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움직여야 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가물한 소스통부터 물러가는 과일까지. 엉망인 냉장실을 보고 냉동실 문까지 열어보았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검은 봉지들이 냉동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모두 꺼냈다. 먹다 남긴 음식과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을 버리고 냉장고 안쪽을 닦았다. 식탁 위엔 다시 넣어둘 것들만 남았다. 복이에게 반만 주고 남은 치즈와 복이의 약봉지도 있었다. 치즈는 벌써 딱딱하게 갈변했고, 약은, 거의 그대로였다.
사고가 나기 삼일 전 복이의 정기검진이 있었다. 그즈음 복이는 부쩍 기운이 없었다. 처음 심장병을 진단받았을 때만 해도 일주일 가량 약을 먹으니 기침이 잦아들고 기력이 회복되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는데. 그때 선생님은 약만 먹으면 오래오래 건강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아침저녁으로 약 먹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려서 내성이라도 생긴 것일까. 꾸준한 관리에도 불구하고 최근 복이는 부쩍 기운 없이 늘어져있었다. 마치 그만큼이라도 버티기 위해 약을 먹는 것처럼. 정기검진에서 선생님은 알아보기 어려운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떼셨다. 많이 안 좋아요.
그 날 우리는 흙길로 천천히 돌아왔다. 복이는 귀를 팔랑거리며 총총 걸었다. 풀냄새도 맡고 꽃냄새도 맡고. 허공을 킁킁거리기도 하면서. 돌아와서는 함께 긴 낮잠을 잤다. 깨어보니 캄캄했다. 불도 켜지 않은 채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괜찮다. 괜찮다. 다만 너무 아프지 않기를, 마지막까지 꿈꾸듯이 평안하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중의 일이라고. 그건 이상한 확신이었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일인 건 분명하지만 당장 내일일 리 없다는 확신.
저녁 약을 먹이기 전에 사고가 났으니 새로 받아온 약은 사흘도 채 먹이지 못했다. 거의 그대로 남은 새 약봉투를 도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그러고 나니 새로운 슬픔이시작되었다. 냉장고 청소로 인한 피로를 핑계삼아 나는 다시 드러누웠다. 꿈에서는 자꾸만 숨어 다녔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때에도 몸을 일으킬 수 없어 누운 채로 생각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십 초 만에 죽는다는 건 얼마나 큰 고통일까. 결국 나는 날이 밝자마자 복이가 다니던 동물병원을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약을 타고 세 달이 지난 뒤였다.
접수대에서 어떻게 왔냐는 질문에 한참을 망설였다. 어… 그러니까요… 지난번 검사 결과를 원장 선생님이랑 보고 싶은데요…. 내 얼굴만 보고도 복이 이름을 대던 간호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원장님이 수술 중이셔서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그는 다시 한번 아기한테 무슨 증상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냥 뭣좀 여쭤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한참을 기다리자 원장 선생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찾았다. 동물 병원에 동물 없이 와서 의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으니까. 지난 정기검사 결과를 한번 더 듣고 싶다고 하자 선생님은 나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이번에도 선생님은 상태가 아주 나빠요,라고 말했다. 그래도 약을 먹으면 몇 년은 살 수 있죠? 하고 물으니 아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냐고 되물었다. 그제야 나는 사고에 대해 고백했다. 그리고 물었다. 선생님 복이는 피가 하나도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비명을 지르다가 십 초만에 고개가 꺾였어요. 선생님, 피가 나는 게 더 고통스럽나요, 안 나는 게 더 고통스럽나요?
선생님은 내게 휴지를 건네며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마도 척추가 부러진 것 같다고. 피가 나지 않고 즉사할만한 일은 그것 말고는 잘 없다고. 피가 났으면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되는데, 그럼 더 오랜 시간 고통받는 거라고. 그러면서 복이가 효자네요, 하고 덧붙였다. 피가 나고 끔찍한 모습이었다면 충격과 상처가 더 컸을 거라고 했다. 그 말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세 달 전 초음파를 틀어주며 설명을 이었다. 심장병 아이들은 금방 상태가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상태여서 안전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아주 건강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고. 보통은 심장병 진단받고 3년인데, 2년 전 이 병원으로 옮겼을 때, 이미 3년간 관리를 받은 것이니 최소 5년은 진행된 거라 볼 수 있고, 그럼 거의 말기라고.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히려 아기가 마지막을 괴롭지 않게 간 걸 수도 있어요.
선생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감히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지 싶었다. 아마도 그는 나를 위해 그런 말을 했을 테고, 이미 표정과 말투로, 나를 대하는 행동 하나하나로 복이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들었으니까. 비명소리를 똑똑히 들었으니까. 내가 들어본 소리 중에 가장 괴로운 소리였으니까. 나는 피가 나는 것보단 안 나는 게 덜 고통스럽다는 거죠? 하고 재차 물었고, 선생님은 그렇다고 했다. 남은 약은 모두 버리고 좋은 기억만 간직하라고. 몇 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선생님의 강아지 이야기까지 해주셨다. 다행이 아닌데 다행이라고 생각해서 눈물이 났다. 이런 마음을 먹으려고 온 게 아닌데. 하지만 그게 맞기도 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같은 마음들. 그런 마음이 복이를 위한 건지, 복이를 생각하는 나를 위한 건지, 모든 게 맞고 모든 게 틀린 것 같아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로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어 복이 약과 치즈를 확인했다. 여기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 선생님은 모두 버리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니, 버리기 싫었다. 그리고 복이 밥그릇을 닦았다. 매일 닦는데도 먼지가 빠르게 내려앉았다. 물그릇의 물에도 먼지가 떠 있었다. 물을 버리고 새 물을 받아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