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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구씨 Mar 13. 2019

뿌리

 다리 없는 물체가 서 있을 수 없듯 뿌리 없는 존재자도 서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뿌리에서 가지를 뻗어 저마다 다른 향의 꽃을 피워보려고 발버둥 치며 산다. 내가 나인 이유를 찾기 위해. 살아있음을 체감하기 위해.

 그래서 언젠가는 나와 너를 끔찍하게 분리시켜놓기도 해 보고, 어떤 때에는 무리에 나를 억지로 욱여넣어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상처 입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그들이 될 수가 없다. 그들도 내가 될 수 없다.

 도시를 거닐면 나와 닮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사람'들이다. '사람'이라는 말은 마치 나와 저 자들 간의 거리를, 나만의 사적인 공간을 지워버리는 것 같다. '사람'이라는 말에는 내가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내가 들어있지 않은 단어들에게 둘러싸인 채 살아왔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어디의 학생', '어디의 직원', '갑의 딸', '을의 아들'... 그런 것들 안에 내가 들어있던 적이 있었나, 하고 되물어보게 된다. 그러면 문득 나는 어딘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떠남이란 미봉책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찾으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세상은 부유하고, 각자 저마다의 행복을 소비하고 있다. 어쩜 내가 이렇게 아픈 이유는 구매력의 부족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럴 때 우리는 더 열심히 벌어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소비는 미봉책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마치 이것은 패닉 같다. 나의, 존재론적인 패닉.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허공에서, 구멍 뚫린 우주선을 몸뚱이 하나로 막아내고 있는 느낌이다. 정신을 놓으면 모든 것이 바깥으로 빨려나갈 것 같아, 나는 필사적으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지켜내려고 한다. 탈진해버릴 것 같지만 버텨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단 한 번도 탈진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니 내가 가여워지기 시작한다. 나에게 숨 쉴 여유라도 주고 싶다. 나도 사랑이란 것을 받고 싶다. 부모님의 우산 아래가 문득 그리워지지만, 이미 나는 너무 멀리 걸어와버렸다. 그래서 대신 나는 미디어를, 나를 '힐링'시켜주는 것들을 소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힐링 상품'은 내 내면을 봐주지 않는다. 내 지친 육신만을 돌보아줄 뿐이다. 고맙지만 부족하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지점에서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책망한다. "강해져야 해. 왜 나는 더 강해지지 못하는 거지?" 어떤 사람은 세계를 책망한다. "왜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지? 왜 아무도 날 봐주지 않지?" 그렇지만 나에게도, 세계에게도 내 아픔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절규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만일 우리의 아픔이, 단지 '뿌리'를 오해한 데서 온 아픔일 뿐이란 걸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나, 내 사고방식이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나는 도시를 거닌다. 나와 닮은 수많은 사람들이 내 뺨을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나는 사람에서 자라 '내'가 되었다. 저들도 사람에서 자라 저마다의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에서 났지만, 여전히 사람은 사람이고 원숭이는 원숭이이듯이. 나와 '사람'들을 묶는 것은 오직 '사람'이라는 과거뿐이다. 문득 나는, 내가 처음부터 '뿌리' 위에 서 있었고, 또 단 한 번도 내가 아닌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내가 포함되지 않은 단어'들이 모두 내 발밑으로 몰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을의 아들', '갑의 딸'... 애초부터 그런 단어들 안에 내가 포함되어있을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 '밖'에, 그것도 내 발아래에 있을 뿐이니까. 내 걸음걸이를 받아주는 땅바닥에 불과했을 뿐이니까.

 우리는 우리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으로서 나를 설명해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나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 밖에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벚꽃은 벚나무의 일부일 뿐이지만, 분홍빛 만개한 벚나무를 보고 "벚꽃이다!"라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뿌리를 밟고 서 있는 내 모습, 내 생각, 내 행동, 내 선택... '벚꽃'이 바로 나다. 다른 무언가가 내가 될 수는 없다.


 ... 다리 없는 물체가 서 있을 수 없듯 뿌리 없는 존재자도 서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뿌리에서 가지를 뻗어 저마다 다른 향의 꽃을 피워보려고 발버둥 치며 산다. 내가 나인 이유를 찾기 위해. 살아있음을 체감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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