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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이나 Jan 07. 2019

나를 나로 있게 하다. 담다.

인생 속의 남과 나를 보는 곳.


 사실 나는 삶이 불안하다고 느끼면 가는 곳이 있다. 선릉역 근처에 있는 찻집 담다이다. 능을 마주하고 있는 이 찻집은 커다란 창문 밖 사계절의 풍경이 늘 다르다. 허나 시간의 흐름이 무색하게 이곳은 늘 한결같다. 으레 하는 상투적인 홍보성 멘트가 아니라, 나무에 잎이 돋아나고 녹음이 지고 낙엽이 떨어져 가지가 앙상한대도 그것이 나무인 건 변함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한결같다. 사람은 계속 변하니까 모든 것이 늘 그대로일 수는 없겠지만 본질은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언제나 그곳에 뿌리를 깊게 박고 있다.



보이차를 주로, 기억이 맞다면 아마 보이생차만 취급한다. 메뉴판에는 보이생차와 몇 가지 오룡차, 암차, 그리고 홍차가 있다. 이곳의 전홍은 맛이 밸런스 있고 내포성이 좋아 균일하고 길게 나와 방문하는 이에게 꼭 한번 권한다. 어지간히 홍차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무난하게 모두의 입맛에 괜찮다는 평가를 받고는 한다. 전에 마신 대홍포도 견과류를 짓이겨 착유한 듯 고소함을 정수로 한 맛이 참 좋았었다. 이곳의 차는 대체로 좋다. 달리 붙일 말이 없다. 크게 나쁠 것이 전혀 없다만 호들갑을 떨만한 것도 없다. 하지만 대체로 좋다. 과한 것도 부족한 것도 없이 항상 어느 정도로 차 있는 안정적인 유수를 바라보듯, 그 한결같은 묵묵한 무게감은 묘한 매력을 가졌다.


나이를 막론하고 부귀와 상관없이 어떠한 계급이나 허례허식 없이 사람끼리 사람으로 만나는 공간이란 게 참 흔치가 않다. 한국인은 어떤 식으로든 유교 사상에서 아주 벗어날 수 없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가시적이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에 상하 우열을 가리고, 그에 맞춰 눈치껏 행동하는 게 이 사회의 보통이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연식이 있는 중년 남성은 사회 특수성에 의해서 자연스레 상대적 권력(나이라든가)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행사하지 않는다. 흔치 않은데, 담다는 그런 곳이다. 대신 헛헛하게 웃으면서 말씀하신다. "저도 인생은 처음이라서요."


흔들리지 않는 삶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정말로 알고 있지만, 자신도 계속해서 흔들린다는 자기 고백을 어떠한 자조를 섞지 않고 덤덤히 드러낸다는 건, 쉽지 않은 건 당연지사고 먼저 하기는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일순 내 안의 무언가를 내려놓는다는 게 누가 더 쉽다고 할 일은 아니긴 하다만,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가질 수 있을 기회와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뭔가를 가질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앞으로도 많을 것이란 보장이 없기 때문에. 뱉는 말에 도리어 목이 엉겨 막힌다. 바람에 흔들리는 요란한 억새밭을 거슬러 올라가는 건 혼자가 아니었다고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한다고 그렇지만 그런 게 인생이라고, 종내에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 때 차 한 잔이나 털어 마신다. 그때에 차는 달다.


"괜찮아질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말 끝은 분명 그러할 것이었다. 그렇다. 서로의 자세한 상황도 잘 모른 채로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별한 의미도, 현실성도 없는 긍정과 희망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데서 역설적으로 위로를 받는다. 그 무던한 들풀 같은 말 한마디. 삶 속에 타인과 나라는 개별적 존재가 갖는 거리감과 객체로서 나누는 교류의 소중함은 이런 식으로 발견된다.

 


실은 그다지 자주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사장님과 각별한 사이인 것도 아니다. 아주 깊은 속 얘기를 한 적도 없다. 뭘 특별히 잘해주신 것도 아니고,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 비슷한 것도 해주신 바가 일절 없다. 일 년에 서너 번 가서 별고 없으셨습니까 하는 인사나 나눌 뿐이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서로가 그다지 각별하지 않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가깝거나 소중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들. 사람과 나를 둘러싼 페르소나 따위를 지고 있다가, 이곳은 그걸 내려놓고 나로 있게 한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그냥 딱 그 정도의 안전거리를 담다는 아주 편안하게 재어준다.

이 문 밖을 나가면 모든 것이 그대로일 것이다.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을 테고, 상황이 더 좋아지리란 보장도 없다. 뾰족한 수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긴 내가 나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지금 어떤 흐름을 타고 있고, 어떤 얼굴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그래도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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