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불태워>,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너는 나를 불태워(Tú Me Abrasas)>(2024, 마티아스 피녜이로)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2024, 조희영)
8월 말 <씨네21>에 쓴 비평의 조금 더 긴, 풍부하다기보단 구구절절한 버전의 글. 같은 날 탈고했다.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08252
* 작품들의 장면 포함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의 <너는 나를 불태워>는 일단 극영화다.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와 신화 속 님프 브리토마르티스의 대화로 이루어진 체사레 파베세의 <바다 거품(파도 거품)>의 각색. 하지만 해당 작품이 수록된 희곡집 <레우코와의 대화>에 기반한 타 영화들과 나란히 놓기 힘들며, 피녜이로의 전작들과도 구분되는 독자적인 모양을 띤다. 원작의 대화가 영화 전체에 걸쳐 띄엄띄엄 재생되는 가운데 여러 인용과 서술이 끼어든다. 시구가 인쇄된 페이지, 펜 그림, 배우가 있거나 없는 풍경 따위 이미지들이 나뉘고 섞이고 겹친다. 요소를 전부 분리해 재구성하려는 듯한 연출의 초점은 파편들의 연결에 있어 보인다. 조희영 감독의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역시 분리 후 재구성이 발견되는 영화인데, 이 경우 파편화되는 것은 서사이며 그 조각은 인물이 현존하거나 기억하는 시공간의 덩어리들이다. 현장에서 감각되지 않는 것은 해석이 불가한 것으로 남고, 가시화된 균열은 메워지지 않는다. 다소 거친 비교에 이토록 다른 두 영화의 유사성을 짚어내 범주화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 글쓰기는 양쪽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너는 나를 불태워>
: 조각냄으로써 잇다
<바다 거품>은 각자의 이야기에서 끝을 맞이한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를 허구의 대화로 불러낸다. 기존 이야기 내부를 바꾸거나 새로운 사건을 덧붙이는 되살리기가 아닌 되새기기, 일종의 유령화를 통한 재해석이다. 여기서의 ‘유령화’는 비가시화(되었다)가 아닌, 서사가 완결된 인물들을 현실의 시공간과 동떨어진 영역에 소환하는 행위를 뜻한다. 시간과 사건의 전개 없이 오가는 생각과 감정의 전개로 이어지는 재해석의 텍스트.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은 <너는 나를 불태워>가 죽은 자들의 만남을 다루므로 ‘유령 영화’라고 했다.(<Film Comment> 2025.03.17) 한편으로 이 영화는 유령을 닮은 원작의 속성을 변형해 공유한다. 파베세가 사포를 유령으로 소환해 대화를 창작했다면 <너는 나를 불태워>는 그 목소리를 극에서 꺼내 경계를 넘나 들게 한다.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피녜이로는 ‘해변 씬의 파도는 스페인에서, 절벽은 아르헨티나에서, 반대편의 그림자는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촬영했다’고 전한다. 방점은 쪼개기보다는 ‘잇기’에 찍힌다. 최근 다른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 “영화는 유령처럼 그들과 공명해야 했다”(<씨네21> 1521호)의 의미가 이와 통할지는 모르겠으나- 영화 속 유령들의 대화는 가상의 영역에 정체하기보다는 실제의 ‘장소들’을 부유하는 듯 느껴진다. 그 장소에는 여러 로케이션, 책 페이지, 핸드폰 화면, 내레이터의 기억까지 포함된다. 부유하는 목소리들은 그 이미지들을 잇거나 재의미화하며 허구와 현실 간 구분을 흐린다.
