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Princess, <Girl Violence>(2025)
I’m tired of crying and tired of trying
Why does nobody mention that girls can be violent?
And I hate it
But I kind of like it yeah, I kind of like it
- ‘Girl Violence’
<Girl Violence>에서 ‘girl violence’는 ‘여자들이 행하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 행위나 폭력의 경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단 관계의 역학에 각자의/서로얽힌 감정과 상태가 뒤엉켜 있는 소용돌이나 덩어리에 가깝다. 화자나 상대방에게만 내재된 성질도 아니고, 사고처럼 맞닥뜨린 이물도 아니다. 이 유해함과 중독성은 여자들이 일방적으로 또는 쌍방향으로, 저마다의 점도와 농도로 이끌리고 엮일 때 발생하는, 피부에 끈끈하게 달라붙고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종류의 것이다. 어느새 침투해 집요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가 떨어져나가며 흔적을 남기는, 매혹적이고 어지러우며 카오틱한 무언가다.
‘미쳤고 지쳤는데 포기할 수 없는 / 싫어하는 동시에 좋아하는 / 나를 망쳐놓기에 진정한 사랑임을 아는’ / ‘네 음색은 좋지만 톤은 싫은’ (‘Girl Violence’) 모순, 화자는 상대를 경멸하고 두려워하며 사랑하고 갈망한다. 이 감각은 ‘head over heels’와도 조금 다르며, 에코가 많고 불균질하게 지연되는 그룹사운드에 반영된다. 연주의 울림은 흐느낌으로도 들리고, 폭주하더라도 시원함을 선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미 데뷔 EP <1950>부터 독보적인 음색과 다듬어진 기술을 뽐냈던 미카엘라 스트라우스는 이번 앨범에서 정제되지 않은 표면의 보컬링을 자주 쓴다. 의도되었으나 계산되지는 않은 것으로 다가온다. 리듬앤블루스틱하게 출발해 불안정하게 늘어지기도 하고 마구 갈라지고 던져지기도 한다. 매끈하지 않게 오토튠을 입히거나 투톤으로 분열되기도 한다. 트랙 수는 열 셋으로 적지 않으나 전체 러닝타임의 길이는 40분이 채 안 된다. 한 트랙이 대개 2-3분에서 그친다는 뜻이다. 아직 끝나기엔 이른 듯한데 다음 곡이 치고 들어오는, 그 ‘결핍된’, ‘감질나며’, ‘혼을 빼놓는’ 기분까지 앨범의 테마와 연결된다. 모든 곡은 완성되어 있는 동시에 미완의 공기를 흘린다.
느슨하게 앨범의 흐름을 적어본다면, 나쁨과 좋음이 불규칙하게 뒤섞인 엮임에 빠진 화자가 소용돌이에서 소용돌이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첫 트랙에 드리워진 감각은 앨범 전체에 걸쳐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묘사와 은유들로 연결된다. ‘Girl violence’와 ‘girls’, ‘I feel pretty’와 ‘get your heart broken’, ‘Jaime’, ‘Serena’와 같은 고유명사들까지, 트랙 제목들이 모두 화자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볼 여지도 있겠다. 앨범 한가운데에 위치해 주제를 환기…하는 ‘Girls’ 다음에 이별노래들이 배치되고 ‘뉴 러브’송으로 마무리된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만남과 헤어짐의 경계는 불분명하고 더티하다. 단 한번의 칼질로 분리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 사이 취함being high을 노래하는 ‘Origin’, 특정한 캐릭터에 관한 인상이 담긴 ‘Cry Cry Cry’가 있다.
