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연상호, 2024)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미리 적어두자면 연상호 감독의 영화는 만듦새와는 별개로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다. 좀처럼 파악되지 않는 인물들을 자유롭게 풀어두는 영화, 틀을 벗어나는 서사에 매력을 느끼는 편이다. 인물에 상징성을 드리워 작가가 원하는 지점까지 끌고 내려가려는 강력한 의지에 거부감을, 다소 반복되는 패턴에 지루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매번 그의 영화가 궁금해졌던 까닭은 그 자극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대개는 분명하게 와닿아서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인물들을 살피며 영화를 이해해 볼 것이다.
임동환: 관찰하는 얼굴에서 관찰되는 얼굴로
동환이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으며 <얼굴>은 미스터리 스릴러로 방향을 튼다. 동환이 아주 어릴 때 실종된 어머니 영희가 백골로 발견된 상황, 장례식장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이모들이 찾아오고, 사촌은 대뜸 할아버지 유산을 나눌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영정사진을 부탁하자 이모들은 사진이 없다고 답하는데, ‘못생겨서 찍히길 싫어했다’는 이유가 따라붙는다. 고인에 대한 예의라곤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과 조용한 아버지, 거기서 소재를 보는 방송국 PD 수진 사이에 동환은 놓여 있다. 처한 상황은 흔치 않으나 그는 어렵지 않게 이입할만한 관찰자다. 동환이 영희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는 관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시점, 주로 전반부의 장면들에서 동환은 수진과 인터뷰이들을 관찰하고 반응한다. 있었던 사실보단 감정적인 평가가 전면에 드리워진 진술, 뭉개진 상을 복원하려 시도하지만 자꾸 중심을 벗어나 주변부로 미끄러지는 감각, 거기서 오는 불쾌감과 파생되는 궁금증이 관객에게 전해지며 기묘한 몰입감을 유발한다.
그러나 엔딩에서 동환과 수진의 역학은 뒤집힌다. 이제 동환은 한 뼘 뒤로 물러나 지켜보는 관찰자에서 선택의 주체로, 수진에게 관찰되고 그의 반응을 맞닥뜨리는 행위자로 변한다. 이 전환은 불편하다. 영화엔 빠졌으나 원작 그래픽노블엔 동환이 ‘어머니가 없는’ 아이로 불리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동환이 어머니에 관해 조사하다 만난 것은 아버지이고 자신이며 여전히 피부에서 진동하는 낙인의 흔적이다. 동환도 영규처럼 그것을 감추길 택한다. 한 시대의 음양각을 모두 지닌 영규의 상징성을 보존하는 동환의 선택은 현재가 과거를 답습한다는 것, 현재 강조되는 가치들이 과거에 기반함을 상기시킨다.
임영규: 자발적으로 전시된 얼굴
나역시 ‘비가시화’ 따위 표현을 즐겨 쓰는 버릇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영규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비유로 사용하거나 그 신체적 특징 자체로 인물을 설명하는 행위는 지양하고자 한다.(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집중해 살펴야 할 것은 그를 규정하는 외부의 언어가 어떻게 인물의 피부를 물들이고 또 안으로 스며드는가다. 영규의 기술은 손의 감각에 의지하는 작업 방식으로, 구체적인 노력에 재능이 따라 주어 다져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와 편견으로 인해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과거에나 현재에나 사람들은 그를 아이러니, 극복, 기적이라 일컬으며 신기해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영규를 카메라가 ‘주시’하는 상황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전시하려는 자와 전시되는 자 사이에는 어쩌면 자신들도 모르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 문답과 촬영이 ‘영 어색하고 불편하다’고 고백하는 영규는 한편으로 은근히 보여지기를 원한다. 사회 구조와 관습에서 기인한 모든 문제가 개인의 차원에서 이야기되던 시대에, 영규는 낙인의 손쉬운 표적이었고 영희처럼 지워질 수도 있었던 자였다. 그는 차별을 수용하고 스스로 ‘극복’했다고 여기며 관습을 학습해 내면화하는 식으로 적응한다. ‘불쌍한 약자’가 되느니 차라리 모멸감과 분노를 숨긴 채 ‘기적의 체현’으로 대상화되고 극화되는 차별을 택한다.
