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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Feb 06. 2024

단상 - “목격자”

<추락의 해부>(2023)


 

<추락의 해부(Anatomie d’une chute)>(2023, 쥐스틴 트리에)

 

* 작품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겹쳤던 것은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6)나 BBC 시리즈 <크리미널 저스티스> 류 사법제도 고발 픽션이었다. 초반에 뱅상이 짚었듯, ‘산드라가 남편을 죽였는가 아닌가’는 재판의 초점이 아니다. 정황증거만 있는 형사사건을 파악하는 과정은 꼭 ‘그럴듯한 플롯’을 짜는 과정 같다. 검사의 전략은 배심원단이 ‘산드라가 남편을 죽일 만한 사람’이라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성 지향성, 소설에 적은 문장, 인터뷰에서 했던 말… 무엇이든 ‘유죄’의 신호가 될 수 있다. 변호인단의 전략은 ‘사무엘이 자살을 할 만한 상태’였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산드라가 범인으로 지목되지 않으려면,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설득해야 한다. 결과가 어떻든, 이미 죽음을 겪은 가족의 상처와 분열을 전제하는 ‘게임’이다.


이어 적으면, 시스템이 무고한 개인을 파괴하는 방식을 고발하는 데에 초점을 둔 작품들과 <추락의 해부>는 다르다. 어떤 면에서는 <결혼 이야기>(2019) 류 가족 해체 드라마에 가깝다. 검사와 변호인단이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를 고르듯 영화는 인물과 관계를 묘사하며 배제할 것과 포함할 것을 골라낸다. 오프닝, 산드라와 사무엘이 각자 혹은 함께 찍은 사진들이 화면에 떠오른다. 삶의 순간을 포착한 그 장면들 사이에는 수많은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날은 맑고 어떤 날은 흐렸겠지만, 그 모든 날들을 종합한다면 결국 맑았나, 흐렸나? 흐렸다면 먹구름은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나? 그 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영화는 산드라의 입을 빌려 암시한다. 재판에서 드러나는 바는 “아주 작은 부분”(산드라), 작품은 이를 강조하면서도 선뜻 ‘다른 조각들’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다양한 하루들을 전지적으로 그리는 대신, 아예 비워두기를 택한다.



산드라를 자주 클로즈업함에도, 영화는 그의 유무죄 또한 끝까지 특정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 있는 그대로 말해. 그래도 내겐 해가 되지 않을 거야.”(기억에서 끌어왔으므로 정확한 대사는 아니다): 그 씬과 함께 나는 관객으로서 일단 산드라를 ‘믿으며’ 이야기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으나, 검사의 심문 태도와 판사의 방관에 대한 부동의와는 별개로- 점점 더 모르게 되었다. 그건 다니엘이 ‘점점 모르게 되는’ 상태를 겪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산드라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그가 무죄 판결을 받아 다행,이라고 여겼던 까닭은, 다니엘이 그를 믿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집요한 해부의 늪에 빠진 관객이 붙잡을 지푸라기다.


<추락의 해부>를 하나의 방식으로 요약하면, ‘다니엘이 무엇을 믿을지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면 영화가 취하는 ‘시선’은 자주 다니엘의 것이었다. 카메라는 종종 인물 바로 근처의 공기를 떠돈다. 직접적으로 담는 것은 시각정보이나, 소리의 파동과 상호 접촉의 온도, 그로 인한 정서 변화까지를 전하려는 듯한 움직임으로 느껴졌다. 주로 시각에 의존하는 이들에게 다니엘의 감각을 전하고자 했던 걸까.



다니엘은 ‘진술이 처음과 다르다’며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몰아세워졌다. 재판을 방청하는 와중 엄마가 아빠를 죽이거나 아빠가 자살하는 장면을,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고 물건을 던지는 부모를 상상한다. 영화는 다니엘의 상상을 화면에 드리우고, 피고인석에 있는 산드라를 그의 ‘시선’으로 담기도 한다. 변화하는 모자의 심리와 상호 관계를 포착하려 애쓴다. 아빠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채로, 다니엘은 엄마의 살인 가능성과 아빠의 자살 가능성을 “이해”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다니엘이 기억해낸 것이 사무엘의 ‘신호’가 아니었다면, 그가 다른 방향의 증언을 했다면, 재판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산드라가 말을 설득력 있게 하는 법을 몰랐다면, 다니엘이 그처럼 영리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재판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무죄 판결을 받은 날 밤, 산드라와 다니엘은 서로를 다시 만나기 두려웠음을 고백한다. 그것을 삼키지 않고 입 밖으로 꺼내는 제스처가 회복의 첫걸음이리라 위안 삼아도,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감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돌이키면, <추락의 해부>를 타 작품과 차별하는 핵심은 다니엘의 존재였다. 방청을 그만두라는 판사의 요청에 그는, ‘이미 상처는 받았으니, 끝을 보고 극복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그 놀라운 주체성에 감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이답게’ 뛰어놀아야 할 다니엘은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워져 버렸다. 그는 성인(adult)조차 넘어 마치 성인(saint)처럼 그려진다. 고작 열한살인 다니엘이 받았을 트라우마를 영화가 과연 충분히 보여주었는가,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단처럼 사용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복잡한 상처를 전시하기보단 피아노 연주와 같은 그 자신의 언어로 묘사하기를 택한 것이리라 결론지었다. “어떻게를 알 수 없다면 (전문가들조차 의견이 갈리는데) 왜를 살펴야죠.” 판사를(카메라를) 향해 곧게 꽂히는 다니엘의 대사에, 통쾌함과 그 통쾌함에 대한 죄책감이 동시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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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목격자이지만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 다니엘을 소개하는 팸플릿의 문구다. ‘목격자이지만’ 이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하다. 그는 시체를 처음 감지한 사람이나, 아빠가 죽은 이후 현장에 도착했다. 눈이 보였다 해도 숨이 끊어진 몸만을 목격했을 것이다. ‘만’은 불필요한 보조사다. 다니엘이 가진 ‘장애’가 일상을 보내거나 사건을 증언하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된다는 언급은 영화에 딱히 없다. 오히려 그의 발달한 청각기억은 중요한 정황증거의 실마리가 된다. 물론 시각을 가진 관객은 화면을 통해 수사와 재판 과정을 볼 수 있지만, 그렇다 하여 다니엘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별로 그렇지 않다. ‘목격자’, ‘시선’- 우리가 쓰는 언어가 나타내듯 대부분의 사회는 비장애인을 ‘기본값’으로 설정한다. 눈이 보이지 않거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이들을 오로지 ‘신체의 결핍’으로 특징짓곤 한다. 당연한 소리로 읽힐지도 모르겠으나, 정말로 결핍된 것은 누군가를 배제하며 구성된 세상이다. 작품은 (역시) 산드라의 입을 빌려 이를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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