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얼마만의 여행이더라. 얼추 1년반? 아침에 일어나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6015번 버스 정거장이 집에서 100m거리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집 앞에서 지도 앱을 켰는데 버스가 1분뒤 도착이라서 시작부터 급하게 뛰었다. 전날 짐 싸느라 좀 늦게 잤더니, 약간 수면 부족이라 버스에서 마저 잤다. 셀프 티켓팅하고(여권 커버를 벗겨야 금방 인식됨. 커버 씌운채 몇번 시도하다가 짜증났었다), 환전하고, 로밍신청하고 바로 출국 수속. 면세점에서 어깨에 메고 다닐 백을 찾다가 샘소나이트에서 하나 샀다. 사이즈는 좋은데 약간 무거운 것 같은 기분이 좀 드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무거운 가죽가방은 피하게 되더라. 가벼운 가방이 최고인 것이다. 짐을 편하게 들려고 가방을 쓰는거지, 가방을 들고 다니려고 가방을 쓰는 건 아니잖아? 36번 게이트 앞 파스쿠치에서 패스트리 아스파라거스 핫도그를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함께 먹었다. 핫도그는 맛없었다. 말라비틀어진 아스파라거스 같으니라고. 처음 타보는 제주항공은 그닥 나쁘지는 않았다. 자꾸 대화에 욕을 섞는 옆자리 5인조 대학생들이 좀 짜증나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졸업했으면, 이제 좀 문장에서 욕은 빼고 말해주지 않으련? 네놈들의 주둥아리는 아직도 중졸인거니?
일본 도착. 입국수속은 별거 없었다. 수하물 찾는 곳에서, 면세점에서 새로 산 가방에 짐을 옮기느라 좀 늦게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관광안내센터가 보이길래 한국어로 된 안내 책자를 몇 개 집어들었다. 난 어딜 여행가든지 지역 관광 안내 책자나 팜플렛을 꼭 챙긴다. 이모티콘이 난잡하게 들어간 어지간한 여행 블로그 보다는 백배 훌륭하기 때문이다. 도쿄에 가기 위해 ‘게이세이 액세스’를 발권하고 판매원의 말을 따라 1번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하지만 잘못된 열차를 타고야 말았고, 그렇게 타버린 열차는 더 비싸고 더 빠른 열차였다(‘게이세이 스카이라이너’). 내가 타야 할 열차는, 내가 타버린 열차 바로 다음에 도착하는 열차였다. 열차가 달리던 중간에, 승객들의 티켓을 확인하던 차장 덕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현장에서 추가 금액 결제. 하지만, 이 열차는 빠른 대신에, ‘게이세이 우에노’역에 정차. 난 ‘센소지’를 보려고 ‘아사쿠사’에 가려고 했다고! 하여간 본의 아니게 ‘게이세이 우에노’역에서 하차했다.
이미 시간은 3시에 가까워졌다. 너무 배고파서 근처에서 아무거나 먹고 싶었고, 마침 우에노 공원 남쪽에 뭔가 식당가 아케이드 같은 것이 있어서 한바퀴 둘러봤다. 3~4층 정도의 공간이었는데,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만 있고, 내려가려면 계단을 사용해야 하는 희한한 구조였다. 하지만, 땡기는 가게도 몇 개 없었고, 그나마도 3시부터 브레이크라서 다 닫았더라. 그냥 1층에 있는 소바&우동집에 가서 메뉴판에 보이는 온면&텐동 셋트를 시켰는데, 면은 맘에 들었지만, 텐동은 매우 별로였다. 하지만 역시 생맥주는 최고였다! 도쿄여행 첫 술! 최고! 닛뽄 나마비루 스고이!! 먹다보니 카운터 옆에 “5명중에 1명이 시키는 인기메뉴!”라는 홍보 안내판이 보였다. 그거 먹을껄. 일본어도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서 뭔가를 주문해 본 첫 경험이다보니, 시야가 좁아졌나보다. 뭐, 점점 나아지겠지.
먹고나니 힘이 났고,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뭘 할까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 일본 여행을 와 있던 J누나의 조언을 따라(카톡으로 물어봤다), ‘우에노 공원’ 북쪽에 있는 도쿄국립박물관으로 걸어 갔다. 공원은 상당히 넓었고, 날 좋은 여름날에 오면 기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회색빛 겨울날의 공원은 뭔가 스산했다. 박물관 입구에서 일반관람으로 표를 살까 특별전도 볼 수 있는 표로 살까 고민하다가, 특별전 겸용으로 티켓팅을 했다. 들어가서 코인락커에 짐을 넣으려고 동전을 바꾸면서, 안내원에게 폐관이 언제냐고 물어보니 5시라고 한다. 앞으로 40분밖에 안 남았다. 젠장!
그냥 후딱후딱 보다가(일본도와 인형이 인상적이었다) 특별전 구역에 가니 이미 “closed”. 바로 포기하고 밖으로 나와서 잠시 쉬면서 벤치에 앉아있는데, 바람은 차갑고 건물 지붕의 까마귀 울음소리는 우렁차더라. 뭔가 의욕이 꺽기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준비없이 온 여행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안풀릴 수가 있는건가. 작년의 불운이 아직 끝나지 않은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벌떡 일어나 ‘센소지’ 절을 구경 갈 생각으로 전철을 탔다. 그런데 전철을 타고나서 도쿄 안내서를 보니 센소지는 5시에 마감. 아무런 준비없이 여행을 시작한 내 잘못이다 싶었다. 그냥 아사쿠사 동네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친한 옆 동네 바 사장이 추천해준 바 용품점 가게가 아사쿠사에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가게 이름은 소키치(sokichi).
소키치는 대만족이었다. 가게는 15평정도의 크기로 상상했던 것보다 매우 작았으나, 사고 싶은 것은 매우 많았고, 실제로 많이 샀다. (지거2, 동 머그잔 2, 나무 머들러 1, 일본 산 소믈리에 나이프 1, 프랑스 산 와인 오프너 1) 한참 둘러보는데 또 다른 한국인 바텐더가 와서 쇼핑을 했다. 한국 바텐더들이 많이들 찾아오는 가게라고 하더니 빈말이 아니었던 듯. 서울 시내 유명 위스키바에서 봤던 멋있는 칵테일잔들이 여기에 다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도쿄 대부분의 바에서도 여기 와서 물건을 사 간다는 듯 하다. 사지는 않았지만, 왼손잡이용 소믈리에 나이프가(와인 오프너) 있다는 것이 상당히 놀라웠다.
시간이 꽤 흘렀고, 친구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져서 롯폰기에 있는 친구네 집으로 찾아갔다. 친구 M(대학 동기)의 집에서 이번 여행동안 신세를 지기로 하였다. M은 미국에 살고 있었는데, 1-2년 정도 도쿄로 파견 근무를 오게 되었다. 덕분에 나도 놀러오게 되었고. 난보쿠선을 타고 롯폰기잇쵸메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착각하여 히비야선을 타고 롯폰기 역에서 내리는 바람에, 구글맵의 안내에 따라 열심히 걸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도쿄 전철은 좀 어려웠다. 하여간 열심히 걸어서 M보다는 먼저 숙소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베이스캠프 ‘Izumi Garden Residence’. 로비에 앉아서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M이 왔고, 난 좀 씻었고, M은 날 끌고 일본식 해물덮밥 집으로 데려갔다. ‘아크 모리 빌딩’ 3층에 있는 ‘츠지한(Nihonbashi Kaisendon Tsujihan)’. 다른 동네에 본점이 있는데, M의 집 앞에 지점이 생겼다고 했다. 본점은 어마어마하게 웨이팅을 해야 한다는 듯. 하지만 이 곳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는지, 우리는 웨이팅 없이 바로 자리에 앉았다. 진짜 맛있었다. 뭔가 제대로 된 일본음식의 맛을 보는 기분. 처음에 4장의 사시미를 주는데, 일단 2장을 맛보고, 그 다음엔 해물덮밥을 먹고, 마지막엔 남은 해물덮밥에 남은 사시미 2장을 넣고 육수를 부어서 먹는 신기한 식사였다. 그래 이게 내가 꿈꾸던 일본여행의 식사라고! 첫 식사를 소바&텐동으로 먹었다고 M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건 한국으로 치면 분식집 같은 거라고 했다. 그래. 실망할 만 했구만.
