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유명한 모 정치인이 고 어슐러 르 귄의 단편 소설 '오멜라스를 떠는 사람들'을 인용해서 화제가 됐다. 또 다른 유명 정치인이 뉴로맨서의 저자인 윌리엄 깁슨이 했다고 알려진 명언을 인용해서 세상이 떠들썩했던 것이 떠오른다. 사실 정치인이라면 문학에 어느 정도 조예가 깊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교수신문에서 허구헌날 올해의 사자성어 이런 고리타분한 한문학만 다룰 정도로 보수적인 풍토가 강하다. 심지어 최근에는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의 대표작 '채식주의자'가 성적 표현을 이유로 청소년들이 봐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한 학부모 단체로부터 나올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가장 앞서가는 문학 경향 중 하나인 SF의 그랜드마스터가 쓴 작품을 인용했다고 한다면, 비록 그것이 1970년대에 쓰여졌고 출처를 밝히지 않은 다분히 아는 척일 가능성이 높지만 해당 정치인과 정당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품위있는 일이다.
사실 나는 오래전에 모 정치인을 직접 만난 일이 있다. 그는 당시 검사로서 오랫동안 일해오며 다소 지쳐 있었고 나는 기자로서 처음 검찰에 출입을 한 상태였다. 그는 공보 업무가 아니었지만 매일같이 검찰청을 왔다갔다 하는 신입 기자들에게 아는 척을 해주었고 가끔은 자신이 맡지는 않지만 사소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대머리가 아니라거나 가슴뽕을 착용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그도 나름 매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하루는 그와 믹스커피를 같이 마시고 있는데 선배 기자가 지나가면서 해당 모 정치인에게, 당시에는 검사였지만 기자랑 너무 친하게 지내면 동티난다라고 한마디 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모 정치인은 금세 정색하며 우리는 단지 커피를 나눠 마셨을 뿐 작당을 한 것이 아니라고 대꾸했다. 선배 기자는 머쓱해서 지나갔지만 나는 그가 강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후에는 어떤 일을 할지 모르지만 뭔가 하기는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시 어슐러 르 귄의 에세이들을 읽고 있었다. 모 정치인은 내가 가방에 넣고 다니는 책을 보더니 그 작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르 귄에 대한 몇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 후 나는 검찰청 출입에서 국회 출입으로 출입처가 바뀌면서 해당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는 잊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신문을 보니 모 정치인이 르 귄을 인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지만, 어쩌면 그 정치인에게도 르 귄을 소개해줄 만한 친한 기자 정도는 하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기자는 항상 출입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기를 원하고 그러다 보면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되기 마련이다.
르 귄의 에세이는 국내에도 몇 권이 번역돼 나와 있는데 하나같이 진도가 잘 안나가는 지루한 내용이다. 혹시라도 르 귄을 읽어볼 생각이 있다면 어스시 시리즈부터 시작하는 게 나을 것이다. 르 귄은 너무 오래 살았고 생전에는 필립 K. 딕을 집에 들여보내지 못할 사람이라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필립 K. 딕은 이상한 사람이 맞고 살아있을 때 스타니스와프렘을 CIA 첩자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르 귄 보다는 더 재미있는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필립 K. 딕은 죽기 전에 한 문학 축제에 초대돼 연설을 하게 됐는데 이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세계로 가보라는 정신나간 이야기를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항상 다른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데 그건 마치 유튜브에 많이 올라가 있는 지금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면 어쩌지?라는 헛소리와 통하는 데가 있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시뮬레이션 속에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걸 알 방법은 없고 빠져나갈 방법도 없다. 결국 우리가 시뮬레이션에 살고 있든 아니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다시 르 귄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시뮬레이션 우주론까지 왔더니 돌아갈 힘을 잃어버렸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세계로 가보는 걸 권하고 싶다. 이 우주가 아닌 다른 우주에서는 오멜라스 지하에 갇힌 어린아이도 풀려날지도 모른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