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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이나 Mar 22. 2019

세계는 자살하지 말라고 한다.

자살론자의 일기

"죽고 싶다."

늘상 하는 말이지만 진심이다.


죽고 싶다고 말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관심 없거나, 나약하다고 비난하거나, 아니면 걱정하거나 이 셋밖에 없다. (죽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손에 꼽는데, 그들 역시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면 그건 당신의 행운인 것이고, 보통은 나약하다고 비난하는 무리가 많다. “너 그렇게 말은 하지만 자살시도도 안 하잖아? 말만 그러는 것 아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타인의 시선 같은 게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죽고 싶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이를 바라보는 눈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관심받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질문도 받았다. 세상은 자살론자를 돌아봐주고 동정해줄 만큼 여유롭지 않다. 생명의 전화가 쓸모없는 것만큼이나, 마포대교에 설치된 자살방지 난간만큼이나. 관심이 받고 싶다면 시내에서 엽기 행각을 벌이는 쪽이 빠를 것이다.


자해를 하면 일시적으로 기분이 나아진다고 한다. 자해의 경우 자신이 가해자이자 피해자인데, 일시적인 폭력 행사를 통한 분노 발산 효과도 있고, 상해를 입은 경우 신체 기관이 부정적 상태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러 엔도르핀과 같은 긍정 호르몬을 방출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딱히 신체나 자아를 상처 입히고 싶은 것도, 일시적으로 우울감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자해 역시 딱히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없기도 하고 말이다. 도피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정답일 것이다. 사람은 왜 살아야만 하는가 왜 살아서 고통받아야만 하는가 따위의 생의 근본에 대한 고찰을 시작으로 되짚어가며 생각해보면 딱히 죽지 않을 이유도 없다. 삶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살아있기 위하여 살아있다. 살아있을 책임과 의무를 갖고. 그리고 자살은 그것들로부터의 도피다.


인생은 남이 살아줄 수 없는 것이기에 굴레는 끝나지 않는다. 남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물리적으로 타인이 대신 숨을 쉬어줄 수조차도 없잖은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말을 한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오늘 하루 뇌에 힘줘서 버텨 생명을 연장해 나가는 꼴이다. 결국 살아있음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만 한다. 안다. 그러니 그만 끝내고 싶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실질적으로 쓸만한 복지도 없이 일단 5만 원 줄 테니 일단 애를 낳으라는 국가 복지 정책이랑 뭐가 다른가?


이렇게 말하면 꼭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해봐!"라는 말을 듣는다. 물론 지금도 그들이 무척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내 삶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꼭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가령 내가 차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게 내가 죽지 않을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올 때 빈 손이었고 갈 때 빈 손인 게 당연하듯, 살아있을 이유도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 열정이나 이데아, 반짝임, 사랑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 외의 요소는 외부의 것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있을 이유가 되질 않기 때문에 결국 원점이다.


철학자 칸트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자살을 택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감동적인 말이긴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자기 책임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다. 이건 그런 문제다.


세계가 자살 욕구는 정신병이라고, 정상 외의 것으로 분류하는 건 자명한 사실이고, 나는 그게 지긋지긋하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도움을 바라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어려운 문제다. 원하는 실질적인 도움은 안전한 자살 방법인데 일단 상대방 입장에선 죽음을 피하는 결과로만 끌고 가려하기 때문이다. 왜 죽고 싶어 하는지 납득시키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그래서 이번 단락에서는 왜 죽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삶이 늘 행복할 수는 없지요."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어쩌다 가끔 있는 행복에 기대어 살아가고, 아니 그 인생 매일매일에 굴러다니는 행복들을 나서서 주워 다녀야 하고 자신의 정원을 가꾸며 소중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로 불행하고 힘들고 슬프고 무감한 것들 투성이로, 하여튼 그런 사건과 감정들이 수시로 왔다가 간다.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나는 이 파도가 소금이 들어있든 물로 이루어져 있든 이미 그런 차원이 중요한 게 아니다. 파도가 왜 민물이 아니냐고 왜 쓸려 나가냐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는 파도가 없었으면 좋겠다. 말 그대로 null의 상태로. 다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태어났고, 아직 살아있으며 1로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0이 되는 수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0이 된 이후, 그 직후보다 조금 더 먼 미래엔 존재가 희미해지고 거의 null과 같아질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에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최근 <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라는 발뮤다 창업자인 테라오 겐의 책이 발행됐다. 그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인생에 안정을 갖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어린아이의 떼쓰는 것과 같다)는 내용이 있었다. 인생은 불안정의 연속이고, 직업과 같은 위치나 상태만으로는 가질 수 없다고. 그러니 불안정함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뭐 그런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걸 보고 새삼스럽게 그러한 불안정함을 알고 있어도 받아들이는 태도는 사람마다 현저하게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은 불안정하다. 반면 죽음은 평온하지. 그렇기에 평온을 되찾고 싶다, 아직 태어나기 이전으로.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굳이 그 서사를 전개하지 않고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은 것뿐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그럼 왜 아직 안 죽은 건데?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아니다. 죽고 싶어 본 적 없는 사람들만 그런 질문을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죽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뾰족한 방법이 없다. 죽음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도통 쉽게 고통 없이 갈 수 있는 방법이란 게 별로 없다. 문학 작품에선 허구한 날 인간은 약해 빠졌다고 너무 쉽게 죽는다고 좌절하지만, 생각보다 목숨은 질기고 그렇다고 또 물리적으로 고통스럽고 싶은 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 살아있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아픈 것도 고통스럽긴 매한가지고, 대체로 후자의 고통이 좀 더 피부로 와 닿으니 저울질 끝에 죽음을 미루는 거다. 하지만 언젠가는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앞서 말했듯 세계는 자살 욕구를 비정상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불치병이라도 걸린 게 아니고서야 존엄사를 택하기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국가와 사회 입장에서는 쓸만한 경제인구가 자살하는 손실을 막고 싶은 게 당연하니, 사지 멀쩡한 이가 죽겠다고 하면 들어주지 않을 것은 뻔하다. 그러니 방법이 별로 없다. 하는 수 없이 연탄가스에 의지하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달거나 하는 수단밖에 남지 않는다.(날붙이에 살이 찢겨나가는 것보다는 나아 보이지 않은가!) 그러니 나머지는 충동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죽고 싶지 않기는 자살 사고자도 매한가지지만 딱히 방법이 없어서지, 좀 더 쉽고 안전하게 죽을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수면제가 과거에 비해 코팅이 두꺼워진 이유가 뭐겠는가.


스스로를 연소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 도망치는 거라고 야유받는대도 상관없다.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

이것의 어디가 비정상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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