다 먹고나서 M은 운동하러 가고, 난 W를 만나러 시부야로 출발했다. W는 아주 오래된 가게 단골 손님이다. 대학 졸업 후 일본 회사에 취직해서 도쿄에 살고 있다. 뭐 이 정도 오래 알고 지냈으면, 가게 단골이라기 보다는 친한 후배라고 보는게 맞지 싶다. 그냥 호칭만 사장님일 뿐인 것이지. 시부야에 도착해서 전철 출구로 나오자마자 눈앞에서 시부야 스크램블이 펼쳐졌다. 사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지면서 교차로를 건너는데, 눈으로 직접보니 멋있기는 하더라. 강아지동상 ‘하치코’ 앞에서 W를 만나기로 했다. W가 ‘하치코’ 앞에서 만나자길래 엄청 큰 동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너무 아담하고 작은 동상이라서 찾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사장님!” 소리에 뒤돌아보니 W가 서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일본에서 만나게 되니 신기하고 반가웠다. W는 니혼슈를 취급하는 시부야 구석에 있는 오뎅집으로 날 데리고 갔다. 평소에 가끔 가는 가게라고 했다. 내가 온다는데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일본에 왔는데 니혼슈를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가게로 왔다고 했다. 고마워 W! 나는 사케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10평 남짓한 작은 가게였는데, 시끌시끌한 것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2인 테이블이 두 개, 4-5명이 앉을 수 있는 다찌, 4-5인용 테이블이 2개.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4-5인용 테이블을 전부 붙여놓고 단체 손님들이 시끌시끌하게 마시고 있었다. 시부야는 젊은 동네라더니, 정말 어려보이는 애들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W말에 따르자면, 시부야는 우리나라로 치면 신촌이나 홍대 연령대의 사람들이 온다고 한다. W는 회식을 하고 오느라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이 동네는 정장입고 돌아다니기에도 좀 부담스러운 동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2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정말 다행히도 마지막 남아 있던 테이블이었다. 둘이 앉아서 도쿠리 4개 정도 마신 것 같다. 신나게 마시고 떠드느라 사진도 안 찍고 이름도 기억 안나지만, 도쿠베츠 준마이가 제일 맛있었다. 19도짜리 ‘구보다’ 나마 원주도 맛있었고. 손님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지만, 역시 비싼게 맛있다. 하여간,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보니,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한 듯하다. 쌓인 이야기가 정말 많기는 하더라. 엄청 기분 좋게 마셨다. 도쿄에 대나무숲을 하나 장만한 기분이었고, 실제로 대나무숲에서나 할 만한 소리들을 좀 신나게 해버렸다. 고마워 W. 하지만 내가 한 말은 다 잊어버려 주는거다? 알지?
W왈, 요즘 일본 라멘의 핫한 트렌드는 아부라소바라고 했다. 그래서 2차로 아부라소바로 해장을 하려 했으나, 가려던 가게가 시간이 늦어서 마감을 해버려서, 아쉽지만 그냥 그대로 빠이빠이. 다음에 또 봐 W. 땡큐! W를 먼저 보내고 나서, 술기운이었는지 몰라도 갑자기 관광객 놀이가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신이 난 기분으로 시부야 스크램블을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W가 말하길 오늘은 목요일이라서 사람이 별로 없는거고, 주말에 오면 정말 엄청나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부야 스크램블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숙소(M의 집)에 돌아왔다가, 뭔가 아쉬워서 편의점에서 캔맥주랑 안주거리를 사와서 M과 한잔했다. 항상 궁금해 했던 산토리 하이볼 캔도 사와서 마셔봤는데, 알코올의 비율이 너무나 절묘해서 놀랐다. 탄산의 느낌도 너무 강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도수는 7%였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이 맛을 어떻게 낼 수 있을지 실험해 봐야겠다. M은 내일 출근을 해야해서 먼저 잠이 들었다. 맥주 한 캔을 더 마셨다. 첫 도쿄의 첫날밤이구나. 기분이 묘했다.
딱히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11시쯤 여유있게 일어났다. M은 이미 출근하고 집에 없었고, 어제 W가 알려준 츠케멘을 먹으러 가기로 결정했다. 츠케멘 가게는 도쿄역 라멘 스트리트에 있다고 했다. 도쿄역으로 가던 중에 긴자선 교바시역 바로 앞에 있는 ‘Meijiya Kyōbashi Store’ 라는 이름의 근사해 보이는 식료품점에 들렀다. 다양한 식료품을 판매하는 약간 고급스런 중형마트 느낌이었다. 가게를 둘러보는데 시식코너에서 뭔가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고, 시식코너 직원의 외침에 분명히 아는 단어가 들어있었다. “xxxxx~ 순두부찌개~ xxxx~” 순두부찌개 즉석조리식품을 파는거냐! 이와중에 ‘순두부찌개’발음은 왜 이리 정확한 거지? 날이 추우니까 반응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좀더 가게를 둘러보던 중 통조림 코너가 눈에 띄었다. 아주 다양한 통조림들이 있었는데, 술안주하기에 딱 좋은 느낌의 요리들이 통조림에 담겨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먹을 생각에 몇가지를 사려고 옆에 있던 시식코너 직원에게 골라달라고 부탁했지만, 담당직원이 아닌지라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좋아. 파파고를 써보자. 파파고로 사진을 찍고 텍스트를 인식시켜보니 매우 훌륭히 인식이 되었다. 앞으로 어디가서 메뉴판 받으면 그냥 파파고로 사진찍어서 해결하면 될 듯 싶다. 굴 빠테, 고기 스튜, 일본식 엔초비 통조림을 샀다.
구글맵을 따라 걸었는데, 가는 길이 공사장에 막혀 있었다. 공사하는 것 까지 구글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어제부터 뭔가 자꾸 잘 안 풀리는 느낌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여간 길을 빙 돌고 열심히 걸어서 도쿄역에 도착. 도쿄역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좀 덜 정신 사나운 코엑스몰을 돌아다니는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초행이다 보니, 츠케멘 가게가 있는 라멘 스트리트(지하 1층)를 찾느라 약간 헤매였다. 도착한 츠케멘 가게의 이름은 ‘로쿠린샤 (六厘舍)’. 도쿄에서 손꼽히는 츠케멘 가게라고 한다. 점심시간이 약간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30분정도 웨이팅을 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라멘가게처럼 셀프 티켓머신에서 주문을 하는 방식이었다. 머신에 적힌 일본어를 모르니, 그냥 직원이 추천하는 메뉴를 주문했다. 구석에 2인석에 혼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음. 맛있긴한데, 뭐 엄청나게 감동적이진 않았다. 내 친구 중에 하나는 일본에 여행와서 1일 1츠케멘을 했다고 하던데, 아마도 취향차이가 좀 있지 싶다. 나중에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양은 정말 많았다. 면이 상당히 많아서, 면만 계속 먹기 벅차서(?) 차슈랑 계란을 추가해서 먹었을 정도였다. 내 생에 첫번째 츠케멘이었는데, 일본에서 손꼽히는 가게에서 먹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걸보니, 앞으로 굳이 츠케멘을 찾아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 타입 아닌 것으로 결론. 아, 그래도 계란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노른자가 무슨 젤리같았다. 어떻게 조리를 한 건지 정말 궁금하더라. 한국에선 못 만나본 노른자였어.
