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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급식백선생 Jun 29. 2020

어떻게 살 것인가?

직업적인 관점에서, 승진에 관하여,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1. 서론

 불현듯 어떤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가 있다. 그 순간 그 아이디어는 굉장히 좋아 보이고 의미 있어 보이는 것들이라 당장이라도 무엇인가 실행에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하지만 그대로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아이디어에서 부족한 부분이라던지, 혹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부분들을 생각하며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되돌아보면 결국 ‘그때 순간의 생각이 나를 이끌었을 때 그것을 실행에 옮겨볼 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몇 주 전, 어떤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이끌었고, 굉장한 계획이라고 생각하며 들떴었고, 그것을 실행해야지 마음먹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점점 현실적인 부분에 관한 걱정과, 이어질 후폭풍에 관한 부담감,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눈치를 보게 되고... 결국엔 실행할 용기가 없어져  ‘이번에도 이렇게 지나가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의 돌발성이 게으름을 이긴 것 같다.



2. 어떤 생각.

 최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주변 지인들을 만나 술 한잔 걸치다 보면 으레 하는 시대에 관한 한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한 한탄을 하다가, 결국에는 우리 개인의 일들에 관한 고민들까지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 스스로 주관을 가지고 개인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정도의 결론이 났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화두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3. 어떻게 살아야 할까?

 2020년 현재 36세. 삶의 형태와 자세에 관한 고민을 지금 하는 게 너무 늦은 것일까? 내 삶의 가치와 방향을 이제는 확고하게 정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 인생을 너무 흘러가는 대로만 살아왔던 것 같다. 누구나 생각하는 인생의 과업들을 달성하는 데에만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어떻게 고민하여 정할지 보다) 어떻게 해야 남들보다 빨리, 남들보다 우위에서 해낼지 관심을 두었다. 코스와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게임을 하는 것만 같았다.


초중고 학창 시절에는 시험성적과 수능의 결과에

대학시절엔 임용고시 합격이라는 목표에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는 결혼, 내 집 마련, 출산에

이제 곧 아이를 낳고 나면 그 아이의 성공적인 과업 달성을 도와주기 위해서.

교사가 되었으니 교감, 교장으로 승진하는 것 만이 나의 과업이 되는 것인가?


개인으로서, 인격체로서 생각했을 때 이런 인생살이가 허무하게 느껴진다. 거대한 물줄기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나무토막 같은 인생이라면 먼 훗날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지만, 자그마한 키 하나 잡고 미약한 발버둥 정도는 쳐 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4.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제껏 교직에 있는 동료들과 미래에 관하여 논할 때 으레 ‘승진에는 관심 없다.’라고 말했었다. 뭔가 승진에 목매달고 있는 사람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쿨하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승진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안일한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승진에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싫으면서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찾아 나설 속물 같은 근성.

세속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보이기는 싫어서 고고한 척을 하고,

지역에 있는 벽지학교에 들어가려고 아등바등 대는 것은 싫어하면서도, 또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안일함.

인사이동 시즌에 농어촌에 근무할 여건이 되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겠지...

이게 딱 지금의 나다. 자기 합리화를 걷어내고 살펴보니 분명 뭔가 잘못되었다.


5. 현실과 이상

 현실과 이상은 수없이 충돌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립 상황에서 최종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쟁점이기도 하다.

‘그 말은 알겠는데, 현실적으로 힘들잖아.’

‘그 말은 알겠는데, 이상적으로는 이게 맞잖아.’

누군가의 의견 차이를 결국 좁히지 못하는 부분인 것이다.


 도교육청에서 2019 성과급에 관한 설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그 설문지의 말미에 ‘성과급에 관한 의견’을 달라는 주관식 문항이 있었는데, 당시 좀 흥분했는지 성과급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a4용지 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장황한 글을 달아 답변했던 적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이상적으로는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했다.


 교사의 업무나 태도를 평가하여 순위를 매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의 시스템과 평가방식은 그것을 객관적으로 가릴 수 없다. 지금의 시스템은 교사의 모든 부분 중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 중의 ‘일부분’을 평가한다. 결국 그 시스템은 ‘객관적으로’ 평가가 가능한 ‘일부분’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심게 되고, 그 일부분에만 치중하는 누군가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평가가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평가도 모든 분야를 포함할 수는 없고, 또 모든 평가가 객관적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사실 이 세상의 모든 평가들은 결국 ‘객관적’ 일 수 있는’일부분’을 평가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그 평가기준에 맞추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우리 세계(교직사회)의 흔한 예로 ‘직무연수’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교육청에서 정한 틀에 맞추어야만 직무연수로 인정을 받는다.(그게 어떤 효용성을 지니는지는 몰라도) 개인이 사설로 수강하는 여러 기능들은 연수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원격연수로 잠깐 그 내용을 듣는 사람들과 개인이 시간을 내어 기능과 지식을 배우는 것 중 우리의 역량을 실제로 키우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라이프가드 자격증을 지니고 있는데, 교육청에서 지시하는 3년에 한 번 꼭 이수해야 하는 안전교육 연수를 아직 이수하지 못했다. 안전교육 연수를 이수하면 나보다 전문성이 있는 걸까? 아니다. 전문성은 문제가 아니다. 원격연수 화면을 멀뚱히 틀어두며 연수를 이수하면 실적이 된다. 이것이 현실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정한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수능을 치러서 교육대학교에 입학하고, 교육과정을 이수하여 학사 학위를 따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정교사 자격증을 따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정한 평가 기준이다. 이를 충족하면 선생님이 되는 것이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선생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이 확실히 일정 수준 이상의 효율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100% 정확하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위의 모든 조건을 갖춘 초등교사가, 어떤 시민A 보다 교사로서의 역량과 자질을 잘 갖추고 있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교직의 승진 시스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승진 시스템은, 여러 가지 조건들에 점수를 매겨서 점수를 쌓아가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쌓인 점수의 우선순위로 승진 여부를 결정한다. 그렇게 높은 점수를 쌓은 승진자들이 그렇지 않은 교사들과 비교하여 교사로서의 역량이 높다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은 높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다. 높은 점수를 쌓아서 승진한 승진자들보다 훨씬 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교사 A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6. 리스크

