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마인드>(2025)-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마인드(The Mastermind)>(2025, 캘리 라이카트)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제임스는 미술품 절도를 계획한다. 그런데 계획은 어쩐지 어설프고 굴러가는 모양도 영 시원찮다. 동료 한 명은 도중 빠져버리고, 당일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자 휴교일이란다. 나머지 동료들이 그림을 훔치러 간 동안 차를 대기시키자 바로 옆에 순찰차가 서더니 경찰이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한다. 애타는 제임스와 머리에 스타킹을 뒤집어 쓴 두 사람이 별로 프로페셔널하지 않게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은 절묘한 강약의 퍼커션 연주곡에 맞춰 흐른다. <마스터마인드>는 대체로 이 연주곡의 리듬을 따른다. 리듬은 반복되다 끊기고 또 변주되며 점차 다른 정서와 뒤섞인다. 실소가 나오는 상황이 연이어 배치되나 어느 시점부터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된다. 영화는 제임스에게 거리를 두다 그에게로 줌 인 하기를 되풀이한다. ‘즐거움을 방해하는, 사실적 캐릭터의 복잡성을 음미하는 에너지’[테리 이글턴, 2019, <유머란 무엇인가>, p.89]가 간헐적으로 요구된다는 말이다. 도둑들에게로 돌아가보자, 효과적인 실소를 자아내는 이 일련의 플랜 혹은 해프닝에서 밤중에 몰래 우유를 도둑질하던 <퍼스트 카우> 속 쿠키와 킹 루가 얼핏 포개졌다가 이내 떨어져나갔다. ‘개척 시대’에 생산 수단도 ‘남자다운’ 힘도 없었던 두 사람은 익숙하게 돌봄노동을 하며 서로를 다정하게 돌보던, 시대의 변두리에서 살다 죽고 흔적으로 남은 자들이었다. 나란히 놓인 그들의 백골은 수백년 후 두 반려종이 발견한다. <마스터마인드>에서 제임스는 누군가와 함께 일한다기보단 사람을 고용함에 가까웠고, 시대의 변두리에 있다기보단 시대를 부유하다 거기 붙들려 버림에 가까웠다.
<마스터마인드>의 배경은 미국,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아마도)닉슨 집권기다. 텔레비전과 신문에는 연일 반전 시위와 공권력의 과잉 대응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고, 거리에선 시위대와 그들을 힐난하는 사람들, 경찰이 대치한다. 제임스에게서 출발하는 영화의 오프닝 씬은 그 시대와 분리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요한 미술관이다. 경비원마저 늘상 졸고 있는 이곳은 외부와 단절되어 시간이 멈춘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다. 처음에 제임스는 꼭 가족들과도 일행이 아닌 듯 보였다. 작은 전시품을 숨긴 지갑을 테리의 가방에 넣으면서 이들은 연결되었다가 출입구에서 다시 분리되며 이곳을 빠져나간다. 반면 엔딩 씬은 시끄러운 거리다. 현상수배된 채로 도망다니다 돈이 떨어진 제임스는 나이든 여성을 미행해 지갑을 빼앗는다. 이후 시위대 사이에 숨어 지폐를 꺼내고 지갑을 버리는데, 이번엔 지갑과의 분리에 실패한다. 한 시위 참여자가 친절하게도 주워 건네준 탓이다. 때마침 경찰들이 진압을 시작하고 제임스는 체포된다. 제임스를 화면 복판에 뚝 떨어뜨리며 열린 영화는 그가 시대와 단단히 얽혀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모습을 촬영하고는 닫힌다. 이송차에 갇힌 제임스는 뭔가 오해가 있다며 어쩔 줄 몰라했다. 절도범으로 얼굴이 팔렸고 방금 추가로 강도까지 행한 범죄자가 보이는 이 반응은 아이러니하게도 진심이다. 테리를 향한 ‘우리 가족을 위해서 한 일이야’라는 호소가 진심이었듯 말이다. 그러나 진심이 전부를 말해주진 않는다.
허면 제임스는 왜 훔치는가, 그리고 왜 하필 그것을 훔치는가. 제임스의 계급과 전사, 현 상태에 관한 정보는 영화 흐름 안에서 순서가 뒤섞인 채 하나씩 주어진다. 그는 미술을 공부하다 대학을 중퇴했다. 재학 중에 미술품을 훔쳐서 교수에게 장물로 넘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명한 판사인 아버지는 아들을 못마땅해 하며, 중산층 계급다운 생활을 꾸리는 데 성공한 또래 남성들과 비교한다. 제임스는 부모에게 금전적 지원을 받으면서 부모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의 자금 마련 계획에는 아버지와 어긋나려는 심리가 비친다. 아버지가 법 집행자인 마당에 범죄를 저지르고, 아버지가 ‘가치를 두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추상화를 훔친다. 헌데 그 와중에도 제임스는 가족에게 의존해야 한다. 자금은 어머니에게, 그림을 보관할 천 주머니는 아내에게 부탁한다. 형사들이 집으로 찾아오자 아버지의 이름을 들먹여 상황을 모면한다. 그가 초라해지고 마는 건 지반이 없어서가 아니다. 딛고 있는 지반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거기 의존하게 되는 탓이다.
