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후>(2025)
<28년 후(28 Years Later)>(2025, 대니 보일)에 관한 두 종류의 짧은 글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글1: 리뷰]
<28년 후>, 살아남는 것을 넘어 죽음을 기릴 수 있는 세계로
감염병의 확산으로 인해 28년 째 고립돼 있는 영국, 스파이크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열두 살 소년이다.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아빠 제이미는 아들을 자신과 같은 강한 전사로 기르려 한다. 아파서 종일 침대에 누워 지내는 엄마 아일라는 자주 기억에 혼란을 느끼고 큰 감정 기복을 보이며 두통을 호소하곤 한다. 이들의 집은 영국 본토와 동떨어져 있는 섬에 있다. 언뜻 감염을 성공적으로 차단하고 꽤나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보이는 마을이지만, 수장 하나만 여성일 뿐 이곳은 철저히 전통적 가부장제에 기반한 성역할을 따르는 곳이다. 지나가듯 묘사되는 교육 커리큘럼마저 그 시스템의 유지를 목적으로 구성된 듯하다. 본토로 출정해 감염자들을 ‘사냥’하고 때로 물건과 ‘무용담’을 반입해오는 제이미는 그들의 영웅이자 광대다. 필요에 의해 분담된 역할의 수행은 암묵적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극의 일환으로도 보인다. 아내를 돌보고 아들을 키우느라 지친 제이미는 ‘시체 썩는 냄새’에 안정감을 느끼고 도피성 외도를 일삼는다. 감염자들을 죽이는 일은 그에게 있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강도의 긴장을 지속적으로 유발하는 이 행위에 의한 ‘해소’는 일시적인 것일 뿐, 스트레스는 계속해서 쌓이고 압축된다. 그가 감염자를 해한 후 내뱉는 과장된 웃음과 환호성, 아들을 자랑하는 욕 섞인 스토리텔링은 일종의 발작처럼 들린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생존 방식을 고스란히 아들에게 물려주려 한다는 것이다. 이미 스스로 영웅일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그는 아들을 티없이 고결한 영웅으로 만듦으로써 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듯하다. 허나 이 삶은 감염자들을 적극적으로 살해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하며 꾸려나가는 종류의 것이므로, ‘티없이 고결한 영웅’은 완성될 수 없고 애초에 성립하지도 않는 표현이다.
아빠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왔던 스파이크는 제이미와 실제로 원정을 다녀온 후 모든 것이 거짓말 같다는 감각을 느낀다. 외도 장면의 목격이 촉매가 되어, 그는 엄마의 손을 잡고 모두 쉬쉬했던 닥터 켈슨을 만나기 위해 다시 본토로 향한다. 이 두 번째 여정은 조금 다르다. 죽이기 위한 여정이 아닌 살리기 위한 여정, 여기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살생을 한 후 반사적으로 터트리는 웃음이 아닌 사소한 장난을 주고받으며 새어나오는 웃음이 있다. 하지만 그 끝에는 다시 죽음이 있다. 이번엔 스파이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들)이다. 정찰선의 난파로 섬에 불시착한 스웨덴 군인 에리크는 아일라와 스파이크 모자를 구해주지만 결국 초인적 힘을 지닌 감염자 ‘알파’에게 죽는다. 스파이크가 살리고자 했던 아일라는 닥터 켈슨에게 암 진단을 받고 존엄사를 택한다. 과거 생자를 살리는 의사였던 켈슨의 현재 주업은 사자를 기리는 일. 그가 건축한 물리적 ‘메멘토 모리’ 꼭대기에 엄마의 두개골을 올려놓는 장면으로, 스파이크의 두 번째, 아니 첫 번째 여정에는 종지부가 찍힌다. 끝은 또다른 시작이다. 오프닝에 등장했던 어린 지미가 그로부터 28년 후인 엔딩에서 컬트 리더의 행색을 하고 스파이크와 조우한다. <28년 후>는 살아남는 것을 넘어 죽음을 기릴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후, 속편에서 이어질 새로운 힘의 역학을 예고하며 마무리된다.
[글2: 의문]
<28년 후>는 어디를 바라보는가
<28년 후>는 목사의 아들 지미가 <28일 후>(2003) 시기 겪은 끔찍한 사건에서 출발한다. 눈앞에서 또래들과 어른들, 엄마가 감염자들에게 물리는 광경을 보고 예배당으로 달려가지만, 아빠는 이를 ‘심판’이라 칭하며 감염자들의 집단 공격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탈출한 지미는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시점, 영화의 엔딩에서 스파이크와 조우하며 재등장한다. 역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텔레토비에서 영감을 받은) 컬트로 추정되는 집단을 거느린 채다. <28일 후>에는 주인공 짐이 성당에 들어가 감염된 신부를 마주치는 장면이 있었다. 이때의 종교가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아무런 힘도 의지도 되지 못하는 무력한 것이었다면, <28년 후>의 ‘종교’는 오염되고 변질된, 거대한 패닉에서 비롯한 집단적 광기로 그려질 예정인 것일까. 헌데 여전히 종교에 회의를 표하는 <28년 후>가, ‘신의 영역’처럼 다루는 무언가가 있다.
