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단양 여행기 둘째 날.
여행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여행에서 얻게 되는 교훈이 아무리 지혜로울지라도, 여행에서 마주치는 즐거움이 아무리 클지라도, 만약 그 여정이 스스로에게 가혹할 정도로 힘겨운 여정이라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고행길에 불과하다. 우리가 수도승도 아닐진대, 꼭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힘겨운 여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름다운 풍경을 조금 덜 보더라도, 지혜로운 교훈을 좀 덜 얻더라도, 커다란 즐거움을 조금 놓치더라도, 고요하고 편안한 휴식이 여행에는 꼭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쩌면 '숙소'일지도 모른다.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곳, 어쩌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 그렇기 때문에 여행 전부터 숙소만큼은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고르고 골라낸다. 숙소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깔끔함'과 '편안함'. 깔끔함은 위생관념이 철저하고 피부가 민감한 홍귤을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다. 그리고 편안함은 타지에서는 쉽게 잠이 들지 못하는 홍귤을 위해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다. 그 밖에 조금 더 고려하는 사항이라면, '감각적인 인테리어' 정도인데, 이것은 감성적인 홍귤을 위한 요소이다. (이름이 홍귤뿐인 것은 오타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숙소는 합격점 이상. 처음에는 너무 낡은 외관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너무 놀라서인지 오히려 깔끔한 내부가 훨씬 더 좋게 느껴졌다. 특히 외벽이 통창으로 이루어진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사진에는 잘 담기지 않았지만, 탁 트인 시야로 산과 논밭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유리창 방향으로는 고층건물이 전혀 없어서 굳이 커튼을 치지 않아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점 역시 마음에 들었다. 아침에는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모습을 자리에 누운 채로 즐길 수도 있다.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 여행을 가게 되면 가장 많이 싸우게 되는 곳이 바로 숙소라고 한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이제 마음이 좀 풀어지는 곳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생활습관이나 집에서만 드러나는 성격등이 발견되며 서로에게 실망하거나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다행히도 홍귤과 나는 그런 측면에서는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두 사람 다 워낙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넓은 편이기도 하고, 다름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성격들이라서 더욱 그러기도 하다. 유일한 트러블이라면, 마냥 편안하게 쉬고 싶은 홍귤에게, 심심한 내가 자꾸 장난을 치는 바람에 홍귤이 조금 더 피곤해졌다는 것 정도? 아마 홍귤이 이 부분을 읽고 나면 '조금???'이라며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첫째 날 오후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새벽에 한 차례 더 내리더니 아침에는 밤새 내렸던 흔적만 남긴 채 깔끔하게 떠나버렸다. 덕분에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맑았으며, 둘째 날의 여정을 출발하는 우리의 발걸음도 한층 더 상쾌해졌다.
사실 둘째 날의 일정계획은 예쁜 카페에 가는 것 하나뿐이다. 카페에서 여유롭게 보낼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기도 하고, 대전까지 복귀에도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별 다른 일정을 잡지는 않았다. 그 정도면 우리에게는 충분한 스케줄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느 카페에 갈 것인지를 선정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여행지를 고르거나, 숙소나 식당을 선정하는 것 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바로 카페를 고르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나 때문인데, 대부분의 선택에 있어서 큰 호불호가 없는 사람이지만 카페만큼은 꺼려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여행지, 숙소, 식당, 서점등은 철저하게 홍귤의 취향에 맞추어져서 선택되는데 그건 홍귤이 독불장군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별다른 호불호가 없기 때문에 홍귤이 오히려 선택하는 수고를 감내하는 것에 가깝다. 다만 카페만큼은 나의 호불호가 있고 홍귤의 호불호도 있기 때문에 양쪽을 충족하는 카페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나의 경우에는 소음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특히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매우 취약한 편인데, 그렇다 보니 카페의 형태나 구조를 매우 신경 쓴다. 홍귤이 의외로 여기던 부분인데, 사실 사람이 많고 적은 것은 소음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조금 더 중요한 요소는 층고가 얼마나 높은지 그리고 구조적으로 소음이 얼마나 잘 분산되는지이다. 그 외에는 테이블 간 배치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정도.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층고가 높아 소리가 잘 분산되고 테이블 간 간격이 꽤 넓은 곳은 크게 힘들지 않지만, 사람이 얼마 없어도 소리가 울리는 곳에서는 순식간에 체력이 방전되어 버린다.
