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야생의 위로
숲세권이라는 용어를 보면, 나의 바운더리(boundary)에, 또는 바쁜 마음속 한 자리에 작은 숲을 조성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지은이 에마 미첼은 25년 간 자신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나 자신과의 직면을 산책길의 동식물과 함께 이루어 냈다. 책은 지은이 자신으로 봤을 때는 외롭고 처절한 기록이지만, 동시에 자연이 주는 생명력 덕분에 독자에게는 한 숨 돌려 쉴 수 있는 작은 숲이 되었다.
야생의 위로
- 지은이: 에마 미첼
- 출판사: (주)도서출판 푸른숲
- 박물학자가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 25년간 우울과 싸워 온 박물학자가 수집한 꽃과 식물, 자연물에 관한 열두 달의 기록
지은이는 자연과의 친밀한 교감을 통해 자기 안의 강력한 회복탄력성, 스스로 나을 수 있는 힘을 발견한다. 가시자두나무와 보리수를 바라보고, 울새의 재잘거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의 절정을 경험한다.(추천의 말, 정여울 작가)
지은이는 10월부터 다음 해 9월까지 1년간, 월별로 목차를 두어 그 달에 지은이가 마주한 계절의 동식물을 소개하고 있다. 작년 9월에 이 책을 운 좋게 구입하여, 첫 번째 순서인 10월부터 매월 1일이 되면 그 구간만 읽었고, 지은이가 붙인 소제목: 달에 나타나는 자연의 변화들을 내 월간 플래너에 적는 것이 루틴이었다. 10월은 <낙엽이 땅을 덮고 개똥지빠귀가 철 따라 이동하다>이며, 나는 개똥지빠귀를 살며 본 적이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글귀가 적힌 플래너를 매일 보며 내가 왠지 자연의 일부로 10월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누구나 취미를 물어오면, 딱히 어느 분야에 열정도, 재능도 없어서 영화보기, 책 읽기, 산책이라고 답을 하곤 했는데, 이 셋은 지금의 나를 쉬게 하는 작은 숲이 되어 있다. 힘들면 잠시 도망칠 수 있는 곳이자 반대로 나를 가장 나 답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들.
이 책은 영국의 박식한 박물학자가 독자들에게 계절별 동식물을 소개하는 책이지만, 그가 우울증을 25년간 겪어왔다는 점에서 그 장르가 자연도감을 넘어선다. 지은이는 마치 살기 위해, 위로받기 위해 산책을 택하며, 동식물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심리상태도 함께 언급한다.
그중 지은이의 불안정한 정서상태가 가장 절정이었다고 생각되는 3월, 4월을 소개하고자 한다.
3월, <산사나무잎이 돋고, 가시자두꽃이 피다>
소제목은 이렇게 희망적으로 붙였건만, 그녀는 절망의 모양을 확인하려는 듯 가파르게 정신적으로 추락한다.
p.127 나는 우울증의 가파르고 매끄러운 벽을 따라 깊디깊은 우물로 곤두박질친다.
p.130 나의 세계는 좁아진다. 무능함에서 오는 죄책감이 나를 짓누른다.
p.130 내 뇌에는 과거의 극히 고통스러운 기억을 저장해둔 부분이 있다. 불안하고 불행해 보이는 내 아기, 상실된 관계, 이웃의 냉랭한 거부반응, 단절되어 복구 불가능한 특정 가족관계 하나하나가 내 전두엽에 강철 덤불처럼 복잡하고도 고통스럽게 뒤얽혀 있다.
p.133 머리는 온갖 상념과 자기 비난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단 한마디의 선언을 위한 증거를 찾아다닌다. 난 무가치한 인간이야.
그녀는 문득 도로 중앙분리대에서 자라나는 조그만 묘목을 발견하고, 자신의 참담한 비명을 가라앉힌다. 다음 날 정신건강지원팀과 회복 계획을 짜게 된다.
