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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된장보리 Jun 06. 2019

(일기특집)2008.09.27

새벽 3시. 오늘의 공부를 끝냈다.


중학생 때부터 틈틈이 일기를 써왔다. 

한창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유행했었는데, 

주인공을 따라 한다며 나도 일기장에 온갖 말들을 다 적어온 것이다.

방 정리를 하며 발견한 그 시절의 나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이 나를 알고 있는 듯하다.

이런저런 경험과 시간을 지나 현재의 나는 이런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그 본질-무어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종종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하며, 또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기도 한 나를 바라보며.



2008년 9월 27일


새벽 3시. 오늘의 공부를 끝냈다.  

의도하지 않게 낮잠을 3시간이나 자버렸던 터라 실질적으로 공부한 시간은 별로 되지 않는다. 

그새 겨울이 되어버렸다. 분명히 수요일까지는 더웠는데 비가 한 번 오더니, 

가을도 안 오고 바로 겨울이 되어버렸다. 싫다. 가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벌레가 나왔는데 모두가 합심해서 별 짓을 다해 죽여 버렸다. 

차라리 한 번에 죽이는 것이 덜 고통스러운 것을... 인간은 역시 잔인하다.

요즘 살아있는 것이나 고통에 대해 부쩍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쩌면 큰 행운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이것저것 느낀 것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을 하다 보면 끝이 안 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것이 우주까지 뻗쳐 나가 버리면 답답하다.

내가, 내가 있는 이 시대가 과거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안 믿겨서.

영원히 이 모습일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니까.

어떻게 하면 현재를 가장 잘 보낼 수 있을지 몰라서.. 슬프다.

하루라도 더 어릴 때를 간직하고 싶다. 공부는 미래를 위한 거지만, 과거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아, 일기장이다. 지금이다. 바로 지금. 

내일도 아니고, 어제도 아니고 지금이다. 방금의 1초가 과거가 되었다.

그때를 모방할 순 있어도 돌아갈 순 없다. 

좀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시야와 마음가짐을 갖고 싶다.

꼼꼼히 무언의 흔적을, 누군가 깨뜨린 병의 파편이나 지루한 하굣길까지도,

구름의 모습, 친구들, 가족들,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잊지 않도록.

그들의 지나간 시간인 전체의 과거를, 그리고 과거가 될 지금까지도.


긴장되지도 않는데 왠지 손에서 땀이 난다. 너무 조용해서 시곗 소리밖에 안 들린다.

시험기간이라 교과서가 책상 위에 쌓여 있고, 크런키 초콜릿 포장지가 구석에 박혀있다.

완전히 쉬어버린 우유가 뜯기지도 않은 체 책장에 놓여있고, 

나는 다리를 굽혀 의자 위에 올리고 앉아 있다. 

책장에는 2살, 초등학교 1학년 때 사진이 있고, 

오른쪽 벽에는 만화 공연 포스터 5개와 영화 식객 포스터, 그리고 내 미술 작품들이 붙어 있다.

커튼은 반 접어서 내가 묶어놨다. 

침대 위에는 티셔츠 2장이 널브러져 있고 방안은 떨어진 머리카락들로 가득하다.

책장에 기타가 기대어 서있고 난 노란색 우리 반 티셔츠를 입고 있다. 내일은 놀토라 학교에 안 간다.

다 기억할 수는 없을까. 평생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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