영희에 대한 영규의 감정이 처음부터 그런 성격을 띠었던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영희가 예쁘거나 못생겼다는 추측에 따른 영규의 태도 변화에서 읽히는 것은 아내를 장식품으로 여기는 가부장제의 미소지니다. 그는 영희에 관한 말들을 자신에 관한 말들로 받아들이는데, 상대방을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속하는 존재로 여겨서다. 멸칭을 수반하는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돼 왔을 영규의 분노는 가해자를 향하는 대신 제 곁의 약자에게로 굴절된다. 그건 한편으로 영희가 ‘약자답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몸을 움츠리면서도 순응하지 못하고 이내 요령없이 돌출되는 영희는 영규가 숨기고 파내야 할 걸림돌이 된다. 영규는 자신과 영희의 신체를 각각 ‘결핍된 것’과 ‘더러운 것’으로 말하는 타인의 언어에 잠식돼 버린다. 그리하여 백주상이 상징하는 착취적 시스템에 복종하는, ‘네가 처한 상황은 모두 네 덕/탓이다, 성과를 내어 가치를 증명하라’는 모토를 체화한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
정영희: 복원이 불가한 얼굴
영희는 그다지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은 아니나, (감독의 전작들에서 자주 나타났던) 남성의 심리를 드러내거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희생자, 또는 모성으로 수렴하는 여성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납작한 묘사는 타인을 경유해 전달된 것이다. 발화자의 해석이 들어간 과거 회상의 재현 안에서 영희는 얼굴로, 얼굴은 다시 낙인의 언어로 치환된다. 허면 영희는 누구인가. 그나마 실마리는 재봉사 진숙에게 있을 텐데, 서투른 연대의 제스처를 밀쳐낸 기억이 오랜 세월을 거쳐 죄책감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영규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달리) 영희가 가려져 있다는 것은 선명한 은유다. 적극적으로 지워졌기에 더 궁금해지는 자, 그러나 영원히 모를 존재. 영화는 영희를 조명하려 시도하고는 결국 그림자를 남긴다.
영희의 얼굴은 엔딩 씬 사이에 끼어든, 백주상이 사진을 촬영하는 순간에도 공개되지 않는다. 동환의 상상일지도 모를 그 재현과 실물의 사진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당시 주변인들이 낙인찍고 영규가 보지 못한 영희의 얼굴과, 기록으로 남은 영희의 사진은 포개지지 않는다. <미싱타는 여자들>에서 1970년대에 피복공장에서 일하며 노동운동을 했던 여성들의 오래된 사진은 당사자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담긴 초상화로 '복원'된다. 영희의 사진은 그러한 복원이 불가하다. 이야기를 들려줄 당사자도 함께 싸운 동료도 없다. 어쩌면 (작가의 의도가 아닌 우연으로,) 영희는 그 실체 없음으로 인해 연상호의 이야기 속 가장 비전형적인 여성이 된다.
다시, 임동환
사진을 보여주는 숏은 스크린 전체를 차지하지 않는다. 별로 길지도 않다. 이는 결정적인 정보를 공개하거나 충격을 안기는 순간이 아닌 허무한 방출의 순간으로, 동환의 시점이기에 의미가 있다. 대체 텍스트를 적는다면 이 얼굴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묘사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얼굴 자체에 관한, 예뻤다거나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다거나 정말 못생겼다거나 따위 평가들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 남는 건 동환의 반응이다. <돼지의 왕>의 엔딩에서 경민의 시체 앞에서 우는 종석, <사이비>의 엔딩에서 동굴 안 정체모를 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는 민철, <계시록>의 엔딩에서 신의 메시지라 여겼던 교도소 벽 자국을 지우며 점차 달라지는 상에 혼란스러워하는 민찬, 영희의 사진을 보며 우는 동환의 모습은 그런 장면들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그것들과 구분되는 위치에 자리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