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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추 Jul 11. 2021

그건 느낌으로 알아요.

여덟 살의 말

 어느 날, 세희가 올록볼록한 무지개색 장난감을 가지고 왔다. 나는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팝잇이라고 했다. 팝잇은 대왕 뽁뽁이처럼 생겼다. 볼록 튀어나온 것을 누르면 쑥 들어간다. 뽁뽁이는 한 번 누르면 터져 버리는 반면, 팝잇은 뒤집어서 다시 쓸 수 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서너 명이 세희 자리로 모였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꾹꾹 눌러댔다. 다음 날에는 하민이와 수정이도 팝잇을 가지고 왔다. 쉬는 시간에 팝잇을 즐기는 어린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얘들아, 팝잇이 뭐가 그렇게 재밌어?”

 “그냥 누르면 기분이 좋잖아요.”


 나도 손가락으로 팝잇 한 알을 쿡 눌러보았다. 또다시 쿡. 별 감흥은 없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이걸 어떻게든 수업시간에 활용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이들이 손끝의 감각에 집중할 때, 나는 머리를 굴렸다. 100알짜리 팝잇을 사면 100까지의 수도 배우고, 수 감각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당장 기초학력 예산으로 팝잇을 주문 했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문장 쓰기와 덧셈과 뺄셈 문제로 나도 아이들도 교실 바닥에 흘러내릴 뻔한 날이었다. 5교시를 시작하려는데 다른 학년 학생이 심부름으로 택배 상자를 툭하고 교실에 밀어 두고 갔다. 아이들의 눈이 모두 택배 상자를 향했다.


 “공부하느라 힘들지? 그래서 선생님이 특별히 선물을 준비했어.”

 “와!!!!”


 상자를 열어 팝잇을 다 꺼내기도 전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표정에 변화가 없던 민지 마저 눈이 동그랗게 뜨고 손바닥을 연신 마주치며 기쁨을 표현했다. 어서 만지고 싶어서 꼼지락거리는 아이들의 손 위에 팝잇을 올려주었다. 아이들은 한여름에 콘 아이스크림을 받는 것 마냥 귀중하게 받들었다. 더위도, 머리도 식힐 겸 잠시 자유롭게 팝잇을 만지는 시간을 가졌다. 교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팝잇에 열중했다. 교실 앞에 서있던 나는 쭈뼛이 서서는 팝잇 알을 하나씩 눌러보았다. 내 포즈가 영 어색해 보였는지 진한이가 묻는다.


 “선생님, 팝잇 어디가 앞인지 알아요?”

 “글쎄, 여기도 앞뒤가 있어? 어디가 앞이야? 어디 쓰여있나?”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양쪽면이 판박이로 똑같다.


 “아니요. 그건 느낌으로 알아요.”


  선생님이 모른다는 사실에 신이 났는지, 여기저기서 가르침이 날아온다.  


 “눌렀을 때, 뽁하고 잘 들어가는 느낌이 있는 곳이 있어요. 거기가 앞이에요.”


 나는 손 끝에 더 집중해서 느껴본다. 비슷한가 싶었는데, 아니다. 확실히 ‘뽁’하고 더 잘 들어가는 방향이 있다.


 “아! 그렇다! 여기다!”

 “선생님, 찾았어요?”

 “응, 알겠어. 알려줘서 고마워.”


 진한이는 싱긋 웃어 보이고는 다시 팝잇으로 눈을 돌렸다.  


 열, 스물, 서른, 마흔, 쉰을 배울 때는 금방 까먹고 영 모르겠다는 눈치던 아이들이, 느낌으로 단번에 팝잇의 앞뒤를 알아차린다. 여덟 살, 느낌이 더 중요한 나이다. 1학년은 세상을 온몸으로 감각해야 한다는 아동발달론을 떠올리다가 목 뒤가 서늘해졌다. 과연 난 어린이들이 자신의 감각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가. 그러기는커녕 기초학력을 탄탄하게 만들겠다며, 한글을 계속 읽게 하고 덧셈 뺄셈 문제를 반복해서 풀게 했다. 말로는 삶을 사는 데에 국어, 수학보다 훨씬 중요한 게 많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내 말을 흘려 들었을 거다. 말보다는 선생님에게서 풍기는 느낌으로 알았을 거다. ‘치, 선생님도 공부 잘하는 거 좋아하면서.’


 어린이들이 세상에 단단하게 설 수 있게 몸부터 깨워주고 싶다던 마음들은 왜 이렇게 납작해져 버린 걸까. 뽁뽁뽁. 내 못난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팝잇을 꾹꾹 눌러댔다. 팝잇처럼, 내 교실도 다시 뒤집어서 시작하고 싶다. 볼록한 마음들을 다시 꺼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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