https://youtu.be/62eX2AolCJ8?si=7uAC_i4k3ElcXd2G
제이미부터 무릎까지
멜로디가 반복되며 점차 소리를 쌓아올리다가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터트린다. ‘Jaime’에는 후렴구랄 것이 없고, 호명과(Jaime) 감탄(haha)이 있다. 각 벌스의 첫 구절은 “You’ve been patiently waiting to hate me”와 “I’ve been secretly wishing you’d date me”로, 대칭을 이룬다기보단 서로 대치한다. 화자는 제이미를 짝사랑하고, 제이미는 그런 화자를 거부하는 걸까. 그리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다. 화자는 ‘넌 내 안경에 앉은 파리에 불과해 / 네가 준 옷은 내게 안 맞아’라고 하면서도 ‘네가 내가 멋지다고 말해준다면, 기절할거야’라고 고백한다. 제이미는 화자가 ‘바스러질 때까지 쥐어짜고’, 화자의 ‘영혼을 그의 집으로 바꾸어 놓았’다. 화자는 상대를 견딜 수 없어 하고, 아마 제이미도 다르지 않다. ‘견딜 수 없다’의 의미는 이중적이며 단일한 언어로 수렴하지 않는다.
‘I Feel Pretty’에서 화자는 ‘아주 오랜만에 예뻐진 기분’이 든다. ‘그녀’ 덕이다. 화자는 그녀의 엉망mess들과 자신이 자기 전에 먹는 알약들을 노래한다. 이 문장들에 담긴 것은 회복불가한 타락이나 ‘상호 구원’ 서사가 아니다. 겉잡을 수 없이 두렵고 굉장히 설레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이다. 마지막 구절 “sun in the sky feels amazing, amazing”의 가장자리에는 매듭이 풀린 뉘앙스가 있다. 엔딩의 늘어지고 찢어지는 기타 멜로디는 가슴을 불안정하게 뒤흔드는 멋을 방출한다. 그런가하면 ‘Get Your Heart Broken’에서 화자는 ‘몸은 최상이지만, 마음은 복잡’하다. 역시 ‘너’가 곁에 있어서다. ‘네가 우리 중 하나라고 해’, ‘이리 와 키스해 날 가져’: 이 문장들엔 기대와 예고된 실망이 공존한다. 이어 브릿지의 가사를 살필 필요가 있다. “It’s the shut door / It’s the pillow between us / It’s the I want more / It’s that you’ll never be us“ 여기서 ‘닫힌 문’, ‘우리 사이의 베개’, ‘내가 더 원하고 있다는 것’, ‘네가 절대로 우리가 되지 않으리란 것’은 ‘it’에 대응된다. 즉 표면적으로 상황의 서술인 이 표현들은 한 덩어리-단어로서 화자의 상태를 수식한다. 이처럼 어수선한 조각들이 모여, ‘f*** around’ 해서 ‘마음이 조각나야 한다’는, 드럼의 강약에 맞춰 읊는 주문의 되풀이에 도달한다. 화자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는 건 그럼그렇지, ‘Girls’다. 그가 갈망하는 ‘너’와의 관계는 ‘폭력, 혼돈, 싸움’을 유발한다. 허나 어쩌겠나, ‘Bring me to my knees’하게 만드는 존재가 여자들인 것을. 화자는 그 잔혹함과 황홀감에 도취돼 있다. 파워발라드에 가깝게 출발해 탄식하듯 ‘ahahah’를 내뱉는 후렴을 거쳐 슈게이지하게 뻗는 전개는 그 ‘시도해보고픈 카오스’를 그리는 데에 제격이다.
펑키한 기타 연주로 열리고, 뱉는 스타일의 보컬이 뒤따르는 ‘Cry Cry Cry’가 이 사이에 끼어 있다. 약간 튀는 트랙이다. 복잡한 폭력성은 좀처럼 비치지 않는다. ‘친구인 줄 알았지만 가식적으로 날 대했던 너’에게 적대심보단 무관심을 표하는 곡으로, 후렴에서 되풀이되는 ‘넌 이걸 들으면 울겠지’에는 시니컬한 조롱의 뉘앙스가 있다. 톤은 지속적으로 신나고 경쾌하다. 툭 던지는 ‘whatever’가 바로 이 곡의 태도다.
