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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신쌤 Apr 27. 2024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최선은 최선인가

시험기간이다.

내게는 세 가지 지위에 따른 역할이 주어진다.

문제를 출제하는 역할, 시험을 앞둔 제자들을 지켜보는 역할, 시험을 앞둔 자식들을 지켜보는 역할.


내가 낸 문제로 학생들의 등급이 나뉘는 고등학교 교사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핏대를 올리며(관용어가 아니다. 가끔은 목에서 진짜 피맛이 나니까) 가르친 내새끼들이

내가 낸 문제를 모두 풀어내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응원할 수 있다.

(고등학교로 쉽게 옮겨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엄마로서의 마음은 더 힘들다.

큰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바로 눈 앞에서 등급 문이 닫히는 경험도 했고,

실수 하나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도 느껴보았다.

시험 전날 밤까지 고생하며 공부했는데 시험 당일 갑작스레 몸이 아파 시험을 보러가지 못하는 경험도 했다.

앓아 누운 아이를 재워놓고 출근을 하면서 차 안에서 엉엉 울었다.

아이가 아파서 이렇게 가슴이 아픈건지, 아이가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어 속상한 건지,

자식이 아픈데 등급을 걱정하고 있는 내가 한심한 건지,

온갖 복잡한 감정이 뭉뚱그려져 내 가슴을 쳐댔다.


그렇게 학교에 와서 시험을 앞둔 아이들에게 당연한 말을 한다.

"시험 공부 많이 했니?"

당연하게 모두가 입을 모아 대답한다.

"아~니오!"

이런 흔치 않은 단합력이라니.

"괜찮아. 아직 시간이 있잖아. 오늘부터 열심히 하면 돼. 시간은 충분하니까. 오늘 수업도 열심히 듣고."


열심히 해.

이 말을 할 때마다 유달리 내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린다.

딱히 다른 말을 찾을 수 없고, 또 의무적으로 해야 하기에 진심의 응원을 담아 말을 내보낸다.

하지만 이 말을 할 때면 성의를 담은 나의 영혼은 증발해버리고 바짝 말라붙은 말의 허울이 아이들 곁에서 힘없이 주저앉음을 느낀다.

그래서인가. 언제부턴가 내 자식에게도 제자에게도 이 말은 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 해.

그냥 선을 다하면 되지 무슨 최선까지.

나도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양심상 이런 말은 할 수가 없다.


나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을 밥먹듯 듣고 자란 세대이다.

가진 거라고는 공부 '좀' 하는 자식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나의 부모는 나의 성과만을 삶의 희망으로 여겼다.

그다지 착한 자식이 아니었던 나는 그게 못견디게 답답하고 싫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그 분들에게 즐거움을 내어드렸다.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게 없었다.

공부를 좀 할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내겐 역시 공부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하는 성품을 타고나지 않았음에도 열심히 할수밖에 없었다.


살기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젖먹던 힘까지 짜내야 했던 나의 윗세대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그 분들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열심히 하면 뭔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이 당연한 '선'이며 언젠가는 그 대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어느 정도는 맞았다.


내가 키우고 있는 새로운 세대는 여유로운 세상에서 태어났다.

물론 개인별로 환경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절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게다가 나의 세대, 나보다 젊은 세대는 윗세대보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 청소년들의 자살률은 세계 1위이며 현장에서 보는 아이들의 정신 건강도 위험 수준이다.

문제는 해가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이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기성세대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요즘 애들은 힘든 걸 참을 줄을 몰라. 끈기가 없어.

요즘 애들은...

4천년 전 수메르인들의 쐐기문자에도 '요즘 젊은 것들'에 대한 쯧쯧의 기록이 있다니

세대 간 갈등이 동서고금의 보편적 정서임은 맞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성세대는 저 말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기성세대는 요즘 세대가 참아야 할 일이 없도록 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런 질문도 떠올려본다.

힘들고 싫은 일을 참고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이 선인가.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은 혹은 옳은 일인가.


새로운 세대를 풍요의 세계에서 키우면서 예전의 '잘 살아보세' 세계관을 가지라고,

힘들고 싫어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치면 그게 될 일인가.

2024년도의 학교는 내가 다닌 20세기의 학교와 똑같다.

아, 내가 20세기에는 하지 않았던 잡다한 수행평가가 추가된 것이 다르긴 하다.

똑같이 중학생 45분, 고등학생 50분 수업을 하고 6,7교시 수업을 한다.

세상은 과거보다 더 풍요로워진 거 같은데 살떨리는 경쟁은 더 심해진 것 같다.

의대, 인서울 4년제 등 최소한(?)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낙오된다는 불안감은 더 강렬하다.

그 최소한의 울타리는 또 얼마나 높고 험준한지, 내가 옆의 친구를 밟고 올라타야 들어갈 수 있다.

뭐지? 우리나라의 총생산은 분명히, 확실히 예전보다 더 높아졌는데 왜 우리 마음은 더 가난한 거지?

왜 아이들은 패배주의에 빠지고 마는 거지?


아침잠이 많은 아이가 아침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떠지지 않는 눈을 올려붙이는 모습이 가슴 짠하다.

6교시, 7교시에 졸지 않으려고 꾸벅 거리는 모습에 마음 아프다.

시험지를 눈앞에 두고 긴장된 모습으로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면 가끔 눈물이 난다.

사회에 나가면 또 고생길일텐데 짠하고 짠해서 나는 항상 눈과 입이 마르고 목이 마르다.

다같이 달리고 달려야 하는 시스템이 화가 나지만 공허한 외침이다.

누군가는 내게 말한다. 당신이 너무 감정적이고 온정적이라고.

그렇지만 가까이서 다음 세대를 지켜보는 마음은 이렇다.

왜 윗세대가 애쓰고 노력한 열매가 다음 세대의 삶의 행복으로 이어질 수 없는 걸까.

언제까지 참고 노력하라고, 원래 사는 건 힘든 거라고 말해야 할까.


태어날 때부터 풍요와 편안함을 입에 물고 나온 지금 아이들이 고통을 참고 견디는 건 전 세대가 겪었던 인내보다 몇 배는 힘들다.

아이들의 정신은 피폐해지고 병들어간다.

결국 견디지 못하는 아이들은 놓아버리고 만다.

근근히 참고 견디며 어른이 된 젊은 세대는 그래서 출산을 포기한다.

여기서 더 할 수는 없어. 그리고 내 자식도 이렇게 살게 할 수는 없어.


나는 우리 사회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훌륭한 것이라는 신화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능력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열심히 하는 것도 타고난 능력이 크다고 본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향해 달리기보다는 나의 내면이 원하는 것을 찾을 기회와 시간을 있는 성숙한 사회에서 내 자식과 제자들이 살았으면 좋겠다.

꽉 짜여진 시간표에, 외부에서 주어진 틀에 나를 억지로 쑤셔넣기보다는

나의 모양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여유있고 말랑말랑한 교육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풍요와 부를 가지기 위해 상대를 밟으며 올라가야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여유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기성세대가 그토록 기진맥진하며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닐까.

기성세대가 진정한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음 세상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기준에 맞추어 아이들에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달리라고 말하는 걸 멈추면 안될까.


출산율이 문제라고 난리를 치지만 지금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정책 입안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도 이 사회는 젊은이들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그저 사회를 위한 부품 정도로 생각한다.

사람을 귀하게 보지 않는 세상에서 청소년의 마음의 병은 낫지 않을 것이고,

청년들은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똑똑하다.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제 최선은 최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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