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불태워>(2024)
<너는 나를 불태워(Tú Me Abrasas)>(2024, 마티아스 피녜이로)
체사레 파베세의 희곡집 <레우코와의 대화>는 완결된 서사 속 인물들을 틈새 시간이나 가상의 시공간에서 대화하게 한다. 이중 <바다 거품(파도 거품)>은 브리토마르티스와 사포를 유령으로 호출한다. 브리토마르티스는 자신을 쫓아오는 미노스의 욕망을 피해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신화 속 님프, 사포는 사랑하는 여인 파온에 대한 욕망을 이기지 못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 여성 시인이다. <바다 거품>을 각색한 <너는 나를 불태워>, 두 유령이 영화 속에서 체현되는 방식은 재현과 연기가 아니다. 두 배우가 저장된 상대방의 이름을 각각 가비에서 사포로, 마리에서 브리토마르티스로 바꾸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대화가 시작되는데, 이들은 극 안에 들어가 인물에 이입하기보단 목소리가 자신의 육체에 내려앉도록 허락하는 듯 보인다. 발화하는 모습을 촬영한 장면은 거의 없고, 내레이터를 포함한 세 배우의 목소리는 여러 이미지들을 떠돈다. 의식과 예술의 물질초월성을 말하려 하는 것이라기보단, 음성언어를 연결의 매개로 설정함에 가까워 보인다. 피녜이로의 작업은 어떤 면에서 원작의 유령성을 공유한다. 다만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닌 ‘어디에나 있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 유령화된 목소리들은 관념의 차원에서 떠돌지 않고 실물의 장소들에 내려앉아 그것들을 서로 잇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은 결과물인 작품 안에 미완결의 상태로 나타난다.
관념에서 비롯되는 문학(그런 것이 있다면)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시는 구체적인 물질들, 경험와 엮임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시’는 고정된 텍스트가 아닌, 매번 틀림을 전제하는 번역-해석을 요구하는 엮인 현상이다. ‘번역’은 먼저 인간의 문자 언어 간에 이루어진다. 사포의 시구가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여러 형태로 번역되는 장면, 과일나무에 관한 시가 조금씩 다른 뉘앙스의 문장들로 나열된 페이지들. 끝이 아니다. 문자/음성언어와 이미지들 간 번역, 책 페이지와 영상 간 번역. 읽기는 곧 쓰기가 되며, 순서가 뒤엉키는 그 읽기와 쓰기 사이에는 길을 잃는 지점(lost in translation), 해석이 필요한 사각지대가 생성된다. 영화 후반 인용되는 ‘사포의 죽음에 관한 서사가 지어낸 것’이라는 서술은 사포와 파베세를 현대에 읽으며 발견되는 사각지대 중 하나다. 이 어긋남은 파베세가 상상한 사포를 부정하기보단 새로운 상상을 추동한다. 이 미지의 영역에서는 영화 안 배우와 작가의 상들이 교차한다.(여기서 잠시 셰익스피어극이 동시대 여성들의 삶과 안팎으로 엮이게 했던 피녜이로의 전작들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피녜이로는 그 필연적 불일치를 적극적이고 유연한 ‘오독’으로 잇는다. 내레이터가 낭독하는 인용과 화면에 나타나는 페이지들은 텍스트보다는 일종의 장소, 다른 요소들과 얽혀 번역-해석, 해석-창작의 과정-결과물의 일부가 된다.
‘번역’은 통상적으로 인간 문화권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대체하는 작업을 일컫지만, 도나 해러웨이는 브뤼노 라투르가 사용한 맥락에서, 반려종들 간 불완전한 의사소통의 행위로 본다. <너는 나를 불태워>에서 이루어지는 번역, 사운드와 이미지의 구체적이고 느슨한 교차성은 이와 닿는다. 해러웨이는 이미 1985년 ‘사이보그 선언‘에서 인간과 동물, 유기체와 기계, 물질과 비물질 사이 경계가 불분명해졌고, 순수한 인간됨도 여성됨도 없다고 이야기했다. ‘인간(hu)man만이 생각하고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 이원론, ‘호모 사피엔스’를 타 종에서 분리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문명, 예술, 문학이 오로지 인간(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그리하여 ‘개체’는 대체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관계 속에서 사는 잡종-인간은 그러므로 오히려 대체될 수 없다.) 이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계속해보겠다.