제임스는 아버지가 지나가듯 덧붙인 (예술이)‘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를 곱씹으며 은근히 통쾌해한다. 그 곁에는 테리가 있다. 테리는 제임스에게 필요한 노동을 제공하고 제임스의 찰나들을 목격한다. 그가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알리거나 직장에서 제임스의 전화를 소리낮춰 받는 장면, 지하실에서 남편의 부탁으로 재봉틀을 돌리다 식사를 준비하러 올라가는 장면 등을 라이카트가 그냥 넣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모드가 있다. 갈데 없어진 제임스가 찾아오자 식사를 두 번째로 준비하거나, 프레드와 제임스가 대화하는 모습을 바느질을 하며 응시하는, 떠나는 제임스에게 샌드위치를 건네는 모드. 과거를 조용히 들추는 모드와 애원하는 제임스의 전화를 뚝 끊는 테리. 제임스의 초라함은 그들 앞에서 들통나고 만다.
한편으로 그림 절도는 ‘미술품 애호가’로 알려진 제임스가 미술/예술art과 닿아 있으려는 최후의 몸부림으로 보이기도 한다. ‘장물’을 애지중지하며 거실 벽에 몰래 걸어보기도 하는 그는,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림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치를 안다는 데에서 자부심과 내밀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림들을 강제로 빼앗기고 그토록 낙담했던 건 팔아 얻으려 했던 돈 때문은 아닌 듯했다. 제임스는 고요한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시끄러운 세상으로 꺼낸 자다. 테리와 자신이 노동한 결과물(천 주머니와 나무 상자)에 겹겹이 싸서, 진흙 범벅의 헛간에 가져다 놓는다. 그러나 사실 그가 원했던 건 모든 번거로움과 지저분함(이를테면 휴일에 아들을 돌보거나 생계를 위해 예술과 무관계한 임금노동을 하거나 길거리의 소란과 끔찍한 뉴스들에 귀기울이는 일 따위의)에서 자유로운, 미술관을 닮은 삶이었던 게 아닐까. 그 이상ideal의 그나마 지척에 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을 더럽히나, 총을 금지하는 등 나름 선을 그으려 노력한다. 한편으로 그런 태도는 (애초에 어떤 순수성도 불가능한 사회에서) 스스로도 아마 인지했을 안전망 덕에 가능했던 것이었으리라. 따라서 영화는 제임스의 곤경을 깁스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깁스는 자신이 범죄자임을 감추지 않는 자, 비밀을 떠벌리며 온갖 사건에 연루되고 결국 제임스마저 연루시키는 자다. 푯말을 높이 치켜들고 반전 시위를 하던 깁스를 픽업하며, 시위 참여자들에게 비난을 퍼붓던 행인에게 사과하던 제임스. 아무 것과도 엮이지 않으려 애쓰던 그의 삶은 이미 갖가지 노동과 보수적인 법 집행자의 자본,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징집당하고 부당하게 체포되는 사건들과 함께 굴러가고 있었다. 나무 상자 안에 들어가 있다 하여 주변이 진흙탕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 캘리 라이카트의 이야기는 늘 삶의 맥락에서 피어났고 그가 그리는 예술은 잡다하게 곤란한 일상을 살아가며 하는 것이었음을 떠올린다.
도망 중이던 제임스가 여관 옷장에서 발견한 타인의 신분증을 위조하는 동안 카메라가 천천히 한 바퀴를 패닝해 방을 담는 장면이 있다. TV에서 베트남전 뉴스가 흘러나오는 와중 그는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하던 일에만 열중한다. 화면에서 사람이 빠져나간 잠시간, 그 어두운 방에 아무도 없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제임스는 그렇게 시대를 부유한다는 의미에서 유령이었다가, 시대에 단단히 붙들려 제거됨으로써 다른 의미의 유령이 되거나 그조차 되지 못한다. 제목부터 아이러니인 <마스터마인드>는 엮이고 싶어하지 않았던 남자가 시대에 떠밀려 갇히는 이야기를 온갖 아이러니 속에서 어긋나는 리듬으로 자아낸다. 헛간 선반에 힘겹게 그림을 올려놓는 제임스, 흙범벅이 된 옷을 서둘러 갈아입는 제임스, 작동되지 않는 주크박스를 걷어차는 제임스, 강제로 징집당한 남자의 스토리텔링이 들리는 가운데 쓸쓸히 침묵하는 제임스, 가장 보잘것없는 몰골로 강도를 저지르고는 경찰 곤봉에 맞아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제임스… 그 피로한 찰나 혹은 지난한 과정들에 드리워진 것, <마스터마인드>를 보고 남는 것은 그 우습고도 씁쓸한 정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