배터지게 먹고 나서(너무 많아서 결국 남겼다), 오늘 너무 추워서 옷을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하 아케이드를 조금 걸어봤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간판 ‘Tokyo Shirts’. 그래, 일본에 왔으면 일본 물건을 사야지. 마침 베스트를 세일하고 있길래 봤더니 마음에 드는 게 몇 개 보였다.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이것저것 물어보고 결국 하나 샀다. 신기해 하는 가게 점원에게 파파고의 위대함을 전파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괜히 막 뿌듯하더라. 하여간, 울 50% 베스트를 45,000원에 득템! 따뜻하다! 도쿄의 겨울을 너무 얕봤어! 난 도쿄가 이렇게 추운지 몰랐다고!
근처에 갈만한 곳을 찾아보니 미츠이미술관이 있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보는 것을 워낙에 좋아해서, 여행갈 때마다 도시의 유명 미술관은 꼭 가보는 편이다. 슬슬 걸어서 도착하니, 휴관. 왜! 도대체 왜! 오늘은 정기휴일도 아니고 그냥 전시 전환을 위한 휴관인 듯 싶었다. 구글맵에도 오늘이 휴관이라는 말은 없었다고! 진짜. 여행의 신이 날 버린건가.
약간 멍한 상태로 맞은편 건물(Coredo 빌딩)의 가게들을 사부작 돌아다니다가,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말라서 일본식 과자(?)를 파는 찻집에 들어갔다. 주문을 하면 일본식 과자를 눈앞에서 만들어주는 가게였는데, 만드는 걸 보고 있으니 마음에 좀 안정이 오더라. 예쁘고, 맛은 그냥 그랬고(단팥 앙금 맛), 신기했다. 마지막에 후식차를 한잔 줬는데, 엄청나게 스모키했다. 위스키 체이서로 쓰면 엄청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오고 싶었지만, 여기서 팔지는 않았고, 어디서 살수 있는지 직원분께서 알려줬다. 정신을 차리고 가게를 나와서 다시 슬슬 걸었다. 시내 빌딩숲 한가운데에 신사가 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완전 현대식 빌딩 옆에 작은 신사라니. 여기가 일본이 맞기는 하구나. 그러다가 안경점 발견. 일본 안경테를 좋아하는지라 얼른 들어가 봤지만, 원하는 디자인은 없었다. 일본에서 안경테를 사면 싸게 살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근처 다른 안경점을 검색해봤다.
그렇게 찾아간 ‘Nakaya’ 안경점. 할아버지 사장님과 여직원 둘이 운영하는 5평 남짓한 공간의 오래된 가게였다. 몇십년 전의 동네 작은 안경점에 와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들렀던 으리으리한 안경점에는 없었던, 내가 찾던 디자인의 안경이 이 가게에는 4개나 있었다. 기쁘다! 역시, 인테리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알맹이가 중요한 것이지. 캐주얼 스타일이냐, 고저스&리치(할아버지 사장님의 표현이다) 스타일이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캐주얼 스타일은 이미 몇 개 가지고 있었기에 고저스&리치 스타일로 골랐다. 25,000엔 현찰 지불. 할아버지가 안경 카다로그를 보여주시면서 이거 원래 30,000엔 넘는건데, 싸게 파는거라고 막 영업하셨다. 네. 압니다. 이거 한국에서 사면 아마도 40만원정도 할 거에요. 할아버지 땡큐! 생각지도 못한 큰 지출이 터져버렸지만, 괜찮아! 싸게 샀잖아? 사실 가격도 가격이지만, 한국에서 구할 수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더 중요한 포인트 아닐까 싶다. (한국 돌아와서 검색해보니 판매하는 곳이 있긴 하더라)
6시에 숙소에서 M과 만나기로 했던 터라, 숙소로 이동을 했다. 퇴근한 M과 만나서 긴자로 이동. 드디어 시작한다, 긴자의 밤. 긴자의 밤은 나에겐 로망같은 것이었다.
일단, 제일 먼저 닷사이 스토어를 들렀다. 일본 사케 ‘닷사이’ 양조장의 사케 안테나 스토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전체 라인업을 다 팔고 있었고, 테이스팅 셋트도 준비되어 있었다. M과 나는 테이스팅 셋트 2개와 ‘닷사이 비욘드’ 한잔을 주문했다. ‘비욘드’는 닷사이 최고등급인데, 한병에 30,000엔이라는 화끈한 가격의 사케이다(잔으로 시켜도 한잔에 2천엔). 신경을 곤두세우고 테이스팅 셋트와 ‘비욘드’를 마셔봤는데, 총평을 먼저 말하자면, 파워풀한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스타일인 것 같다. 이 양조장이 추구하는 바는 아마도 ‘물 같은 술’이 아닐까 싶다. 와인으로 치자면 부르고뉴랄까? 특히나 비욘드는, 귀티나는 향을 보여주는데 입에 넣으면 너무나 은은해서, ‘이슬을 마신다’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다른 것들을 먼저 마시고 나서 ‘비욘드’를 마셨는데, 처음엔 딱히 임팩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급스럽다는 강한 인상만 있을 뿐. 그런데 비욘드를 먹고 나서 다른 아랫등급 사케를 마셔보니, 뒷맛에서 어찌나 잡스런 맛들이 몰아치는지. 인간의 혀는 정말정말 간사하기 이를데 없다. 비싼건 이유가 있고, 맛있는거 치고 싼 건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M은 이 놈의 술이 너무 은은하다보니, 오히려 제일 낮은 등급의 사케가 차라리 낫다고 했다. 향이나 맛이 확실히 존재감을 드러내서 그런 듯 싶다. 그리고 가성비를 생각한다면, 나도 50이 최고가 아닐까 싶다. ‘닷사이 50’도 이미 너무 충분히 훌륭해서, 지갑을 생각한다면 굳이 더 높은 등급을 마실 필요가 있나 싶다. 음식과 같이 먹을 거라면 ‘50’이면 충분할 것 같고, 순수하게 술만 즐긴다면 ‘23’이면 될 것 같다. ‘비욘드’…맛있긴 한데, 너무 비싸다. 크흡.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 최고! 신나게 마시고 ‘닷사이 23’ 두병과 ‘닷사이 50’ 한 병을 사들고 나왔다. 내 뒤에 계산하는 중국인은 6병 한박스를 사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이 가게의 가격이 면세점 보다 싼 터라, 아는 사람들은 여기서 박스 단위로 사간다고 하더라. 특히나 중국인들은 무조건 박스로 사간다는 듯.
가게에서 나오니 M이 배고프다며 음식점에 가자고 했다. 그냥 걸어가다가 아무데나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니 음식점이 아니라 다양한 음식을 파는 주점이었다. 스키야키를 주문하고, 에피타이저로 문어튀김을 시켰다. 그런데 문어튀김이 이렇게 맛있을 일인지? 일본에서는 아무데서나 뭘 먹어도 돈 값을 한다더니, 문어튀김도 스키야키도 너무나 맛있었다. 술은 간단히 생맥주만 시켜서 마셨는데, 그동안 서로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작년에 내 신상에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터라, 속 깊은 많은 이야기를 했더랬다. 오래된 친구는 소중하다.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의 솔직한 이야기는 더욱 더 소중하다.
