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시작
빈 화면 앞에만 서면 손가락이 멈춘다. 잘만 나불대던 말들이 남겨지기를 거부한다. 거르고 거르다 보니 남는 것이 없다. 고르다 보면 모든 게 뒤죽박죽 섞여 버린다. 나아지겠지, 가라앉겠지 기다리기도 오래. 묵혀 둔 실타래에서 한 군데를 뎅강 잘라 슬며시 풀어내 본다.
정처 없이 떠돌다 보면 점점 내가 비워져 나가는 것을 느낀다. 만들어 내고자 하는 나의 모습뿐만 아니라 무심코 꿈꾸던 것들까지 어딘가로 흘러가 사라져 버린다. 내가 무슨 이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이 훅 들이받고 지나간다. 먹고 자고 싸고 움직이고 먹고 자고 싸고 움직이고 - 의 연속. 눈 앞의 풍경이 급격하게 변할 뿐 생각과 의문과 감상은 비슷한 곳을 맴돌고, 사람들은 나를 오해하고 나도 사람들을 오해하고 간간이 진심을 주고받고. 결론적으로 나는 여행에 미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나를 증오하고 동시에 나를 사랑한다. 다른 인종은 아직도 새롭지만 낯설지는 않다. 더 이상 다른 공간에서 덧없는 자유를 그리지 않는다. 나의 오늘을 삭제하지도 않는다. 이 글은 그저 한국에서 하루를 살고 있는 내가 떠올리는, 대체로 권태롭고 때때로 울렁이는 기억들. 여전히 그곳에서 그럭저럭 살아내고 있을 사람들과 사물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