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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구씨 Apr 01. 2019

멋대로 쓰다 #4) 당신의 믿음이 '팩트'가 된다.

 옛날 한 마을에 양치기 소년이 살았다. 어느 날 아침, 소년은 ‘늑대가 나타났다’고 고함을 치며 마을 사람들을 깨웠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쫓아가 보니, 늑대는 없고 양들은 온순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소년이 답했다. “이 마을에 늑대가 오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늑대가 올 때를 대비하고 준비를 해야 할 게 아닙니까? 울타리를 높이 세우고, 용역을 불러 늑대들을 늘 감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늑대가 나타났다고 고함을 치고 다녔다. 사람들은 우리 마을에 늑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얼마 후 마을 입구에 늑대 조심 푯말이 등장했고, 신문 1면에 늑대의 위험성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이제 마을은 정부에서 지정한 늑대 출몰 구역이 되었다. 실제로 그 마을에 늑대가 나타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Clickbait’이라는 신조어를 아는가? 한 마디로, 클릭을 유도하는 낚시질을 일컫는다. ‘한 알만 먹어도 10kg 빠져… 충격’이라는 제목을 보고 제품 설명을 들으러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 당신은, ‘모 걸그룹 연예인 열애설… 충격’이라는 기사 제목에 마우스 좌클릭을 하고 있는 당신은, 이미 Clickbait 당한 것이다. 신기한 점은, 우리는 생각보다 우리 자신이 속는 것에 대해 많이 무감각하다는 점이다. 신문 광고 지면에 일반 기사와 완벽하게 똑같은 건강식품 광고가 실려도, 우리는 전혀 놀라워하지 않는다. 또 다른 광고 형태가 등장했겠거니, 하고 무신경하게 대처한다. 속는 것에 점점 둔감해지는 일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위험하다. 당신은, 이제 ‘상식’을 어지럽히는 거짓말들 사이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배우 백윤식이 연기한 이강희 조국일보 논설주간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던진다.

 

“기자회견 뒤에, 조간신문이나 봅시다. 내 말이 틀리는지 맞는지. 이 세상에서 누가 그의 말을 믿는지.”

 

 “내 말이 틀리는지 맞는지”는 “이 세상에서 누가 그의 말을 믿는지”로 결정된다는 얘기다. 극 중 이강희의 유명한 대사가 기억나는가? “어차피 대중은 개돼지입니다.” 그가 대중을 “개돼지”로 여긴 이유가 바로 저기에 있다. 이강희는 대한민국의 사실(fact)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쓴 글 한 줄에 여론이 요동치고, 진실이 거짓으로, 거짓이 진실로 둔갑해버린다. 왜냐하면, 그것을 세상 모두가 믿어주기 때문이다.

 

 ‘에이, 대형 언론사의 논설주간쯤은 됐으니까 말로 세상을 뒤집어 놓지.’ 정말로 그럴까? 2017년 8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국가정보원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유죄를 확정 선고받았다. 국가 기관에서 주도한 댓글 공작의 존재가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국가정보원이라는 강력한 국가 기관이 시민의 흉내나 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사람은 적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우리 모두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검색 포털 뉴스 기사의 댓글 몇 개만 읽고도, ‘여론은 이런 식이군’하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해버린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얘기했을 때, 정말로 ‘그렇구나’ 하고 믿어버린 자기 자신을.

 

 그런 자신을 깨달았다면, 이제 우리 일상을 구성하는 사실들이 얼마나 강력하고, 또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들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사실 위에 세워져 있지만, 사실은 현실 그대로의 세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은 ‘상식’에서 태어난다.

 

 사실이 상식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몇 가지 개념들을 살펴보자. 게이 터크만은 그의 저서 <메이킹 뉴스 : 현대사회와 현실의 재구성 연구>에서, 저널리스트들이 사실을 입증하는 의례적 방식을 ‘사실성의 망(the web of facticity)’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왜 사실은 사실성이요, 또 망인가? 예를 들어보자. A가 B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치자. 사회는 이에 대한 수많은 뉴스들을 생산할 것이다. ㄱ뉴스는 관할 경찰서가 이렇게 발표하더라 라며 기사를 보도하고, ㄴ뉴스는 한 전문가에게 물어봤더니 요즘 이런 범죄가 늘었다더라 라며 기사를 보도하고, ㄷ뉴스는 ㄱ뉴스가 이런 보도를 했더라 라며 기사를 보도하고, ㄹ뉴스는 지역 주민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도하고…이렇게 무한소급한다고 하자.