배부르게 먹고 나와서 ‘바 오차드’에 갔다. 이 곳은 한국에서 지인 바텐더들이 가보라고 추천해준 바 였다. 바텐더가 추천하는 바 랄까. 금요일 밤이라서 자리가 없을까봐 걱정했었는데, 다행이 자리가 있었다. 너무너무 아담한 바였다. 아담하고 포근한 느낌의 작은 바. 바 자리 8석 정도에 작은 테이블 두 개. 바 위에는 작은 소품들이 한 가득 놓여있었고, 따뜻한 느낌의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가게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집의 포인트는 미친 창의력이었다. 칵테일이 정말 놀라웠다. 메뉴판은 없다. 단지 바 중앙에 높게 쌓인 과일 무더기가 메뉴판을 대신한다. 과일 중에 마음에 드는 과일을 고르면, 그 과일로 만드는 창작 칵테일이 나온다. 도대체 무슨 약을 하셨길래 이런 칵테일이 나오는 건가 싶었다. 바텐더들이 추천한 이유를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바텐더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덕분에 신기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긴자는 구역 전체가 금연이라는 사실이었다. 긴자에 관광객이 몰아닥치고 나서, 쓰레기가 문제가 되자 아예 긴자 구역 전체를 금연구역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혹시라도 긴자에 가게되면, 길거리에서 절대 담배를 피우지 마시기를. 벌금을 맞을 수도 있다.
‘오차드’를 나와서 ‘바 스즈키’라는 곳으로 갔다. 이번엔 구글맵 추천을 보고 찾아가 봤다. 정말 엄청 오래된, 어두운 조명에 긴 바가 있고, 담배연기가 살짝 흐르는 전형적인 느낌의 바였다. 오래된 가게이다 보니, 바 뒤로 창업자로 보이는 사람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메뉴판을 받았는데, 이 집의 시그니처가 진토닉이었다. 그래. 일본에 왔는데 진토닉은 먹고 가야지. 게다가 ‘히노키 진토닉’이라니. 잔도 히노키 나무잔이었고, 코스터도 (아마도) 히노키 나무였다. 폭발하는 나무 향. 너무 맛있었다. M은 이 진토닉 너무 맛있다며, 연속으로 두 잔을 마셨다. 난 바 뒤에 걸린 창작 칵테일 메뉴 중에서 와사비 칵테일을 골랐다. 일본 와사비 과자 맛이 났다. 신기한 맛이었어. 다음 가게로 어디를 갈까하다가, 바텐더에게 가게 하나만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바 모리’를 추천해 주면서, 가면 꼭 ‘마티니’와 ‘하바나 마티니’를 먹으라고 메뉴도 알려주었다. 친절도 하셔라.
‘바 모리’는 찾기가 어려웠다. 구글맵에 있는대로 열심히 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우리에게 뭐라뭐라 호객을 하는 삐끼가 있었고, 에라 모르겠다, 삐끼에게 “바 모리?”하고 외쳐보았다. 어랏. 삐끼마저 친절하네. 따라오라고 손짓하더니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데려다 주었다. 건물로 들어가는 우리에게 “GOOD TIME!”이라고 외치며 엄지를 치켜올리더라. 짜식. 귀엽네.
‘바 모리’는 건물 10층에 있었다. 찾기 어려울만 했다. 바에 자리가 없어서 나와 M은 테이블 자리를 안내 받았다. 하얀 벽에 아주 밝은 바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가게보다도 더 밝은 듯했다. 가게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다. 천장이 아주 낮았는데, 요즘의 가게들의 높은 천장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높은 천장의 가게가 예쁘다고 생각하던 나의 선입견이 와장창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바텐더가 다시 오더니, 바에 자리가 났다며 자리를 옮겨주었다. 그래. 우리 둘이 앉기에는 테이블은 너무 컸고, 가게는 너무 작긴했어. 바 정가운데에는 아주아주 나이든, 누가 봐도 사장님이라고 생각할만한 바텐더가 칵테일 메이킹을 하고 있었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 보다는 어리지만 충분히 나이든, 매니저로 보이는 또 다른 바텐더가 아주 쾌활하게 손님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조용히 놀다가는 분위기라기 보다는, 기분좋게 놀다가는 분위기였다. 이츠키 바텐더가 말해준대로, 나는 ‘마티니’를 주문했고, M은 ‘하바나 마티니’를 주문했다. ‘마티니’는. 정말. 정말. 맛있었다! 추천해 줄만 하구만! M이 마신 ‘하바나 마티니’는 맛있기는 한데, 정말 독했다. 양도 많았다. 술 약한 사람이라면 이 것 한잔으로 벅찰 정도로. 나도 그렇게 술이 센 편이 아닌데, M과 바꿔서 주문했으면 난 아마 반도 마시지 못했을 것 같다. 다른 일본인들이 많아서 구석에 앉은 우리에겐 별로 신경쓰지 않을거라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매니저 바텐더가 우리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니?” 라고 하더니, 바로 두번째 질문이 “직업이 뭐니?”. 솔직히 속으로 깜짝 놀랐다. 오늘 처음 본 여행객에게 이렇게 다이렉트로 직업을 물어보다니. 여행객이기 때문에 더 쉽게 질문한 것일 수도 있지만, 평소 처음보는 손님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는 나로서는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아, 이렇게 손님 응대를 해도 되는거구나. 뭐. 사실 내가 친절한 바텐더는 아니긴하지. 바를 운영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이것저것 스몰토크를 하면서 가게 사진을 보여줬다. 그러자 매니저는 나에게 몇 살이냐고, 몇 년 운영했냐고 물어보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You should quit.”
정말 M과 나는 순간 빵 터졌다. 내가 “이미 늦었어요. 42살이에요 엉엉”라고 하자, “나 54살이야. 날 믿어. 안 늦었어. 빨리 그만둬.”라며 맞받아쳤다. 정말 유쾌한 분이었다. 마티니가 너무 맛있다고 말하니, “Sure. I know.”라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시더라. 고마워요 매니저님. 갑자기 도쿄가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이것이 바로 연륜인 건가요? 이미 취기가 많이 올라왔고, 워낙에 독한 칵테일을 마셔서 한잔만 마시고 일어났다. 나오기 전에 가게 화장실에 들렀는데, 화장실에 사장님을 중심으로 역대 바텐더들이 모여서 찍은 단체 사진이 걸려있었다. 역사가 있는 가게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과연 나는 이런 가게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가게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나에게 있기는 한 것인가?
딱 한군데만 더 가보자는 생각에, 다시 구글맵을 뒤져서 평점 좋은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좀 실망이었다. 그냥 한국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특징 없는 그런 바였다. 그래. 일본이라고해서 모든 가게가 다 좋을 순 없겠지. 이제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 아직 먹어본 적이 없었던 야마자키 18년을 주문했다. 술이 많이 올랐는지, 그렇게 인상적인 맛은 아니었다. 한잔씩만 마시고 그냥 나와서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가게가 별로 였던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안그러면 긴자에서 밤을 샜을지도 모를 일 이니까.
택시를 타고 M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여행의 신이 날 버렸을 수는 있지만, 술의 신은 역시 내 멱살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12시쯤 느즈막히 일어났다. 해장을 하러 M과 함께 집 앞의 아크모리(Ark hill)빌딩에 있는 라멘집으로 갔다. 그저께 먹었던 해물덮밥집 바로 옆에 있는 가게였다. 일본여행와서 먹는 첫 라멘은 정말 감동이었다. 속시원한 맑은 닭육수의 라멘! 어떻게 이렇게도 국물이 시원할 수가 있는건지. 온 몸의 세포가 “해장완료!” 라고 외치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기대한 일본의 라멘이야. 츠케멘의 기억은 저멀리 날려버리자.
다 먹고 나니 M이 장을 봐야한다며 건물 앞 간이 장터로 데리고 갔다. 이건 딱 한국의 아파트단지 간이 장터 느낌이었다. 어디든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구나.