https://youtu.be/LhcVJhdy1zM?si=D_9YFaNzDzwY0l89
유령부터 세레나까지
누군가는 ‘Covers’를 이별 애도에 실패해 다다른 멜랑꼴리아-망상 증세가 반영된 곡이라고 정신분석할 수도 있겠다.(하긴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라면 이미 이 앨범은...) ‘난 그저 유령인가봐, 네 방에서 날 마주치고 싶지 않겠지. / 난 네 방에서 널 볼건데 말야.’ 호러-멜로를 바라보는 가사에 비해 멜로디는 의외로 무난한 팝으로 진행된다. 그러던 어느 순간 보컬은 차올라 참기 힘들다는 듯 짧게 ‘ah!’를 내지른다. 조 탤봇이 피쳐링한 ‘Say What You Will’은 앰비언트하다. 맺고 끊음이 불분명하고, 에코가 낭낭한 보컬은 몽롱하다. 탤봇은 뭘 하느냐면… ‘you know I tried babe’를 차분히 읊조린다. 쉬어가는 트랙으로 들리나 사실 ‘burning church’에 대한 곡이다. 맥락을 잘라먹고 대뜸 적었는데, 그러니까 ‘널 죄라고 말하는 교회라면, 어디든 불태우겠어’라는 구절이 있다. 앞서 적었지만, 이건 물리적 폭력에 관한 곧이곧대로의 진술이 아닌 ‘폭력적 느낌’에 관한 이야기다. 이 뒤로 ‘RIP KP’를 잇는 건 어쩐지 납득되는 배치다. 정규 데뷔 <Cheap Queen>의 수록곡 ‘Prophet’이 연상되는 센슈얼 팝으로, 디테일과 깊이 면에서 한층 혼란스럽고 그러므로 성숙하게 다가온다. 제목은 아마 ‘Rest in peace King Princess’의 앞 글자를 딴 것일 테다. 상대방으로 인해 송라이터 본인과 다르지 않은 화자 ‘KP’가 비유적으로, 곧 죽을 것 같거나 죽은 듯한 기분을 맛보고 있다는 소리. 그는 ‘내 여자가 네 삶을 파괴할 것’이라 경고하며, 자신의 삶은 벌써 파괴되었고 ‘나는 갈기갈기 찢어졌다’고 노래한다. 이에 걸맞게 멜로디엔 ‘위험’의 뉘앙스가 있는데, 한편으론 deadpan하다. 묘한 건, 와중 ‘체리 파이 같은 그녀의 입술’과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이 적시는 그녀의 척추’를 묘사한다는 점이다. 화자는 꼭-‘Covers’보다는 진정됐지만 딱히 더 건강하다고는 하기 어려운-몸에서 이탈한 영혼이라도 된 것처럼, 상대방의 매혹성과 위험성, 스스로의 파멸을 관조한다.
라임을 맞춘 벌스-코러스가 짧게 반복되는 ‘Alone Again’은 센치한 발라드 팝 정도로 분류될 만한데, 이별노래보단 이별을 둘러싼 노래에 가깝다. 연애가 깨지며 그 고통은-만남과 헤어짐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관계 역학 전반에 걸쳐 있게 된다. ‘넌 유리잔을 깨고, 난 네 이름을 고함치고 / 내게 고통을 주기 위해 과거를 헤집어 / 난 죽고 싶어, 넌 결코 변하지 않을 거야 / 난 산산조각나고, 넌 날 주워모으지 / 키스를 건네곤, 심장에 주먹을 날려’: 강렬한 묘사를 늘어놓는 보컬엔 힘이 빠져 있다. 엔딩은 별개의 트랙인 양 반전된다. 감미로운 기타연주에 몽롱한 보컬이 어우러져 무언가에 도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이 미묘한 미완결의 감각은 ‘Say What You Will’의 그것과도 닿는다. 귀를 기울이면, ‘몸이 아려’, ‘이게 끝났다니 믿을 수 없어’와 ‘솔직히 이게 끝났다니 정말 마음이 놓여’가 맞물리고 공존하고 있음이 들린다.