반대로 홍귤의 경우 의자와 테이블의 형태가 가장 중요하다. 허리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의자가 편안하지 않으면 오래 있지 못하기도 하고, 주로 책을 읽거나 타자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 우리 두 사람인지라 테이블 또한 충분히 넓은 것이 좋은 편이다. 그 외에도 커피의 맛이나 감각적인 인테리어 또한 홍귤에게는 고려 요소로 작용하는 듯하다.
까다로운 두 사람의 기대를 잔뜩 담은 카페를 향해서, 하늘 높이 오르기 시작한다.
남한강을 지나 한참을 산을 타고 올라가서야 도착한 곳은 '카페 산'.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는 문구가 정말 잘 어울릴 정도로 예쁜 풍경이 함께하는 곳이었다.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팔을 뻗으면 날아갈 것만 같은 곳이었다. 구름마저도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내려앉아 마치 머리 위에 드리운 파라솔 같이 예쁘게 펼쳐져서, 하늘 위의 정원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날아갈 듯한 풍경을 감상하던 그때, 옆으로 정말 누군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형형 색색의 캐노피가 펼쳐져서 꽃잎처럼 산 아래로 흩날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단양에서도 유명한 패러글라이딩 명소. 그냥 산 위의 예쁜 카페만 상상하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패러글라이딩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익스트림한 스포츠를 좋아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패러글라이딩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었고, 홍귤은 겁도 많고 익스트림 스포츠를 싫어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패러글라이딩이 버킷리스트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 앞에 마치 운명처럼 나타난 패러글라이딩 명소. 심지어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오고 흐렸던 날씨가 오늘은 화창하니 맑기만 하다. 이것은 운명이 우리를 패러글라이딩으로 이끄는 것일까?
준비를 하나도 안 하고 오는 바람에 촬영장비등이 없어서 아쉬워하던 차에, 촬영까지도 모두 지원해 준다는 말에 덜컥 질러버린 홍귤의 플렉스. 두 사람 몫의 거금을 쿨하게 결제해 버리고는 두근두근 설레는 표정으로 슈트를 입으러 간다
극도로 계획형인 두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렇게 즉흥적인 돌발 행동을 할 때 가장 신이 난다. 처음 하는 경험에 두 사람 다 떨림 반 설렘 반으로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탁 트인 비행장 위에 서서 바라보는 하늘은 훨씬 더 푸르고 아름다웠다. 이제 저 하늘 위로 뛰어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세상을 살아가며 하늘 위로 뛰어오르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그 어떤 기계에도 의존하지 않고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하늘을 마주하다니.
다시 한번 안전 교육을 받고, 안전 장비를 착용하고, 강사님의 구령에 맞추어 힘차게 발을 구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바람의 저항을 받느라 아무리 앞으로 뛰쳐나가려 해도 발이 나아가지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발은 허공으로 뜨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패러글라이딩은 엄밀히 말하자면 천천히 낙하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서 바라볼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하늘 위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당사자들에게는 그것은 도약이고, 비행이며, 감동이다. 하늘을 활공하며 바라본 풍경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시야였다. 위에서 바라본 산과 강은 생각했던 것만큼 작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가까워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시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감동이 너무 컸던 것일까. 나는 환호를 지르는 것도 잊어버리고 정말 나지막한 감탄만 내지며 넋을 놓고 풍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런저런 촬영을 해주시던 강사님 마저도 잠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실 정도로 말이다.
진정한 발견의 항해는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
- 마르셀 프루스트
홍귤은 원래는 여행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긴 했지만, 사실 여행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런 우리가 지금은 정말 '여행'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 함께하기에 더 즐거운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럼에도 착실하게 여행의 의미를 쌓아가고 있다.
새로운 곳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 그곳의 멋진 경험이 아니다. 그곳에 있는 나 자신을 보아야 한다. 새로운 곳에서 하게 되는 새로운 생각들, 새로운 경험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시각들. 그리고 그것을 함께 이야기하고 더 깊이 나눌 수 있는 마음과 말이 통하는 멋진 사람과 함께라면, 그 여행이야 말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