집으로 돌아와 뒹굴대며 좀 쉬는데, 갑자기 눈이 내렸다. 도쿄에서 눈 보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첫 여행에서 눈을 보다니. 이건 낮에는 그냥 쉬고, 밤에 술이나 먹으러 나가라는 술의 신의 계시다 싶었다. M이랑 닌텐도스위치 하고 놀다가, M이 가끔 간다는 집 앞의 카페(Ark Hill's Cafe)에 갔다. 카페에 앉아서 무릎에 담요 덮고 노트북 켜놓고 노닥거리는데, 그냥 참 좋더라. M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긴, M은 여기서 사는 사람이니, 여유 있게 늘어져있는 주말이 소중하겠지.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 M이 추천하는 집 앞 꼬치가게에 갔다. 아니 도대체 왜, 집 앞 도처에 맛집이 널려 있는거냐. 이것이 롯본기 클래스인가. 가게의 인테리어는 깔끔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비쌀 것 같은 집이었다. 직원이 오더니 외투를 옷장에 넣어주었다. 주방 직원이 디귿자 형태의 다찌 안에서 꼬치를 굽고 있었는데, 연기가 천장으로 완벽히 빠져나가는 구조였다. 나도 장사하는 입장이다보니 다른 가게에 갈 때면 설비를 유심히 보게 되는데, 디자인 참 잘했다 싶었다. 일단 생맥주를 시키고, 메뉴판의 꼬치들을 종류별로 주루룩 시키기 시작했다. 먹는 것 마다 다 맛있더라. 닭, 야채, 버섯, 닥치는대로 시켰고 신나서 먹었다. 특수부위도 팔고 있었는데, 닭알주머니 꼬치는 약간 충격이었다. 정말 못 먹는게 없구나 싶더라. 생긴게 정말 그로테스크해서 약간 비위가 상하는 기분이었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먹어보나 싶어서 눈 딱 감고 먹어봤다. 입 안에서, 겉만 익은 덜 자란 작은 계란들이 톡톡 터지는 식감이었는데, 맛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그냥 한번만 해보는 것으로.
해가 지고 배가 부르니, 몸의 컨디션이 슬슬 올라왔다. 난 정말 밤의 사람이 되어 버렸구나. 이쯤 되면 뱀파이어 아닌가요. 오늘은 혼자서 롯본기 투어를 하기로 했다. M은 그냥 집에서 쉰다고 했다.
기왕에 준비 없이 떠난 여행, 검색해서 맨 땅에 헤딩 해 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고른 가게는 ‘캐스크 스트랭스’. 이름부터 대놓고 위스키 바이고, 사진도 괜찮아 보이길래 가봤다. 숙소에서부터 걸어서 갔는데, 은근히 추웠다. 토요일인데도 길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바는 건물 지하에 있었고, 회색 빛의 중세시대 지하창고 같은 느낌의 인테리어였다. 바텐더들은 베스트를 갖춰 입었고,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차분한 가게였다. 토요일 저녁 시간이라서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나 포함 5명의 손님이 있었다. 날씨가 추우면 손님이 뜸한 것은 역시나 만국 공통인가보다. 바 뒤편의 술장에는 못보던 술들이 한가득이었다. 가게 이름을 이렇게 지을 정도면 이정도는 해줘야지 싶더라. 바텐더가 오더니 여기엔 메뉴판은 없고, 원하는 것을 말하면 추천을 해준다고 했다. 영어로 설명을 해주는데, 뭔가 이상한 억양에 일본식 발음 까지 섞여서 알아듣기가 엄청 힘들었다. 나도 영어를 그닥 잘하는 편이 아니다보니, 이야기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가게 분위기도 친절하고 쾌활한 분위기보다는 각 잡고 폼 잡는 분위기라서, 대화에서 친근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일본 현지인들이 와서 즐기기에 좋은 가게인 듯. 바텐더와 친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한 가게랄까. 작년에 15주년이었다고 한다. 하여간, 위스키 추천을 부탁했다. 난 술이 센 편이 아니지만, 이런 가게에 왔는데, 못 먹어본 위스키 열심히 먹어봐야지. “전 오반, 달위니, 킬커란을 좋아하고, 발베니, 맥캘란, 글렌리벳을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자, 첫 위스키로 ‘Scapa’를 추천해줬다. 본 적은 있지만 먹어본 적은 없었는데, 내 입맛에 딱 이더라. 술을 마시면서 가게를 둘러보는데, 바 구석에서 막내로 보이는 바텐더가 아이스픽으로 아이스볼을 깍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얼음을 쳐 내는데, 멋있더라. 나도 한국 돌아가면 얼음 치는 연습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막내바텐더의 자세를 한참 동안 유심히 쳐다봤다. 다른 위스키를 한잔을 더 마시고 나서 술들을 훑어보는데, 갑자기 ‘소사이어티’가 눈에 띄었다. 일본 의뢰품이라며 꺼내서 보내주는데, 일본의 ‘풍신’ 과 ‘뇌신’이 그려진 병이었다. 이런 특이한 것 너무 좋다. 그런데 가격이 한잔에 8000엔. 한잔에 8만원. 내가 좀 망설이자, 갑자기 바텐더가 절반의 양으로 4000엔에 마실 수 있다고 했다. 나야 땡큐지! 날이 추워서 손님도 없고,(내가 마시던 사이 다른 4명의 손님이 나가버려서, 가게에 나 혼자 있었다. 토요일 롯본기 저녁시간에 말이다.) 벌써 몇 잔 먹었으니 서비스해준게 아닐까 싶다. 손님이 없으니 이런 운도 따라주는 군. 긴자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더니, ‘하이파이브’에는 안 가봤냐고 바텐더가 물었다. 검색에 걸리긴 했었는데, 유명한 가게인가 보다. 마지막 잔을 주문했다.”당신이 좋아하는 위스키로 하나만 추천해주세요.” 그래도 몇 잔 마시면서 어렵게 어렵게 대화를 좀 했더니, 바텐더의 표정도 어느정도 경계심이 사라진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래, 그 마음 이해한다. 엄청 추워서 손님도 없는 날, 혼자 나타난 처음 보는 남자 손님은 경계 해야 할 대상이 맞지. 추천해 준 위스키에는 일본 풍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이게 도대체 뭐냐는 표정을 짓자, 이 바에서 ‘아란’ 증류소에 의뢰해서 만들어진 라벨이라고 했다. 거참 신기하네. 마지막 잔을 마시고 다른 바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바텐더는 자기네 가게와 같은 회사의 가게라며, ‘미즈나라 캐스크’라는 곳을 추천해 주었다. 바를 여러 개 운영하는 회사 같은 느낌인가 보다.
바를 나와서 걷다가, 간판이 너무나 깔끔하게 예쁜 가게가 있길래 무작정 들어가 봤다. 간판 만큼 내부도 깔끔했다. 좀 심하게 깔끔했다. 엄청 작은 1인 바였다. 뭔가 아차 싶었으나, 일단 바에 앉아서 메뉴판을 펴봤다. 아주 일반적인 칵테일 리스트와 와인 리스트가 있었다. 그런데, 천만원짜리 와인이 리스트에 있었다. 이 집 도대체 뭐지. 이미 위스키를 좀 마셨으니, 속도 조절을 위해서 이렇게 주문을 했다.
”제가 술이 세지는 않으니, 라이트한 칵테일로 추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바텐더와 문답이 이어졌다.
“신맛이 좋습니까, 단맛이 좋습니까?”
“음, 밸런스 있는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아... 어렵네요.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오렌지 주스에 보드카를 부어서 나에게 주었다. 약간 정신이 멍해졌다. 마셔봤다. 와. 진짜. 맛없었다. 이거 지금 나보고 나가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애초에 저렇게 주문한 나의 잘못인가? 아니면 여기는 외지인을 받지 않는 가게인가? 도저히 더 마실 수가 없어서 괴로워 하다가, 핸드폰으로 메세지를 주고 받는 척하다가, 깜짝 놀란 척을 한 후에, 급하게 자켓를 입었다.