허구의 인물인 감독/내레이터는 자주 카메라 뒤에 있다. 현실에서 피녜이로와 꾸준히 작업해 온 두 배우 가비(가브리엘라) 사이돈과 마리아 비샤르가 각각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 역을 맡아 대사를 읊지만, 카메라 앞에 선 그들은 역할이 아닌 배우 자신들처럼 보인다. 두 배우가 핸드폰에 저장된 상대방의 이름을 역할명으로 수정하며 시작되는 대화는 주어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행위보단 목소리를 빌려주는 행위에 가깝게 보인다. 사이돈이 음악 장비를 만지는 모습에 사포의 대사가 오버랩되면, 그 음성이 사포의 것인지 사이돈의 것인지도 불분명해진다. 비샤르가 같은 공간에서 브리토마르티스의 대사를 말하는 숏이 뒤따르며 모호함을 더한다. 여기에도 비치듯, 또한 구분되지 않는 것은 읽기(번역, 해석)와 쓰기(창작)이며, 창작의 과정과 결과다. 사포의 시구 “너는 나를 불태워”의 어절과 “내겐 꿀도 벌도 아닌”의 음절이 이미지의 나열로 치환되는 시퀀스들을 떠올려보자, 각 이미지는 영화의 다른 위치로 연결된다. 이를테면 ‘나를me’에 대응되는, 공동현관 호출 컷은 (아마도 전 연인의 집 앞에 선) 내레이터의 장면에서 추출됐다. 그런가하면 ‘불태워abrasas’에 대응되는, 개수대에서 물이 흐르는 컷의 경우 두 배우가 물을 틀고 바라보는 장면에서 행한 촬영의 결과물로 보인다. 전자에서는 극중 개인의 사연이, 후자에서는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이 읽힌다. 이는 개인의 정서와 관점을 반영해 시를 기꺼이 ‘틀리게’ 번역하는 예시이자, 그 프로세스 자체가 결괏값에 드러나는 영상-시다. 사포의 시가 여러 버전으로 번역된 페이지들, 원제 문장이 다른 표현의 손글씨로 쓰이는 엔딩과 같이,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영화는 지속적으로 ‘여지가 있는’ 번역들을 삽입한다. 약속된 언어 간 이루어지는 번역임에도 시는 조금씩 달라진다. 화면에 파도 거품이 잡히는 동안 죽음에 관한 대화가 들릴 때와 박테리아에 관한 내레이션에 파도 거품이 이어질 때 관객이 연상하는 바는 다를 테다. 이미지에 머무는 언어, 언어가 도달하는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따라 감각은 변한다. <너는 나를 불태워>에서 이 텍스트/사운드/이미지들의 결합은 일방향의 길을 내거나 명쾌한 결론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관객 혹은 독자가 되풀이해 경험하거나 사유할 때마다 다른 지점에 도착할 것이다.
영화는 초반 파베세의 죽음과 사포의 죽음에 관한 문장을 각각 인용하고, 후반에 그 내용을 뒤집는 서술을 넣는다. 이 각주를 영화 말미로 유예하는 선택은 사포와 파베세가 해석에 묶이지 않는 존재들이라는 점과 더불어 해석과 창작이 연쇄됨을 강조하려는 제스처가 아닐까. 사포가 시를 썼고, 헬레니즘 작가들이 사포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지어냈다. 그 전설을 바탕으로 파베세가 <바다 거품>을 썼고, 이후 <파베세의 마지막 여름>을 비롯해 작가 파베세에 관한 해석들이 쓰였다. 그리고 다양한 질감의 ‘읽기’와 각주들이 얽힌 <너는 나를 불태워>가 있다. 인쇄면을 깨끗하게 보존하기보단 색색의 밑줄과 메모를 허용하고 생각과 감정이 ‘산만하게’ 뻗도록 풀어두는 독서. 영화는 해석-창작의 비선형적이고 느슨한 계보를 그리는 문학 읽기를 시도한다. 스스로도 다양한 독해가 가능한 시가 되며, 이 읽기-쓰기의 흐름을 관객(독자)에게 건네며 마무리된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 조각난 것을 바라보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도 영화 말미로 유예된 정보가 있다. 유정의 전 연인, 동명이인 정호의 얼굴. <바다 거품>의 한 대목에서 파베세는 사포의 목소리를 빌려 헬레네의 삶을 묘사한다. 묘사를 마친 후에야 이름을 공개함으로써 독자가 이름에 드리워진 선입견 없이 재해석을 접하게 한다. 정호의 얼굴을 뒤늦게 공개하는 행위는 파베세가 택한 방법과 역방향으로 흐르는 ‘낯설게 하기’다.(모른다고 여겼던 것에서 낯익은 것으로 / 안다고 여겼던 것에서 낯선 것으로.) 생소한 얼굴의 정호는 수진과 인주가 알던 정호와 구별되고, 짐작되고 해석됐던 존재에서 실물의 인간으로 나타난다. 그로 인해 수진과 인주가 알던 정호에 대한 상이 달라지는가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누구도 이 정호를 모른다는 것이 재확인될 뿐이다. 오프닝에는 작업실로 들어가는 정호가 있다. 무표정이 화면을 스치고, 카메라는 천천히 수평회전해 빈 액자 둘에 반사된 정호의 실루엣을 차례로 지나 창가에 선 뒷모습에서 멎는다. 정호는 허상이거나 표정이 안 보이는 자다. 그의 부재가 유독 서늘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캔버스에서 그림을 뜯어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서다. 현장에서 보았다고 판단한 것마저 모를 것이 되는 영화, 작품과 기록이 부재하는 예술가는 해석의 시도부터 불가능한 자가 된다.
