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트(Sirât)>(2025, 올리베르 라세)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영화는 스피커를 설치하는 동작들로 시작된다. 사막의 땡볕 아래, 흙먼지에 둘러싸여 장비를 옮기고 배열하는 손들이 클로즈업되고, 그 끝에는 마치 무언가 선언하듯 흙벽 맞은편에 나란히 늘어선 스피커들의 상이 위치한다. 전자음악이 흘러나오자 모여든 사람들은 몸을 흔든다. ‘오로지 춤추기 위해 모인’, 무엇도 선언하지 않는, 이들의 공통분모는 오로지 춤인 걸까. 거기 두 사람이 끼어든다. 딸을 찾는 루이스와 그의 어린 아들 에스테반. 어떤 의미에서 여기 모인 모두는 이방인이지만, 목적을 가지고 경로를 그리며 움직이는 부자는 그 사이에서도 한층 이방인처럼 보인다. 영화에는 곧 ‘세계 3차 대전으로 인한 비상사태 선포’라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적어도 처음에는 주인공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만 같다. 이 사건은 그저 부자가 한 무리의 펑크족(스테프, 조쉬, 자드, 토냉, 비기)과 동행하는 계기, 기묘하고 멋진 로드무비의 발단으로 기능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대개는 죽고, 살아남은 일부는 스피커로 빨려들어간다.
<시라트>에는 디졸브가 자주 쓰인다. 사막의 둔덕과 사람들, 달리는 트럭 따위가 서로 겹치고, 아들을 잃고 정처없이 평야를 걷는 루이스와 해가 신기루처럼 겹친다. 엔딩에서 그 디졸브는 (정확한 순서는 아니다) 바위를 타고 걷는 세 인간과 하나의 개로부터 사막 복판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스피커로, 그리고 그 스피커 사이에 위치하는 해의 상으로 이어진다. 네 명의 생존자는 새카맣게 탄 사람과 기계의 잔해들을 내려다본다. 이후 이들이 걷는 광경이 멀리서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클로즈업된 스피커의 상이 포개진다. 마치 이들이 소리가 나오는 구멍을 향해, 거꾸로 걸어들어가는 듯한 모양이다. 스피커에 잠식되었거나 그것과 강제로 일체화된 이들은 더 이상 거기서 흘러나오는 비트와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춤추다 지뢰를 밟은 자드의 죽음은 별안간 뚝 떨어진다. 그러나 이후의 죽음들은 그렇지 않다. 패닉해 자드의 시신을 향해 달리던 토냉이 곧 지뢰를 밟으리란 예감, 지뢰밭을 가로지르는 트럭이 (또는 비기가)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어쩌면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공존하는 상태 - 지연된 불안은 대부분 낙담이나 절망으로 터진다. 트럭이 모두 재가 된 다음 이루어지는 루이스의 망설임 없는 지뢰밭 횡단은, 영웅적이고 선구적인 행위라기보단 일종의 자포자기에서 비롯된 자폭 행위에 가깝게 다가온다. 이 무렵 시작된 일렉트로닉 멜로디 리프는 비기가 걷다 터지고, 개를 안은 조쉬와 (마치 함께 죽음 위를 걷겠다는 듯)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스테프가 천천히 길을 건너고, 여러 상이 디졸브된 후 영화가 끝을 맺기까지, 간극을 두고 계속해서 흐른다. ‘스피커로 들어가는’ 컷 이후, 영화는 살아남은 이들의 궤적을 잠깐 놓친다. 화면엔 도로가 빠르게 지나간다. 앞서 유사한 숏이 여러 차례 삽입된 바 있었다. 말하자면 달리는 탈것 시점의, 이러한 촬영은 정말로 드물지 않다. 다만 <시라트>에서 이런 숏은 대개 바닥을 거의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구도에서 출발한다. 여기 드리워진 감각은 앞으로 나아가는/질주하는 종류의 것보단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종류에 가깝다. 지연된 폭파의 감각, 스피커로 빨려들어가는 감각, 그리고 곤두박질의 감각은 끊이지 않는 일렉트로닉 리프와 함께 쌓이고 유지된다.
이 감각이야말로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려던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물론 <시라트>에는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선택 가족, 낯선 조우와 순간적 연대들, 위기를 견디게 하고 애도의 의식이 되는 놀이… 관객은 에스테반-루이스 부자에게서 공감/유대 지점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고, 자드와 토냉을 비롯한 펑크 무리에게 정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는 이들의 생명이 화면에서 빠져나가는 광경의 충격을 관객이 ‘소화’하기 힘든 형태로 배치한다. 에스테반의 사고 장면에 있는 충격은 무기력하게 지연되므로 더 잔인하고, 이 충격을 누그러뜨리고 사자를 애도하기 위한 의식을 치르던 도중 자드와 토냉의 죽음이 연쇄된다. 그러니까… 세계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그 전쟁과 상관이 있을지 모르는 까닭으로 /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는데 / 또다른 이들을 잃고 / 이동수단도 생필품도 식량도 결여된 상태로 / 거기 가만히 있으면 말라 죽을지도 모르는 사막에서 / 지뢰밭을 횡단하도록 밀어붙여지는 감각 - 마치 영화가 관객에게, 바로 이러한 감각을 간접적으로 느껴 보라고 들이미는 것만 같았다.
마무리로 영화는 무리지어 이동하는 익명의 사람들을 보여준다. 트럭의 지붕을 빼곡히 채운, 하얗지 않고 낯선 얼굴들. 그 후에야 영화는 그 사이에서 (관객과 라포를 쌓은) 일행을 찾아낸다. 더 이상 이들에게는 독립된 이동수단이나 식량이 없고, 목적지도 모호하다. 타자들과 섞여 앉은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대로 무언갈 선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착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