“저 죄송한데, 친구가 불러서 지금 나가야합니다. 계산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춥지 않으세요? 옷이 얇아보이는데...”
“저 서울에 살고 있는데,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서울은 내일 영하 10도라고 하던데요.”
“아이고, 심하네요.”
가게를 나와서 처음에 추천 받은 가게로 걸어가는데, 궁금증이 가시질 않았다. 나를 내보낼 생각으로 그런 칵테일을 준 거라면 마지막에 저런 스몰토크는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도대체 뭐 였을까? 그냥 칵테일이 맛 없는 집인건가? 아니면 저렇게 주문하면 안되는 거였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추천받은 가게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여기는 꽤 넓은 가게였고, 인테리어가 너무나 훌륭했다. 원목 위주로 인테리어가 된 가게였는데, 술장 가운데 자리잡은 커다란 나무 기둥이 인상적이었다. 민머리의 매니저가 웃으며 맞아 주었다. 인상이 참 좋았다. 첫번째 가게보다는 좀더 밝은 접객 분위기 인 듯. 막내 바텐더도 약간 업 된 텐션으로 응대를 해줬다. 아이스볼 깍던 무표정한 첫번째 가게 막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애초에 두 가게의 컨셉을 그렇게 다르게 잡은 모양이다. 저쪽 가게에서 추천받아서 왔다고 말한 뒤, 여기서도 일단 가벼운 칵테일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해 봤고, 모스코뮬을 추천받았다. 익히 알고 있는 칵테일이지만 도전. 맛있었다! 아주 진한 생각향이 입에 맴돌았다. 생각즙을 직접 만들어서 쓰고 있는 듯했다. 그래. 내가 원한 가벼운 칵테일은 이런거 였다고. 이 곳 역시 아주 많은 위스키가 있었고, 모스코뮬을 다 마신 뒤, 희귀한 위스키를 부탁해봤다. 오래된 위스키를 찾느냐고 물어보더니 매니저가 권해준 것이 오반. 역시 오래되고 비싼 건 맛있다. 이 집은 다 좋은데, 좀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음악. 음악이 너무 80년대 히트 팝송으로 흘러 나와서 조금 괴로웠다. 예를 들자면 ‘Without you’ 오리지널버전에, 영화 고스트바스터즈 오리지널 주제가 같은 것들? 사람마다 음악 취향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가게에 ‘고스트 바스터즈!’라는 코러스의 샤우팅이 울려 퍼질 때는 좀 기분이 그랬다. 하여간, 매니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첫번째 가게에서 먹은 위스키 사진들을 보여주었는데, 내가 일본 일러스트가 들어간 술이 신기했다고 하니, 갑자기 몬스터헌터가 그려진 술을 보여줬다. 이 것 역시 이 바에서 의뢰해서 제작된 술이라고 했다. 그리고 울트라맨이 그려진 위스키도 보여줬다. 두 위스키 모두, 라벨에는 이 가게 ‘미즈나라 캐스크’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걸 만들 생각을 한거지. 노닥 거리다보니 슬슬 취기가 돌기 시작하길래, 여기서는 이 것만 먹고 이번에는 와인바를 가보자고 생각했다. 와인바 아는 곳 있냐고 물어봤지만, 모른다고 하길래 검색하니, ‘겐조 에스테이트 바’가 나왔다. 매니저에게 물어보니 일본인이 소유한 와이너리라며,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와이너리라고 했다. 오케이 다음 장소는 거기로.
이미 시간이 꽤 흘러서 새벽2시 쯤 되니, 길거리에는 사람이 더 적어졌다. 날이 추워서 가는 가게마다 손님이 적은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겐조바’는 모던 스타일의 꽤 큰 가게였다. 1층은 바 위주로 만들어져 있었고, 2층은 레스토랑(내가 갔던 시간에는 운영하지 않고 있었다. 바만 새벽까지 운영하는 듯.)으로 되어있었다. 메뉴판을 보니 테이스팅 셋트도 있고, ‘닷사이 스토어’의 와인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바텐더와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전체 라인업을 맛 볼 수 있는 테이스팅 셋트로 주문했는데, 꽤 맛있었다. 하지만 가격을 생각한다면, 음, 글쎄, 잘 모르겠다. 어차피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된 와인이 바다 건너서 일본으로 공급된 것이니, 일본인이 소유한 와이너리라고 해서 일본에서 싸게 판매할 이유는 없는게 맞기는 하다. 뭐, 제일 큰 문제는 내가 나파 밸리 와인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는 점이겠지.
와인 바를 나와서 숙소로 걷기 시작했다. 날씨는 더 추워져서, 여기가 번화가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길에 사람이 없었다. 길거리에 엄청 작은 동네 바 들이 몇개 보였는데, 딱 봐도 너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분위기라서 감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들어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런데 이게, 언어의 장벽이 사람을 물러나게 만들더라. 여행 끝나면 일본어를 제대로 배워볼까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페브리즈를 샀다. 일본은 아직 가게 안에서 흡연이 가능한 터라, 술집에 다녀오면 온 몸과 옷에 담배냄새가 배어버린다. 하지만 탈취제를 뿌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터라, 술집 투어를 하고 싶다면 그냥 1일 1옷을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 싶다. 한국 생각을 하고 옷을 많이 가져가지 않았는데, 아침마다 담배냄새가 빠지지 않은 옷 때문에 매우 괴로웠다. 자기 전에 뿌려두면 내일은 좀 낫겠지.
오늘도 적당히 11시쯤 일어났다. 속풀이엔 라멘이니, 오늘은 어제 먹었던 라멘집 바로 옆집(딱 붙어있다)의 매운라멘 집으로 갔다. 마라소스와 산초로 양념된 중화풍 라멘집이었다. 7단계의 매운 맛 중에서 선택해서 먹을 수 있었고, 마파덮밥도 팔고 있었는데, M과 나는 마파덮밥이 함께 나오는 셋트메뉴로 주문을 해봤다. 3단계(표준맛)로 먹었는데, 맛있었다! 정말 맛있게 매운 맛. 매운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엄청 좋아할 만한 맛이었다. 마파덮밥도 매우 맛있었고. 어제 먹은 집이 맑고 시원한 국물에 천사같은 맛이라면, 오늘의 가게는 맵고 자극적인 악마같은 맛이랄까. 어쩜 이렇게 정반대의 집이 벽 하나를 두고 딱 붙어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라멘을 먹고 와서 일단 낮잠을 좀 더 잤다. 밤에 놀려면 잘 쉬어 둬야지. 저녁이 가까워졌을 때, M과 함께 다이칸야마의 ‘츠타야 서점’으로 출발했다. 토쿄에 왔을 때부터 M이 꼭 가봐야 한다고 말하던 곳이었다. ‘츠타야 서점’은 한국으로 치자면 교보문고 같은 느낌의 서점 체인점인데, 도쿄 시내 여기저기에 지점이 많이 있다. 지하철을 타고 다이칸야마역에 내려서 걷다보니, 사진으로 보던 벚꽃 개천이 나왔다. 벚꽃 시즌이 되면 꽃놀이 배가 떠다니는 바로 그 개천이었다. 막상 개천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강보다는 작고 개천보다는 깊은 그런 느낌이랄까. 친한 후배가 도쿄로 출장왔을 때 너무 멋있다며 사진을 보내준 적이 있었는데, 직접 보니 분위기가 좋긴 했다. 물론 벚꽃시즌에 온다면 정말 멋있겠지.
M의 설명에 따르자면, 다이칸야마는 요즘 떠오르는 동네라고 한다. 한적한 동네였지만, 세련된 가게나 스튜디오들이 모이면서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게 된 동네라고 생각하면 될 듯.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기 때문일까? 얼추 15년전의 삼청동이 떠올랐다.