<너는 나를 불태워>에서 바다와 파도는 ‘제1의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여성적인’ 존재들과 겹치는데, 영화를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거기서 박테리아를 인지하게 된다. 인간종에 선행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맞물려 있던 행위자, 연결과 틈입의 대가 박테리아. 영화 초반에는 “우리는 걸어다니는 박테리아 군집이다.”라는 인용이 내레이팅되는데, 은유나 곁가지 서술이 아니라 바탕을 두는 아이디어 중 하나로 들린다.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는 바다와 한몸이 된 채 대화한다. 브리토마르티스가 칼립소를 찾아간 님프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를 때 바위에 파도가 부딪히는 숏이 연속된다. 님프들은 바다이고 파도이며 박테리아 모음이고 바위와 닿는 자들이다. 아프로디테는 자아가 제거된 페니스와 거품(박테리아)의 융합으로 바다 한가운데에서 탄생했고, 헬레네는 거위의 알에서 태어났다. 미생물과 동물에서 탄생한, 욕망을 알고 ‘미소지을 줄 아는’ 여자들. 유령의 소리를 담은 배우들의 몸은 영화 속에서 줄곧 물과 풀, 과일, 땅, 바다와 관계한다. 바다에서 님프와 시인을 상상하는 내레이터, 파베세, 피녜이로, (가비)사이돈, (마리아)비샤르 역시 추상적이고 순수한 ‘뇌’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박테리아에서 비롯되었고 박테리아와 얽혀 있으며 종내에는 박테리아에게 분해되거나 박테리아화될 몸들이다. 인류와 예술의 잡종성을 탐구하고 ‘신화나 사자, 소멸된 것과 함께-되기’[2016, Haraway, <트러블과 함께하기> p.175]를 말하는 해러웨이의 사유와 이 영화는 은근히 마주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피녜이로가 해러웨이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단정하는 일은 비약일 뿐더러 영화의 태도와도 어긋날 것이다. 인간은 박테리아와 다르지 않다거나, 영화가 그렇게 말하려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너는 나를 불태워>가 그러한 연결성을 고려하는 서사 틀로 사유할 여지가 있는, ‘인간의 것’으로 수렴하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자아내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경우 ‘잡종성’은 기꺼이 엮고 엮이려는 태도에 가깝다. 다른 글에서 나는 이 영화가 해석(:읽기)과 창작(:쓰기)을 구분하지 않으며, 해석-창작 즉 읽기-쓰기의 느슨하고 비선형적인 계보를 그리고 있다고 적었다. 여기 덧붙이면; <너는 나를 불태워>는 영화, 음악, 문학, 인간, 비인간, 사자, 생자, (미)생물, 무생물을 뒤섞으며 온갖 이음새와 틈새로 읽기를 시도한다. 모든 겹들은 직선으로 뻗지 않고 곡선으로 뒤엉킨다. 브리토마르티스와 미노스의 신화가 내레이팅되는 대목, 얼굴 없는 손이 마치 실을 풀고 잣듯 엽서 위로 펜을 놀려 페니스, 정액, 전갈, 산과 바다, 절벽, 산의 님프, 바다의 님프, 시인을 잇는다. 이 그림이 시의 조각이 되듯 박테리아는 시가 되고, 시는 박테리아성을 띤다.
<너는 나를 불태워>의 읽기는 멸균상태로 보존된 텍스트를 동떨어진 개체로서의 인간이 응시하거나 낭독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이 영화가 예술의 분리된 순수성(다시 말하지만, 그런 것이 있다면)을 긍정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시는 바래고 찢어진 파피루스 파편으로 전해진다. 허면 현대에 그 너덜너덜한 종이는 유령성을 띤 목소리들을 통해 어디로 이어지는가? 시가 적힌 책 페이지들은 깨끗한 인쇄면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인간의 손, 꽃잎의 잔해, 해변의 돌들, 색색의 밑줄과 메모로 오염된다. 또한 물탱크, 땅에 떨어져 썩은 과일, 스마트폰의 텍스트와 보이스 메일, 로드킬당한 설치류, 깨지고 변색된 조각상들, 수돗물과 바닷물, 완만하거나 깎아지른 해변, 풀밭에서 사과를 먹으며 시집을 읽는 여성, 광장을 걷는 발, 감독의 전작 푸티지…에 시는 있고 여전히 유동한다. 영화가 엔딩에서 제안하는 시-이미지에는 손상의 흔적이 남은 장소를 예술로 엮으려는 시도가 읽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강을 지나는 모터보트와 거기 타 있는 인간, 고대 건축물의 뒤집힌 상, 차가 달리는 도로 옆에 깎여나간 산, 거리에 쌓인 쓰레기 봉투 더미, 악보에 음표를 그리고 펜 뚜껑을 닫는 손. 그렇게 이미 서로를 침범한 땅과 쓰레기-를 품은 미완의 시를 영화는 제안하는 것일까.
참고 도서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2019년 번역본, 책세상, 황희선 옮김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2021년 번역본, 마농지, 최유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