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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추 May 15. 2020

우리 엄마는 아이돌보미입니다.

엄마의 일을 기록하다

  막내가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고, 집에는 엄마와 아빠 둘만 남게 된 뒤였다. 엄마는 아기 업고 다니는 꿈을 자주 꾼다고 했다. 꿈속에서 엄마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귀하게 업고 다녔다. 꿈을 꿀 때마다 아기가 바뀌었다. 엄마는 아기를 업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특히 학교에 가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애기를 업고 다니는 꿈은 근심이 많다는 뜻이라던데, 너희가 다 타지 생활하니까 내가 걱정이 많아서인가 보다.” 엄마는 그 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느 날, 엄마는 아이돌보미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면접까지 보고 최종 통과해서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엄마는 ‘교육’에 힘주어 말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인 만큼 자부심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한 달 뒤,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있지. 신기하게 말이야, 나 아이돌보미 하고 나서 이제 그 꿈 안 꾼다니까. 왜 있잖아, 그 아이 업고 다니는 꿈 말이야. 그게 아이 돌보라는 꿈이었나 봐.” 아이돌보미를 하고 진짜 아기를 업을 일이 생기자, 엄마의 꿈에는 더 이상 아기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때부터 돈 버는 일에 뛰어들었다. 중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 딸로 태어난 터라 부모님이 중학교에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직접 돈을 벌어서라도 중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친구와 함께 마을 장터 끝자리에서 달고나 장사를 했다. 연탄과 화로를 머리에 이고 장터까지 1시간 넘게 걸어서 다녔다. 엄마는 그때부터 키가 자라지 않았다고 했다. 달고나 장사로 번 돈은 몇 푼 되지 않았다. 엄마는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대신 남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베 짜는 공장, 옷 꼬리표 만드는 공장, 메리야스 제조 공장을 거쳐 골프 장갑 만드는 공장을 다닐 때쯤 중매로 아빠를 만났다.


  엄마는 결혼한 뒤에, 아빠를 도와 보일러 가게를 운영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돈이 더 필요했던 엄마는 틈틈이 연탄 장사를 했다. 아빠가 다른 일을 시작하면서 엄마는 따로 독립해 초등학교 앞에서 문구점 열었다. 초창기에는 장사가 잘 되어 식당도 함께 운영했다. 늦둥이로 막내가 태어나고 식당 문을 닫았다. 곧이어 문구점을 정리한 엄마는 결혼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로 사회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개인병원과 어린이집에서 조리원으로 일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조리원 일이 힘에 부치자 그만두었다. 지인의 소개로 한 집에서 가사도우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가사도우미 일을 나가던 집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자 엄마는 다시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 무렵 엄마의 눈에 띈 건 동네에 걸린 아이돌보미 모집한다는 큼지막한 현수막이었다.


  엄마는 햇수로 4년째 아이돌보미를 하고 있다. 엄마 친구들은 다들 본인 손주를 봐주느라 정신없는데, 엄마는 손주 뻘 되는 남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바쁘다. 엄마가 아직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고, 엄마 스스로도 애를 보는 일이 즐겁다고 했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애만 낳으면 다 키워주겠다는 엄마에게 내가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엄마에게는 맡기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었다. 황혼육아가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주변에서 익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손주 키우는 것도 힘들다고 난리인데, 남의 자식을 돌보는 건 더 힘들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나는 엄마에게 아이돌보미 일이 고되지는 않은지, 보수는 제대로 주는지 등등을 캐물었다. 시급은 최저임금을 겨우 따라가는 정도였고 다른 수당은 잘 붙지 않았는데, 정부에서 하는 사업이라고 시간을 내서 보수교육을 받아야 했다. 요구하는 건 많았지만 그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이렇게 돈을 조금 줘도 되는 거야? 해달라고 하는 건 많으면서 너무하네. 엄마, 그만둬."

  "그래도 이만한 일이 어딨니, 돈도 제 때 주지, 일도 그렇게 안 힘들어. 나 병원에서 일할 때는 너무 힘들어서 자궁 드러냈잖아." 

  

  나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엄마가 병원 식당에서 조리원으로 일할 때, 오랫동안 서서 일하다가 자궁이 내려앉아 수술을 받았단다. 엄마는 산재 처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자기 몸이 아팠다는 것만 탓했다. 나는 10년도 더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왜 몰랐던 걸까.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큰 수술을 받았는데 몰랐다는 건 그냥 엄마의 삶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다. 그제야 엄마의 굽은 등이 보였다. 엄마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등을 보며, 이제라도 엄마의 삶을, 엄마의 노동을 더 자세히 들여야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가 하고 있는 아이돌보미에 대해 알고 싶었다. 먼저 아이 돌봄 서비스 공식 홈페이지에서 들어갔다. 그곳에는 서비스 수혜자 입장에서 아이돌보미 서비스로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나열하고 있었다. 아이돌보미 서비스 제공자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대우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포털사이트에서 '아이돌보미'를 검색했다. 아동 학대를 저지른 아이돌보미에 대한 뉴스가 한가득이었다. 뒤를 이어 불안해서 아이돌보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겠냐는 양육자들의 한탄 어린 글들이 이어졌다. 


  아이돌보미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크게 두 가지였다. 아예 무관심하거나 도덕적 결함에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거나. 극히 일부의 나쁜 사례가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아이돌보미가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그런 사건을 제외하고는 아이돌보미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더 속상했다. 아이돌보미 서비스 자체는 정부에서 적극 홍보하는 사업이면서, 그 서비스 제공하는 아이돌보미는 꽁꽁 숨겨있었다. 아이돌보미를 알아볼수록 엄마가 하는 일이 그림자 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커졌다. 경력단절 여성, 중년 여성들이 떠맡게 되는 돌봄 노동이 그래 왔듯, 엄마의 아이돌보미 노동 또한 세련된 서비스 이미지만 세상을 떠다니고 있었다.   


  아이돌보미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당사자인 엄마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에게 아이돌보미 일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처음에 엄마는 “몰라, 그런 거 없어.”, “그런 거 생각 안 해봤는데.”라며 대답을 잘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그게 있지"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떼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엄마의 일 이야기를 나는 귀를 기울여 들었다. 그저 우리 가족 구성원 중 하나로 대했던 엄마가 사회에서 당당한 노동자로 일하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김훈 작가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힘을 내장하고 있지만, 그 힘은 '말하기'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만 현실 속에서 작동한다."라고 했다. 엄마의 이야기는 그 사실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은 많은 이들이 알아야 빛을 발할 수 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아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 노동자 박정의, 우리 엄마의 일에 대한 말하기다. 이 말하기를 통해 엄마의 노동이 현실 속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길 바라본다. 우리 엄마는 아이돌보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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