 우리는 저 수많은 뉴스들을 보면서 ‘음, A가 B를 죽였나보군’하고 그를 사실이라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A가 B를 살해하는 장면 그 자체에 대해, 즉 사건에 대한 실체적 사실에 대해 보고들은 적이 없다. 각 기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객관성을 전가하고 있다. 갑은 을에게 들었고, 을은 병에게 보고받았으며, 병은 사건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정을 인터뷰하고…무한소급하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들은 하나의 망을 이루어, ‘A가 B를 살해했다’는 사실 하나를 정당화한다. 넓게 짜여진 뉴스의 망이 사실을 ‘사실임 직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또한, 해당 사실이 사실이 됨으로써 저 수많은 뉴스들은 또한 사실이 된다. 이렇게 전체가 하나를, 다시 하나가 전체를 ‘사실임 직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사실(fact)은 곧 사실성(facticity)인 것이다.

 

 사실성이 곧 사실이라니, 재밌다. 또 재밌는 개념을 하나 알아보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 ‘언어 게임’이라는 말로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설명해내려 했다. 게임의 본질이 룰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플레이 방식에 있는 것처럼, 언어의 본질도 그 사용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언어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이야말로, 그 언어의 실제 의미다.

 

 어려운 개념이니까 예를 들어보자. 국가마다 정확하게 1kg의 무게를 가진 원통인 ‘국가 질량 원기’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실제 2015년 한국의 국가 질량 원기는, 2012년의 그것에 비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3년 사이에 아주 미세하게 마모되어버린 것이다. 즉, 2012년 한국의 실제 ‘1kg’과, 2015년 한국의 실제 ‘1kg’은 다르다. 이때 생각해보자. 당신이 2012년에 마트에서 ‘김치 1kg 주세요.’라고 얘기한 것과 2015년에 ‘김치 1kg 주세요’라고 얘기한 것은 과연 다른 말일까?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자문해보라, ‘1kg’이란 것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것은 그저 단어를 사용하는 당신과 마트 직원 사이의 대화 규칙일 뿐이다. 2015년의 당신은 직원에게, ‘죄송한데 올해는 대한민국의 1kg이 달라져서 이제 머리카락 한 올의 3분의 1만큼 김치를 덜 주셔야 해요’라고 클레임을 걸 수 있나? 그게 맞나? 당신과 마트 직원이 서로 실랑이하고 있는 ‘1kg’이란, 한국의 질량힘 연구소에 있는 국가 질량 원기의 무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마트 직원 사이에서 통용되는 상식적인 ‘1kg’이다. ‘이쯤이 1kg이야’라는 룰을 가지고 당신과 마트 직원은 대화라는 이름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일상 속 가장 사소한 대화에서조차도 이렇게 ‘상식’이 관여하고 있다. 그것을 헤게모니, 패러다임, 이데올로기, 라이프스타일, 어떤 단어로 표현해도 좋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너무 당연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잊어버리고 있다. 상식이란 결국 우리가 세우는 룰이고,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으며, 따라서 현실을 꼭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흔히 팩트체크, 팩트체크라고 얘기하면서 강조하는 그 ‘팩트’는, 실은 우리가 그것을 팩트로 ‘만든’ 것들에 불과하다.

 

 처음으로 돌아오자. 나는 가장 악질적인 거짓말이 상식을 흩트리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상식이 흔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제 그것은 세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사실이라는 아주 섬세하고 깨지기 쉬운 모래 입자 위에 세워져 있어서, 민감하게 다루지 않으면 금방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상식을 세우는 것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거짓말에 속는 것에 익숙해지고 둔감해지면, 바로 그만큼 우리 일상이 무너지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를 속이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당신이 속는 것은 더 이상 당신이 속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가 속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올바른 사실은 올바른 상식에서 나온다. 올바른 상식은,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개개인의 올바른 의지에서 나온다. 이는 어쩌면 당신이 민주시민인 이상 가져야 할 의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식이라는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으로서, 그것을 가장 세련된 형태로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글을 줄인다. 헌법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명시한다. 이것을 상징적인 문구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난 생각이 다르다. 실제로 모든 권력은 개인에게서 나온다. 당신 한 사람이 무엇을 사실이라 믿느냐는, 실제로 우리 사회의 사실들을 결정해낸다. 당신에 의해 결정된 사실들은, 정계가 다음 선거에서의 전략을 짜게 하고, 언론이 기사와 사설 등을 생산하게 하고, 증시에서 주가가 오르락내리락하게 한다. 바로 당신이 우리 사회의 권력을 창출해낸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겠는가? 각국의 정부가 유력 언론들을 통제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언론을 통제하려 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읽는 당신을 통제하려 한 것인가? 당신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책임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로잡을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이젠 깨달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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