언덕을 한참 올라가다가 드디어 츠타야 서점에 도착. 직육면체의 2층 건물 3개가 옆으로 줄지어 놓여져 있었고, 그 3개의 건물은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츠타야 서점 다이칸야마 지점은 서로 이어져 있는 이 3개의 건물을 통으로 사용하는 곳인데, 애초에 지어진 건물을 다이칸야마가 한꺼번에 임대한 것인지, 다이칸야마에서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것인지 좀 궁금했다. 서점은 크지만 아담했고(말이 안되는 표현이지만, 가보면 이해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늑한 느낌을 줬다. 조명 톤도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1층에는 스타벅스가 있고, 2층에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레스토랑은 정말 분위기 최고였다. 내부 사진촬영 금지라서 사진찍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정도로. 레스토랑 중앙에 바(bar)가 있었는데, 진짜 책을 쌓아서 바 벽(기둥)을 만들어 놓았더라. 앉아서 잠시 분위기를 즐겨볼까 생각했지만, 저녁식사 시간 근처라서 그런지 웨이팅이 꽤 길었다. 빠른 포기.
어차피 일본어를 모르다 보니, 서적코너보다는 2층의 음반코너에 관심이 갔는데, 앰프(맥킨토시)와 스피커가 어마어마하더라. 그래 이거다 싶어서, 마침 음반 코너에서 추천하고 있는 앨범으로 3장을 샀다. 우리 가게에서 틀어도 상당히 잘 어울릴 것 같았다. 2장은 이 ‘다이칸야마 지점’에서 인기있는 재즈 뮤지션의 음반이었고, 1장은 이 ‘다이칸야마 지점’에서 인기있는 재즈 뮤지션들의 곡으로 구성한 편집 앨범이었다. 그래! 바로 이런 게 현지 기념품이지! (여행 이후에 가게로 돌아와서 이 음반들을 틀어보았고, 가게와 너무 잘 어울려서 요즘 계속 이 앨범을 틀고 있다.)
1층에 문구점이 있었는데, 만년필 매니아라면 눈이 돌아갈 만큼 멋있는 곳이었다. 한 쪽 벽면을 전부 만년필로 채워 놓았다. 고급 문구류들이 디피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눈에 띈 건 나무를 얇게 깍아 만든 책갈피. 가게 손님들에게 선물로 주면 딱이겠다 싶어서 4셋트(20개의 책갈피)를 집어들었다.(선착순으로 손님들에게 뿌렸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더 많이 사올걸.)
서점을 나와서 역 근처에서 와규스테이크 샌드위치 집에 갔다. 검색해서 간 건 아니고 그냥 걸어가다가 들어간 곳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가게였다. 두번째로 싼 샌드위치를 시켰는데 하나에 5,000엔. 와규 스테이크로 샌드위치라니 이런 사치가. M은 너무 맛있다며, 자주 올 수는 없겠지만 애들(M은 두 사내아이를 키우고 있다.) 데리고 오고 싶다고 했다. 진짜 맛은 있었지만, 이 돈을 내고 먹을 바에야, 어제 먹은 꼬치가게가 낫지 싶다. 이유는 하나다.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서. 그래도 먹고 나오니 엄청 든든하긴 하더라.
M은 여행 갔던 아내와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라서 먼저 집으로 가고, 나는 신주쿠로 출발했다. 마지막 밤은 신주쿠를 즐겨보자. 일본에 왔는데 사케바에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검색을 했고, 괜찮아 보이는 사케바로 들어갔다. 난 사케를 좋아한다. 정말 좋아한다. 한 때는 가게에서 사케를 팔기도 했었다. 안주가 없으면 사케가 팔리지 않는다는 한계 때문에 얼마 못 가 포기하긴 했지만. 하여간 그렇게 나는, 이번 여행 최고의 가게에 입장했다.
그 사케바 'Yata'는 신주쿠 어딘가의 사거리 10층에 있었다. 5-6평의 작은 공간에 나무로 된 인테리어였고, 의자가 하나도 없는 스탠딩 바였다. 작지만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 사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방향에는 창문 쪽으로 바가 붙어 있었고, 3-4명이 마실 수 있는 작은 바 테이블이 중앙에 2개가 있었다. 난 5-6명이 서서 마실 수 있는 가게 안쪽의 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도 영어 메뉴판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키자케시 코스’라며 2,000엔을 내면 1시간 동안 추천 사케를 맛 볼 수 있는 메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이런 횡재가! ‘기키자케시’는 사케 전문가를 부르는 용어이다. 와인에 ‘소믈리에’가 있다면, 사케에는 ‘기키자케시’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마도 여기 사장님이 기키자케시인 듯 싶었다. 메뉴판에는, 사케를 4가지 타입(2가지 요소를 축으로 하여 4분면으로 나누었다.)으로 나눠서 표현한 도표와, 일본의 지역 명칭, 맛에 대한 일본어와 영어 표현, 그리고 메뉴와 안주가 적혀 있었다. 메뉴판을 보다가 사장님에게, Sou-Shu, Kun-Shu, Jun-Shu, Juku-Shu 순서로 추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사케가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케를 따라 줄 때마다 냉장고에서 꺼내서 한 잔 씩 따라주셨는데, 사케 퀄러티 유지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듯 싶었다. 서빙이 끝난 사케병은 진공마개로 막아서 바로바로 냉장고에 넣으시더라. 도쿠베츠 준마이로 첫 잔을 딱 마시고 나니, 이거 안주없이 그냥 달리다간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안주 메뉴판을 봤다. 아쉽게도 안주는 영어 메뉴판이 없는 듯 했다. 오케이. 도와줘요 파파고! 메뉴판을 찍고 확인해보니 금방 번역이 되었다. 완벽한 번역은 아니지만, 무슨 뜻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구글번역앱으로 실험해 보니, 구글 번역앱이 메뉴판을 더 정확히 번역했다. 음성은 파파고, 문서는 구글이라더니, 괜히 그런 소리가 나온 게 아닌 듯.) 안주는 모두 500엔이었다. “오늘의 3종 모듬”을 시켰고, 일본식 멸치 절임, 소라 와사비 식초 절임, 크림치즈 카나페가 나왔다. 어차피 저녁은 먹었고, 짭짤하니 안주하기 딱 좋은 구성이었다. 이후로 그냥 신나게 마셨다. 거의 9잔? 10잔? 첫 가게부터 이렇게 마셔도 되나 싶었지만, 1시간의 제한 시간이 있으니, 신나게 달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장님(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포스는 분명 사장님이었다.)도 영어를 적당히 하시는 편이었고(이렇게 말하니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생존영어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도 사케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다 보니, 이것저것 물어보며 더 신나게 마실 수 있었다. 물론, 답답할 때는 파파고를 썼다. 하여간, 한국에서 온 일본어도 못 하는 손님이, 사케 관련 단어는 다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가게 사장님도 좀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츠캉 말하는거죠?”라는 나의 질문에 눈이 커지며 양손으로 엄지를 들어올리신 걸 보면 말이다. ‘니고리자케’와 막걸리가 비슷한 것 같다는 대화가 오고 가니, 정말 막걸리 같은 사케를 꺼내주시기도 했다. 덕질이 뭐 별거 있나. 이런게 덕질이지. 정말 추천해준 술은 하나도 안 빼 놓고 다 맛있었다. 한 시간이 후딱 흘러가고 가게에서 나오는데, 가게가 거의 만석이 되어 있었다. 의자가 없는 스탠딩 바이니 만석이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하여간 손님으로 꽉 찼다는 소리다. 인기있는 가게가 맞는 듯. 도쿄에 놀러갈 일이 있고, 사케를 좋아한다면 무조건 와봐야 할 가게가 아닐까 싶다.