4월, <숲바람꽃이 만개하고, 제비가 돌아오다>
그녀는 예쁜 오두막집이 있고, 자신을 염려해주는 남편과 두 아이가 있으며, 사업들이 조금씩 잘된다고 표현하면서 그러나 우울증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사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상태로 인해 가족들의 일상이 평탄하지 않다고도 고백한다. 사는 것이 불길과 싸우는 것과 같다고도 한다. 다행히, 4월은 그녀가 어떻게든 나아지기 위해 스스로 애써 자신을 일으키려는 모습이 보인다.
p.141 정원 울타리에서 수컷 검은지빠귀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하다. 서정적이고 덧없는 그리운 노랫소리가 머릿속에 현란한 색의 불꽃을 터뜨린다.
p.146 영화도 보고, <중략> 친구 샬럿네 가서 지내기도 하고, 소소한 프로젝트(뜨개질)에 집중하며, 나 자신에게 선물(새 모이 보관소)도 산다.
p.147 참새 무리가 단골손님이 되고, 박새와 찌르레기 한 마리, 오색 방울새 한 쌍, 오목눈이까지 찾아온다.
p.161 나도산마늘은 잎이 무성해지기 시작했고, 꽃망울도 맺힌 상태다. 허브베니트도 피어난다고 했다. 머리 위 나뭇가지에서 조그마한 형광 연둣빛 조각들을 발견한다. 올해 돋아난 개암나무 새잎이다. 아주 작지만 경이롭다. 오늘 목격한 봄의 신호들이 나의 회복을 거들어 줄 것을 확신한다.
그녀는 자연과 자신의 내면을 함께 관찰한다. 이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속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두렵고, 이를 드러내 보일 때 상대방이 알아줄까? 하는 수용의 기대마저 크기 때문에 내 감정을 오롯이 책임지는 일이 버거울 때가 많다. 그러나 책 속의 지은이는 예고도 구분도 없이 일상으로 강력하게 번져가는 어둡고 힘든 자신의 감정과 정서상태를 그대로 관찰했고, 민감하게 서술해낸다. 또한 지은이가 정원과 숲, 산책로와 해변가에서 만난 자연물을 사진과 그림, 뚜렷하고 세세한 글로 나타내 주었기에 그녀의 심적 고통과는 별개로 살아있는 그것들을 떠올리는 게 어렵지 않다. 묘하게 잘 어울리는 심리상태와 자연물은, 그녀가 불길과도 같은 어두운 내면과 싸우고 있음에도 이렇게 자연 속에 다행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야생의 위로를 읽으며 영화 리틀 포레스트(한국, 103분, 임순례)를 떠올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가 판타지이며, 무공해이고, 계절마다 꺼내봐야 한다고 합니다.<네이버 평점> 저 또한 뭔가 뜻대로 되지 않거나 나 자신이 잘 살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겠을 때 그 답답한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기 위해 자주 봅니다. 책 야생의 위로는 우리가 의지하지 않아도 다가오는, 우리와 상관없이 순환하고 움직이는 자연물로부터 우리도 그의 일부라는 위로를 받는다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그중 자연이 우리에게 아주 잠시 내어주는 선물인 땅에다 경작을 하고 수확물로 음식을 하며 계절을 보내는, 인간의 노동이 덧붙여지며 좀 더 능동적으로 행복을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시험, 연애, 취업 등 어느 하나 뜻대로 되지 않던 혜원(김태리)이 고향으로 돌아와 오랜 벗들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과 함께 직접 키운 농작물로 한 끼 한 끼를 만들어 먹으며 사계절을 보내는 내용입니다.<네이버 영화>
혜원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으로 갔지만, 그곳은 자신이 수능을 친 직후 엄마가 돌연 사라진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혜원은 엄마가 어린 시절 만들어주던 음식을 곱씹어 따라 해 보고, 텃밭을 가꾸며 엄마의 선택과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의 답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재하가 회사를 그만 두는 장면, 은숙이 탬버린을 빗겨치는 장면은 항상 볼 때마다 흐뭇합니다. 그리고 정갈하고 소박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 연이어 나오며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동무 셋이 밤에 담금주를 먹는 장면은 저의 마음까지 안온하게 합니다.
내면의 안녕을 부르는 “작은 정원이라는 것, 숨을 쉬게 하는 숲”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고향이거나, 음식일 수 있고, 취미이거나, 말 그대로 산과 바다 같은 자연일 수 있으며, 벗들과 연인 같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소중하게 다루고, 천천히 가꾸며 잃지 않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