영화는 장면들을 쪼개 순서를 섞어 재배치한다. 전반부에서 인물들이 겪는 사건을 나열하고, 거기서 잘라냈던 시공간들을 후반부에 붙인다. 단순히 변주-반복되거나 대칭을 이루는 구성은 아니다. 서로 대화하던 인물들을 복기해 다음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고, 수화기 반대편 등 가려져 있던 곳을 조명하거나 회상을 삽입하기도 한다. 훈성과 함께 밤을 보내는 수진의 장면 사이와 깨진 그림을 응시하는 인주 뒤에 배치된 정호에 관한 기억들, 거기 비친 것은 정호가 아닌 수진과 인주다. 전반부에서 완성된 듯했던 지도는 후반부에서 미로로 바뀐다. 어쩌면 이미 있었던 균열의 가시화다. 영화는 그러나 각자의 진실이 다름을 설파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보단 쪼개진 형태를 응시하려 한다. 미로는 풀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도착지에는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깨달음만이 있다. 영화는 ‘아무도 모르지’라는 진실을 설득해나가며, 인물들이 무지를 인지하는 순간에 주의를 기울인다. “너는 내가 오늘 커피 마셔서 울렁거렸던 걸로 기억하겠네?”라는 유정의 대사가 짚는- 대상과 관련된 현상의 의미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대상의 속성으로 간주하는 단정의 행위. 그것을 경계하는 은유나 스토리텔링들 역시 꾸준히 언급된다. 이를테면 인주가 작업중인 그림은 온색 조명 아래 측면에서 먼저 촬영되었다가, 나갔던 인주가 놓고 간 물건을 가지러 돌아오며 형광등 아래 정면에서 다시 보여진다. 공원에서 인주와 다투었던 무례한 남자는 수진이 방문한 시곗방에서 예의바른 주인장으로 재등장한다. 네덜란드에 사는 동주에게 이웃이 가구를 준 까닭, 수진의 친구가 탄 택시 운전사가 택시비를 깎아주지 않은 까닭은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남는다.
영화 초반 인주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과 영화의 끝 그림이 파손된 상태로 전시된 장면 사이, 운반기사가 그림을 놓치는 숏과 직전 계단을 오르는 숏이 서로 동떨어진 시점에 삽입되었음을 떠올린다. 인주가 만들고자 한 것과 만들어진 것,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그림 파편들 사이 무의미해 보이는 간격, 인주는 그 틈을 그대로 둔다. 수진은 영화 중간 즈음엔 훈성의 에세이를, 영화가 마무리될 즈음엔 인주의 편지를 읽는다.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 말들과 당신을 향한 내 감정은 이렇다고 하는 말들이 배치된 자리에, 작품이 바라보는 곳이 어렴풋이 비친다. 수진이 훈성의 에세이를 읽는 부분은 (이 영화에서) 드물게 상황에서 소리와 이미지가 모두 분리된 장면이다. 훈성의 음성이 오버랩되는 가운데 정호는 내용을 증명하듯 작업실에서 움직이다 균형을 잃는다. 하지만 불일치는 불일치로 남는다. 정호의 이야기(라고 이야기되는 것)로 수진과 훈성이 이어지지도, 수진을 경유해 정호와 훈성이 닿지도 않는다. 일인칭의 에세이는 써서는 안 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훈성의 소설이 되어버렸다. 인주의 편지를 읽는 수진 앞에는 실물의 인주가 나타난다. 그들이 거리를 두고 나란히 있는 뒷모습에 수진과 인주의 얼굴에 번갈아 초점을 두는 숏이 뒤따른다. 영화는 어쩌면 찰나 연결되었을지도 모르는, 두 사람 사이 간극을 응시한다. 나는 내 마음만을 겨우 알 수 있을 따름임을, 주장하기보다는 촘촘히 그리고 서서히 감각하게 한다.
+ 덧붙이는 말
1.
<너는 나를 불태워>가 짧은 간격으로 연달아 보며 곱씹고픈 영화라면,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기억이 흐려질 때까지 아껴두었다가 재관람하고 싶은 영화다.
2.
기꺼이 엮이고 엮으려 시도하는 <너는 나를 불태워>의 잡종성은 도나 해러웨이가 말한 테라폴리스, 그리고 ‘실뜨기’를 떠오르게 한다.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인류가 박테리아에서 진화했으며 바다 거품이 박테리아 모음이라는 정보를 넣는다. 그 내레이션이 삽입되는 지점도 흥미롭다. 단독 작품 비평을 썼다면 이 얘기를 풀었을 것 같다.(누군가 먼저 했을 법한데 아직 찾아보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다른 글에 엮을 예정.
3.
<너는 나를 불태워>를 넓은 의미의 교환독서라고 해도 될까. 곁가지가 자꾸만 뻗어서 ‘이 영화를 교환독서’하고 싶다. <레우코와의 대화>에 오르페우스가 등장하는 장이 있어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언급하고 싶었고 <이사벨라> 속 실험연극 이야기도 꺼내고 싶었는데 너무 사적인 욕심 같아서 제했다. 나중에 이 영화에 관해 (또?)다른 글을 쓸 기회가 생긴다면 사심을 풀어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