사케바를 나와서 구글맵을 뒤져서 “Rit bar”로 갔다. 하지만 만석. 만석이라고 안내해준 직원에게 다른 바를 추천해 달라고 물어보니, “Rouge bar”를 추천해줬다. “Rouge bar”는 이름 그대로 내부가 붉은 빛 계열로 꾸며져 있었다. 적당한 무게감의 인테리어와, 적당한 어두움의 조명이 비추는 클래식 바였다. 혼자기도 했고, 자리가 애매해서 바 구석자리에 앉았는데, 내 담당인듯한 바텐더가 계속 신경써주고 말을 걸어줘서 마음이 편했다. 이번 여행에서 바를 다니면서 느낀건데, 말을 먼저 걸어주는 바가 마음이 편하더라. 사실 나는 먼저 말을 거는 스타일의 바텐더는 아니며(내가 바텐더가 맞는지는 논외로 하자), 가게 분위기도 혼자 쉬다 가거나 책을 읽거나 하기 좋은 분위기로 유지하고 있는터라, 대화는 익숙해진 단골들과 주로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손님으로 바 투어를 해보니, 말을 걸어주는 바가 마음이 편하다니. 나도 손님응대 스타일을 좀 바꿔봐야 하는걸까나. 첫잔으로 스파클링에 딸기를 넣은 칵테일을 마시고 두번째로 몽키 진토닉을 마셨다. 왜 한국엔 맛있는 토닉워터가 다양하게 들어오지 않는걸까. 바텐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본인의 이름이 ‘야마자키‘라며, 자신이 야마자키 45년산이라고 드립을 쳤다. 이 가게의 이 바텐더의 이름은 절대 못 잊을 듯. 나도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니, Rouge 사장님과 인사를 시켜줬다. 아니 뭐 소개받을만한 가게는 아닌데, 막상 갑자기 인사를 시키니 좀 민망했다. 마지막 잔으로 ‘야마자키’ 바텐더가 좋아하는 칵테일로 한 잔 달라고 하니, ‘뉴욕‘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만들어 줬다. 지금은 정확한 맛은 기억 안나지만 예쁘고 맛있었고, 왜 이름이 ‘뉴욕‘인지는 알 것만 같은 맛이었다. 다 마시고 난 뒤 다른 바 추천을 부탁하니, ‘Rit’를 이야기했으나, 영업시간이 짧아서 패스. 두번째로 추천해준 ‘keith’로 출발했다.
‘Keith’는 음악을 틀어놓지 않은 바라서 좀 조용했고, 나이가 약간 있으신 사장님 혼자 운영하는 원맨 바 였다. 추천 받아서 왔다고 말하고, 올드 위스키를 한잔 시켰다. 날 경계하는건지, 단골에 신경을 쓰는건지, 나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 바를 돌아다녔더니 확실히 깨닫게 된 점이 있다. 손님에게 말을 건다는 행위에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 곳에서 환영 받고 있습니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함으로써, 손님에게 안도감을 준달까. 내가 일본어를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 일수도 있지만, 처음 보는 손님에게는 별로 말을 걸지 않는 스타일로 영업해오던 나에게는, 고민해볼 만한 지점인 것 같다. 하여간, 조용히 가게를 둘러보다가, 이집 단골들이 자주 먹는 칵테일을 부탁했더니 진토닉을 추천해 주셨다. 라임 스퀴즈, 필링, 비터 한두 방울, 내가 본 중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진토닉이 만들어졌다. 맛있었다. 역시 손이 많이 가는 칵테일 치고 맛없는 것 없더라. 그래, 이렇게 맛있는 술을 판다면 좀 불친절해도 되지 뭐. 진토닉을 마시다가 갑자기, 온 몸의 세포들이 불타는 감각이 덮쳐왔다. 아이고, 사케바 때문인지 오늘은 알콜한계가 좀 일찍 온 듯 싶었다. 나는 왜 술이 센 편이 아닐까. 이럴 땐 좀 아쉽다.
계산을 하고(이 가게는 현찰만 받는다) 나와서 삐끼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공기가 차가워서인지 술 기운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런데 뭔가 예감이 불길했다. 뭐지 이 불안함은. 아. 택시기사가 졸고 있었다. 신호만 걸리면 꾸벅꾸벅. 녹색불 들어오면 신나게 달리고. 취한 와중에도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택시가 복불복인 것은 만국 공통인가보다. 다행히 숙소에 도착했고, 욕조에서 몸을 녹였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졸고있으니 세상 평화로웠다. 좋아. 인생 다음 목표가 생겼다. 욕조가 있는 집에 살고 싶어.
어느새 마지막 날. 눈 뜨자 마자, 어제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계속 생각나던 닭육수의 라멘을 먹으러 혼자 갔다. 처음엔 맑은 국물로 먹다가, 나중에 매운 양념을 풀어서 먹을 생각을 하면서, M이 주문했었던 매운 양념이 들어간 것으로 주문을 했다. 그런데 웬 걸. 맛이 다르다? 이게 뭐지? 이건 돈코츠 육수인데? 아 망했다. 이 집은 돈코츠 육수의 라멘과, 닭육수의 라멘을 둘 다 파는 집이었고, 며칠 전 우리는 서로 다른 라멘을 먹었던 것. 난 달걀을 먹고 싶어서 달걀이 들어간 라멘을 시켰는데, 마침 그것이 닭육수 라멘이었던 것이었다. 물론 돈코츠라멘도 맛은 있지만, 난 지금 맑은 국물로 해장을 하고 싶었다고! 내가 몰라서 잘못 주문한 것을 반품할 수도 없었기에, 슬퍼하며 돈코츠 라멘을 먹었다. 속풀이하기엔 너무 국물이 진해서 힘들었다. 절대 잊지 않겠다. 닭육수는 "중화소바". 닭육수는 "중화소바". 닭육수는 "중화소바".(한국에 가면 닭육수 라멘을 파는 집이 있는지 찾아 봐야겠다)
오랜만에 만난 K(M의 아내)와 좀 떠들다가, M도 오늘 미국으로 출장을 가는 터라, 함께 공항으로 출발했다. 긴자역에서 출발하는 1,000엔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창 밖으로 도쿄 디즈니랜드의 마법의 성이 보였다. 아주 잠깐, 낮에 관광을 다녀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보다는 그냥 날이 따뜻할 때 여행을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여행은 날씨가 너무 안 좋았다. 태어나서 처음 와본 도쿄에서 눈을 봤으니, 말 다했지. 어릴 땐 추워도 잘 돌아다녔었는데, 나이 좀 들었다고 이젠 추운 것이 너무 싫다. 앞으로는 어지간하면 겨울에는 멀리 여행가지 말자. 공항에서 M과 헤어져서 로비에 있는데,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마음이 허한건지, 위장이 허한건지 헛갈려하고 있었는데, 푸드코트에서 누군가 오므라이스를 들고 가는 것을 보고 나도 오므라이스와 생맥주를 시켰다. 일본 생맥주는 어디가서 시켜도 최고다. 어제의 과음은 과음이고, 난 여기서 마지막 생맥주를 마시고 가야겠다. 게다가 오므라이스도 나름 괜찮았다. 내가 기대한 딱 그 정도의 일본 오므라이스. 한국에서 주문했다면, 열에 아홉은 떡진 밥이 나왔을 것이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이륙을 했다. 이렇게 여행이 끝났다. 관광 따위 집어치우고 술만 퍼 마시다 가는 느낌이지만, 뭐 이런 것도 여행이라면 여행이니까. 술집 사장이 술집만 돌아다녔으니, 이건 선진지 견학이라고 봐야하나? 일종의 R&D? 하여간에, 신나게 탕진했으니 다시 열심히 일 해보자. 또 놀러 오려면 돈 벌어야 하니까. 기다려줘 중화소바! 내가 꼭 다시 먹으러 올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