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 <미러 넘버 3>
* 작품의 장면과 전개 포함
<홍이>(2024, 황슬기)
<홍이>에는 사연의 설득이나 명확한 인과가 없고 상황의 연쇄만이 있다. 인물들이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상세한 전사를 지니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다만 영화가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엄마는 나한테 안 미안해?’, ‘엄마가 나 서울 보낸 거 아냐’ 등의 대사를 통해 무언갈 유추해 볼 수는 있으나 무엇도 확인되지 않는다. 수많은 우연과 자잘한 인과들이 엮여, 주로 어긋나고 때로 교차되는 지금의 서희와 홍이가 있다. 연쇄되는 상황들 속에서 홍이는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하거나 해야 할 말을 않거나 사회적 신호를 읽지 못하거나 약속을 어기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 이런 묘사들은 홍이에 관한 인상을 남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는 망설여진다. 채무관계로 얽힌 전 연인에게 인신공격 섞인 말을 듣거나 직장에서 해고되는 따위의 사건들에 홍이의 탓이 없다고 하기 힘들지만, 오로지 그의 잘못이라고 하기도 주저된다. 영화는 홍이의 ‘원인’을 선명하게 (이를 테면 트라우마) 그리지 않는다. 이입할 것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도 않는다. 여기엔 타인의 삶을 얼마간 엿보게 될 때의 불편하고 모호한 감각이 자리한다. 그 모호함은 인물에 대한 윤리적 평가와 단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홍이와 대조되는 인물은 진우다. 서로의 신상을 공유한 후 함께 사진을 보는 두 사람을 촬영하던 카메라는 서서히 이동해 유리창에 비친 홍이의 상으로 초점을 옮긴다. 홍이는 지금 자신이 꿈꾸는 이상의 형태로 스스로를 그려내고 있는 것일까. 일상적으로 얕은 거짓말을 하는 홍이와 달리 진우는 아마도 보이는 그대로다. 일을 쉬며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는 그의 상황은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사유로 설명된다.(스스로 그렇게 말한다.) 반면 홍이가 현재 겪는 고난들의 까닭은 그런 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회복탄력성이 좋다’고 진우는 말한다. 홍이는 어떤가, 경제적/정서적 자산이 고갈되어 기울어지면 기울어진 그대로 살아가는 걸까. 기울기를 어설프게 감추는 방법만 터득한 채로. 영화는 회복의 결말에 닿지 않는다. 그 기울어진 상태가 드러나는 순간들, 그리고 자꾸 어긋나던 서희와 홍이의 마음이 잠깐 닿는 순간을 포착할 뿐이다.
<미러 넘버 3(Miroirs No. 3)>(2025, 크리스티안 페촐트)
<운디네>에서 물은 꿈/무의식과 의식, 신화와 현실을 이었고 <어파이어>에서 불은 소설과 현실에 걸쳐 있었다. 일종의 재난이자 매개로 영화에 흐르던 비정형의 원소들, 파울라 베어의 인물은 그것들과 느슨하게 포개졌다. 감독 자신이 3부작의 마무리라고 밝힌 <미러 넘버 3>의 원소는 바람이다. 물이나 불과 달리 뚜렷하게 눈에 보이지 않으며 습기나 재와 같은 직접적 잔해를 남기지 않는다. 화면 속 바람의 존재는 나뭇가지나 커튼, 머리카락 등이 흔들리는 모습이나 소리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다. <미러 넘버 3>에서 바람은 파울라 베어가 연기한 라우라가 일으키거나 몰고 오는 것보다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 그가 감각하는 것, 연주곡처럼 영화에 흐르되 형체를 짚어내기는 어려운 것이다.
베티는 교통사고를 당한 라우라에게서 죽은 딸 옐라나를 겹쳐보며 그에게 딸의 방과 물건을 내어준다. 라우라에 대한 보살핌은 상실을 망각하려는 제스처와 구분되지 않는다. 베티는 집안의 물건들이 고장난 채로 두고, 별거중인 남편과 아들은 곧바로 고친다. 하지만 고친 줄 알았던 식기세척기는 가족의 상태를 반영하듯 다시 고장나고 만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새 식기세척기를 들인 다음 라우라는 떠나고, 그가 자신들과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후에야 가족은 미소짓는다. 아무것도 대체되지 않았고, 대체될 수 없었다.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관계만이 형성되었다. 그로 인해 일어난 변화를 치유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허나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라우라와 베티는 처음 조우했을 때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고, 베티의 집에 머무른 것, 베를린에 돌아가지 않거나 돌아가기로 한 것은 라우라 본인의 결정이었다. 베티의 가족이 딸을 잃었듯 라우라도 연인을 잃었으므로 상실감을 공유한다는 해석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연인의 죽음(강제적 이별)은 라우라에게 필요했던 사건처럼 보였다. 영화 초반 라우라를 둘러싼 모종의 상태는 명쾌한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가방을 반복해 잃어버리는 등 내내 어딘가에 정신을 빼앗긴 듯 행동한다. 라우라에게서 출발해 다시 라우라에게 도달하며 끝나는 영화는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차이를 강조한다. 엔딩, 졸업 연주를 마친 라우라는 베를린의 아파트로 돌아와 흔들리는 커튼을 응시하며 미소짓는다. 베티의 집에서 느꼈던 바람을 돌이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찰나, 화면에 바람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