<28일 후>에서 대니 보일과 알렉스 가랜드는 강제적 재생산을 국지적 좀비 아포칼립스의 희망으로 ‘채택’한 군인들을 가차없이 응징한 바 있었다. 감염된 신부를 반사적으로 공격하고 ‘그래선 안 됐는데’라고 괴로워했던 짐은,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괴물화’를 감수한다.(구출 과정에서 짐은 ‘실험용’으로 사슬에 묶여 있던 흑인 군인 감염자를 풀어준다. 셀리나와 해나는 각기 다른 까닭으로 짐을 감염자로 오해한다.) 어떤 시스템의 보호 하에서 누군가는 더 위험해지는 아이러니. 수장만 여성일 뿐 전통적인 성역할을 철저히 따르는 듯 보이는 고립된 섬에서 아일라와 스파이크 모자가 빠져나오게 만드는 <28년 후>는, 언뜻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후 이상한 장면이 있다. 뭔갈 감지한 아일라가 버스 안으로 들어가면, 임신한 감염자가 폐열차 안에서 출산하느라 끙끙 앓고 있다. 아일라는 두려워하지 않고 돕기 위해 그와 손바닥을 맞댄다. 감염자의 ‘좀비성’은 보류되고 ‘모성’이 발현돼 아이가 순조롭게(그리고 웅장하게) 태어난다. 에리크와 스파이크는 그 광경을 경악+감탄하며 지켜본다. 탯줄을 자르자마자 감염자는 아일라에게 달려들고, 에리크는 총을 발사한다. 놀랍게도 갓 태어난 여자아이는 감염되지 않은 상태다. 패닉해 신생아를 죽이려 하던 에리크는 바로 ‘알파’에게 공격당해 머리가 뽑힌다. 이 에피소드는 무얼 암시하는 걸까, 모성과 재생산 ‘본능’은 공포도 이겨내고, 감염 상태마저 일시정지시키며 전염도 막아낸다는 것? 생명의 탄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28일 후>의 문제의식을 뒤집고 실제 아닌 신비의 영역에 있는 모성, 재생산, 자연출산에 희망을 드리우는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가며 <28년 후>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생아를 구한 아일라는 닥터 켈슨에게 비공식적으로 암 진단을 받자마자 존엄사를 택한다. 즉석에서 화장이 이루어져 그의 두개골은 아들 스파이크의 손으로 전해진다. 스파이크는 그것을 물리적 메멘토 모리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이 지나치게 매끄러운 전개는 필멸성을 긍정하기보단 긍정할 것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부터 앞서 언급한 기이한 ‘탄생’ 사건과 맞물려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태어났기에 죽을 수 있었던, 아니 그보단 ‘죽기 위해선 태어나야만 했던’ 것이랄까. <28일 후>는 재생산으로 종을 보존할 수 있다는 집단의 희망이 개개인에 대한 폭력과 결합돼 있다면 그 희망은 절망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28년 후>의 첫 번째 이야기에 담긴 관점은 이와 미묘하게 충돌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생물학적 재생산에 희망을 걸 수 있다면, 개별 인간의 필멸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설령 이를 ‘섬Isle의 옛 역사를 놓아주고 거기서 출발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타포[참고: ScreenRant]로 읽더라도, <멘>(2022)에서 과감히 출산의 재현을 유해한 남성성의 재생산 매커니즘을 은유하는 데 사용한 바 있었던 가랜드가 여성의 몸을 land에 대입하는 서사를 썼다는 데에 의아함이 느껴지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열차 씬에서 짚어 볼 부분이 하나 더 있었는데, ‘알파’가 마치 슬퍼하거나 분노하듯 죽은 감염자 여성 앞에 잠시 서 있었다는 점이다. 이 찰나를 통해 감염자들이 ‘특정한 폭력성을 수반하는 질병이 자아를 뒤덮은 인간’을 넘어, 별개의 생물 종으로 군집화되었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을까? 또한 태어난 아이가 비감염자라는 설정에서는, 감염을 차단하는 대신 되려 감염과 닿아 있음으로써 면역이 된 인류의 출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짐작들도 앞에서 던진 의문을 딱히 해소해주진 않지만, 이어질 속편이 있으니 판단을 보류하고 지켜봐야 할 테다.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에 의심을 풀어놓았으나… 알렉스 가랜드가 딱 이만큼에서 끝나는 세계를 만들진 않았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