야기, 또 이야기로 이어진다. 조금은 허황되고, 약을 팔려고 과장하는 약장수의 어투가 느껴지지만 그래도 자꾸 빨려 든다.
주인공 춘희의 엄마, 금복에 대한 이야기로 거슬러 오른다. 작은 산골 마을 출신인 금복은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거대한 동물 고래를 본다. 마치 자신이 고래가 되겠다는 듯이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펼쳐진다. 고래는 금복에게 감탄과 경이, 호기심이 들어있다. 고래는 거대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의 크기다.
‘주인공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자유와 상상력의 상징’(진지하게 본 드라마가 아니라 챗지피티에게 물어보았다.)이라고 한다. 금복에게도 고래는 유사하다. <고래>는 그걸 꿈꾼 금복이라는 여자의 운명적인 삶을 보여준다.
그러나, 금복이 이룬 성과가 고래의 분수가 바다에 떨어지는 것처럼 사라진다. 책 속에 등장한 다른 인물들도 욕망을 가지고,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어쩐지 허무하게 다 타버리고 무너져버린다. 결말이 허무하다. 그러나 인생이 허망하다는 결과만 보자면 우리는 왜 그렇게 욕망을 추구하고 원한을 품겠는가. 끊임없이 기복 있는 파도처럼 살아가고, 결국엔 스러져 가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고래를 등장시킨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서도 그걸 쫓는 에이해브 선장의 광기도 파도와 함께 사라졌다.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 실은 죽음에 더 끌어당긴다는 걸 은유하는 것 같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향유고래가 나온다.
주인공 춘희는 지금으로 보면 다운증후군인 것 같다. 그녀는 마구간에서 태어날 때부터 코끼리와 이어져 있다. 금복은 바다의 가장 큰 동물 '고래'에게 빠졌고, 춘희는 육지의 최대 동물 코끼리와 사귄다. 춘희에게는 코끼리는 친구이자, 자연이며 그녀 자신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만의 세계에 살다가 죽는다. 춘희는 다른 사람보다 더 섬세하다.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태어났다. 말 대신 감각으로 자연에 가까워지는데, 그 자체가 자연 같다. 그래서 코끼리와 대화하고, 곤충들과 대화한다.
“그녀는 공장 마당을 벗어나 풀숲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소녀는 풀숲을 기어 다니는 곤충들의 싸르락 꺼리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곧 온갖 생물들이 뿜어내는 은밀한 소리와 향기에 흠뻑 취했다. 그녀는 옷을 모두 벗어던졌다. 그리고 양손을 한껏 옆으로 벌렸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향기와 소리, 묵직하게 흘러 다니는 안개를 취하기 위해서였다.”<고래> 천명관
지적 능력은 떨어지지만 어느 한 분야에 지독한 애착과 열정을 보이는 춘희를 보고 바깥세상에 에너지를 빼앗겨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그 세계에서 안온함을 느꼈다. 그녀는 진흙과 이어져 있었고,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벽돌을 본능으로 만들어냈다. 그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벽돌의 여왕’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얻게 된다. 그러나, 춘희는 큰 업적을 세우기 위해 벽돌을 만든 게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이야기와 실제의 스토리는 괴리가 있다는 걸 작가가 말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그는, 뭔가 역설적 소설을 만들어낸 것 같다.
『고래』에는 약장수의 뻥처럼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예를 들어, 금복이 남자로 변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고, 죽은 사람들의 환영이 등장한다. 춘희는 원한 많은 노파의 혼령을 보고, 죽은 코끼리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나 이외수의 『황금비늘』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적 정서 속에는 언제나 ‘이승과 저승이 맞닿아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굿을 행하고 조상신을 섬기는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작가 천명관은 이러한 문화적 감수성을 이용해,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의 진위—즉, 이것이 실제인지 허구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구분하도록 유도한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어, 이건 아닌데…”라는 말을 여러 번 외쳤다. 즉, 입담 좋은 작가는 잘 나아가다가 어만 데로 빠진다.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다가, 더 흥미 있게 자극 있게 하려고 일부러 이야기를 뒤틀어버리는 것 같았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본능에 충실하다. 금복이라는 여주인공의 성적 매력에 껌뻑 죽는 남자들, 그리고 그녀 또한 남자들에 환장한 것 같다. 실은 그런 성적 이야기가 상스럽게 느껴졌다. 우리 인간이 그런 면이 없긴 하지만, 약장수의 흥미를 자아내기 위한 이야기 속에서는 도드라져 보였다. 그 반대의 것을 더 높이 치는 나의 무의식적 생각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삶의 요소들이 많은데 그 위주로 그려진 게 거북스러웠다.
또 <돈키호테>처럼 칼잡이에 대한 수식어를 길게 하거나, 화자의 입김이 너무 분명해서 숨 돌리는 소리까지 적었다. 또, 잊을 만하면 나오는 ‘무슨 무슨 법칙이다’가 자주 등장했다. 약장수의 이야기 기법처럼 보이는 이런 것들이 이야기에 몰입하려고 하다가, 이야기꾼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산통이 깨지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