 현실과 이상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나는 솔직히 대범한 척하는 쫄보라 마냥 이상을 추구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서 학창 시절 나름 착실하게 공부하고 모범생으로 지내면서 교단에 까지 잘 흘러들어 왔겠지. 현실의 장벽은 높다.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좇을 수는 없는 거다.


 다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그리고 삶에 낭만이 있으려면 적당한 이상을 추구하는 게 조금은 더 맞지 않을까?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수능을 앞두고 있는 고3 수험생들에게 ‘수능에 매달리지 말고 네 꿈을 향해 달려라.’라는 말은 못 해도. 작년에 근무했던 선생님들에게 ‘불합리한 성과급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고 성과급을 재분배하여 1/N 하실 분 모집합니다.’ 정도의 이야기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실과 이상중 선택하는 결정은 결국 리스크에 의해 결정된다. 리스크가 크면 현실에 수긍하는 것이고, 리스크가 적으면 낭만적으로 이상에 한표 던지는 것이다. 물줄기가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던 것 같다는 이제까지 나의 인생 과업은,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큰 리스크를 지니고 있어서 낭만적으로 이상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던 것이다.


7.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의 프레임은 이렇다.

승진하려는 사람 = 열심히 사는 사람

승진을 포기하는 사람 = 능력 없는 사람 or 한량

보통 누군가의 승진에 관한 논의에서 ‘나중에 네 후배가 네가 근무하는 학교 교장으로 왔다고 생각해봐.’라는 예시는 빠지지 않는다. 굉장히 모양 빠지는 일이라고 여겨졌나 보다.


 ‘높은 점수를 쌓아 승진한 사람들보다 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교사 A는 분명히 존재한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본다. 반례를 들어 그 과정을 폄하하고 시스템을 부정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냥 나 스스로 그 반례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부조리의 고리는 누군가 끊어주어야 한다.(물론 이게 부조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 끊지 않으면 ‘원래 이렇게 했어.’라는 말에 대응할 수 없다.


 승진은 선택이다. 그렇기에 리스크가 적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현실적’이라는 핑계를 물리칠 수 있다. 나는 ‘승진하지 않음’을 선택하려 한다. '승진의 포기'와 ‘승진하지 않음의 선택'은 다르다. 승진의 포기가 교직에서의 에너지를 줄이고 다른 무언가에 쏟는 에너지를 높이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한다면, ‘승진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것은 교직에서의 에너지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오히려 승진에는 필요하지만 실제로는 의미가 없는 것들에 쏟는 에너지를 남길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제부터 나는 교사 A가 되기 위한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판단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의미가 있다. 나에게는. 내가 교사 A가 될 테니까.

-누구에게 인정받을 수 있냐고?

인정받을 수 없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주관적인 판단 기준이니까.

-그렇다면 역시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의미 있다. 나에게는. 스스로 자존감을 지킬 테니까.



8. 결론

 서두에 언급했던 '머릿속에 떠올랐던 어떤 생각'은 바로 위와 같은 이야기를 정리하고, 정리한 내용을 내가 닿을 수 있는 교직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보내고, 그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직을 바라보는 태도를 화시키겠다는 원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아이디어에서 완벽하지 못한  부분,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걱정, 이어질 후폭풍에 관한 부담감등에 생각대로 실행하지는 못했다.(무엇보다 철저한 무관심이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대신 위의 글을 주변 3~4명의 지인에게 공유하고 작은 학습모임을 하나 만든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결론적으로는, 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정리하고 작게나마 공유를 하고 난 이후, 나의 삶의 태도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우선, 내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철학이 조금은 견고 해졌고, 가장 친한 지인들과 단순한 잡담이 아닌 심도 있는 교육적인 토론이 가능한 모임을 만들었으며, 잡념들을 글로 정리하여 더 이상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다.


36세. 충분히 늦었지만, 지금부터의 인생은 미약한 발버둥과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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