라스트 트랙 ‘Serena’에서 화자의 상태는 다시금 온통 고유명사가 된다. 서두르지 않는 멜로디, 나직하게 속삭이는 보컬, “You f***ing making it easy”라는 구절을 근거로 소위 ‘건강한 사랑’의 시작이라는 코멘트를 달아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유해한 루프의 회전이라고 해야 할까. 무엇이 맞거나 틀리다고 할 수 없다. 관계가 어떤 형태로 그려지고 일그러질지 어찌 알겠나. 사람을 안다(고 여긴다) 하여 나와 사랑하는 그의 모습, 그와 하는 사랑의 모양까지 아는 건 아니니. 반복되는 문장 “모두 이렇게 사랑하는 건 아냐”가 무슨 장면으로 이어질지는 사랑하는 그들도 모른다. 느릿느릿 몰아치다 잦아드는 그룹사운드를 음미하고 있자니, 기약없이 연기되는 폭풍의 절정을 기다리는 기분이 든다.
https://youtu.be/RyLjffhEQo8?si=r61fogHCjHSHqHbf
모두의 불일치
앨범을 수 차례 재생한 후 새삼 커버 아트를 뜯어본다. 스트라우스의 얼굴이 꽉 차 있다. 턱선이 프레임에 잡히지 않을 만큼의 클로즈업, 무심코 어쩌면 실수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라도 한 듯 초점이 흔들린 상이다. 이 컷이 바로 '걸 바이올런스'다. 푹 빠지고, 싸우고, 휘몰아치고, 버려지고, 괴로워하고, 다시 누군가를 발견하는, 기승전결로 나뉘지 않는 이끌림과 만남, 헤어짐들, ‘Serena’에서 멎는 <Girl Violence>는 일종의 루프로 복귀하는 이야기도, ‘나쁜’ 연애를 종료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이야기도 아니다. 도입부엔 ‘걸 바이올런스가 무엇인가’를 쉐이핑하려 시도했고, 방금은 ‘<Girl Violence>가 무엇이 아닌가’를 적었다. 미카엘라 스트라우스와 친구들이 끓여낸 이 뜨거운 슬러시는 분해를 요하지 않는다. 우린 뜨겁고 차가운데다 끈적이는 이 앨범을 여기저기 묻혀가며 들이키면 된다. 그러니 해석이 필요치 않은 것에 관해 적은, 이 글은 내 욕심이다. 하지만 더 자주 그리고 마구 이야기돼야 하는 현상을, 그에 너무도 어울리는 방식으로 전하는 작품을 접하고선 무언갈 휘갈기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마무리로 덧붙이면, 검열당한 천사, 마네킹, 사이보그 등 여러 흥미로운 캐릭터들의 계보를 그리며 “어떻게 이 인간의 살갗 수트를 소품으로 쓰지?”[Vogue]라는 물음에 답해 온, 킹프린세스의 섹슈얼리티와 젠더 수행 놀이는 계속된다. ‘Jaime’의 구절 ‘네가 준 옷은 내게 맞지 않아’는 물론 곡과 앨범의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다만 킹프린세스가 해 온 작업들과 밀접히 닿는 뮤직비디오의 미학 실험과 연결해서 읽는다면, 어떤 옷이든/그 누구에게도 ‘일치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숨은 레퍼런스를 끄집어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Jaime’ 비디오에서 스트라우스는 가발을 쓰고 퍼 머플러를 두른 드랙퀸으로 분한다. “악마적인 여자”[Vogue] 제이미의 모습으로, 제이미의 상대방 입장에서 쓰인 가사를 립싱크한다. 그렇다면 제이미에게 매달리는, 상의를 탈의하고 침실에서 운동하는, 스트라우스를 닮은, 비디오의 엔딩에야 얼굴이 온전히 드러나는 다른 캐릭터는 대체 누구인가? 쿠킹 인플루언서 지오반니 루치아노다. 겹겹의 수행성이 서로를 침범해 의도적으로/예기치않게 혼선을 빚는 장면들은 참으로 즐겁다.
https://youtu.be/RSeAgN2HDrA?si=B4KYfZJYoFKdY-vL
+
일단 <Cheap Queen>의 ‘Ohio’ 포지션이라고 적어보자, 속편처럼 도착한 싱글 ‘Cherry’는 걸 바이올런스에서 벗어났다기보단 일시적으로 놓여난 듯한 화자가 등장하는, 포스트-앨범 트랙이다. <Girl Violence>의 결말은 필연적으로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