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브루잉(brewing) :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대학교 신입생 OT에서 눈이 맞아 학부생활 내내 붙어 다닌 우리들은 남들 눈에는 5명의 여자무리였다. 5명이니까, 당시 인기 아이돌인 동방신기의 최강창민 같은 활동명처럼 우리도 어느 날 서로를 띄워주는 별명을 이름 앞에 붙여주기로 했다.
너는 청순하니까 청순 OO, 넌 순수하고 웃음이 밝아서 순수 OO, 솔직하고 도발적인 너는 도발 OO..
도란도란 과방에 모여 서로 대학생활 잘해보자고 격려의 별명을 지은 건 기특한 순간이지만, 내게 남은 작은 의문은 내 별명을 짓는 데에는 친구들이 다소 뜸을 들였다는 점이다. 나는 가장 마지막에 지어졌고, 친구들 사이에서 ‘뭐 하지..?’라는 의문이 잠시 오간 뒤 나는 “매력 OO”으로 불리게 되었다. 친구들의 별명이 구체적이었던 데 반해 난 뭔가 대충 지어진 건가 라는 느낌이 얼핏 들었지만 내가 인생의 힘든 일들을 더러 겪을 때 친구들은 “우리 매력덩어리”라고 나를 격려해 줬었다. 그런 친구들의 지지와 환대가 좋았다. 어떤 날은 그 말이 약속 같기도 했다. 내 안에 내가 아직 모르는 좋은 것이 있을 거라고 믿고, 찾겠다는 약속.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내가 만든 삶의 모서리에 심하게 다쳐 더 이상 일을 멀쩡히 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점심시간마다 회사 안에 있는 상담센터에서 심리상담을 받게 되었다. 첫 시간 간단한 심리검사 후에 2회기 만남에서 상담선생님은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하셨고, 문득 나는 저 대학시절의 에피소드가 생각나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보면 저는 재능이나 강점이 있진 않았어요. 노력해야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해서 늘 애써야 하는 제 자신에게 유독 친절하진 않았어요.”
그 말을 들은 상담선생님은, “매력이라는 게, 성격이 다채롭고 위트도 있고, 자신이 가진 에너지가 따뜻하기 때문에 주변을 편안하게 한다는 거예요”라고 재정의해주며 “스스로 그렇다고 믿기만 하세요.”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마치 약속을 지키듯 나를 이해하고, 내게 친절을 베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한 시간들은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했으며 때로는 속이 상하기도 했다. 친절하기는커녕 질책이 앞섰고, 나도 나를 모르겠어서 내가 한 선택들이 이해되지 않아 미웠다. 그렇게 4년이 지나 이제는 친구들의 도움 없이도 내가 나를 매력덩어리라고 다독일 수 있을 때까지 조금은 사랑스럽고 피곤한 시간들이 쌓였다.
오늘 추출할 영화는
끝내 가장 어려운 건 늘 자기 자신인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노르웨이, 로맨스
2022.08.25. 128분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조건 없이 하는 사랑, 그래서 마치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듯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임을 우리는 알지만 애석하게도 우리가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믿었던 존재, 부모로부터 사랑받아본 경험-그분들로부터 진정한 존중을 받거나 ‘나 자체만으로’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경험했거나, 그 기억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어른이 되고 의식적으로 성숙하게 사랑하려 애써도 내 안의 충동은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의 찰나를 아직도 기억한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 내 인생의 큰 결정의 기준을 사랑으로 세운다든지, 상대에게 내 인생의 큰 축으로서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종종 시험대에 오른다. 태어나자마자 정말로 마음을 다해 의지했던 부모로부터 받은 수많은 감정들 가운데 유독 부정적인 감정들이 오래 남는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존재에게 의지하면 할수록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오히려 대중없이 과하게 의존하도록 터득하고 말았다.
영화 속 주인공 율리에의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삶이 12가지의 챕터로 전개되는 영화는, 그녀가 하게 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거나, 회피하다 이탈하기도 하는 선택의 순간들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삶에는 분명 그녀에게 중요한 가족, 연인들이 등장하지만, 등장만 할 뿐 그녀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자리로 그들을 초대하지는 않는다. 함께 깊이 고민하고 나누거나 상의하기보다는 굳게 다문 입으로 혼자 결심하고, 담배를 물며 다음 삶을 기대할 뿐이다. 그녀는 의대생이었다가 심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사진작가로 진로를 정하자마자 연인을 따라 글을 쓰기 시작하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했으나 악셀을 만나서는 스스로의 모성에 대한 반감과 인생의 조연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에이빈드로부터는 이해받지 못한다는 공허함을 남긴 채 자신이 숨겨 온 자책감과 혼란, 미성숙만 키워버린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을 최악이라 판정하는 일은 의외로 쉽다. 그러면 다음 챕터는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앙상한 기대가 생기곤 한다. 설마 이것보다 더한 최악이 있겠어? 사랑이 흔들릴 때마다 드러나는 것은 매번 다른 얼굴로 등장하는 두려움이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누구와 있든 내가 이해한 나로 자유롭고 안전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상대를 내 무의식의 증인으로 세우지 않을 수만 있다면 최악은 피할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