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앞만 보고 달리던 내 삶에 행복을 누릴 자유를 주기
"언니는 이미 언니로서 온전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독일에서 잠시 한국에 들른 동생이 말했다. 자기 계발을 위해 항상 무언가를 채우고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했던 ‘나’였다. 동생은 곧이어 '손바닥에 움켜쥔 모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래를 움켜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힘을 준 만큼 손가락에 통증만 남는다는 것이다. 동생이 들려준 이야기처럼 정말 그랬다. 모래를 쥔 두 손을 가만히 모으고 있었다면 내 손에 고이 담겨있었을 모래를 나는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미인대회 수상 이후 줄곧 행사 일정이 가득했다. 화려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것도 나에게는 필요 이상의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사업이라는 꿈이 있지 않은가? 나의 마음을 돌보는 것보다 목표를 이루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어느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꽃병인줄 알고 덜컥 안아 들었으나 무거운 나무를 등에 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무게에 버거워지는 걸 알면서도 내려놓지 못했던 스스로 자처한 고통이었다.
20대에 출산으로 한순간에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학업, 사업 그리고 젊음. 많은 것을 하루아침에 내려놓았던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쁜 행사 일정 속에서도 그동안 들었던 강연과 수업들을 꾸준히 이어갔다. 쉬지 않고 모든 수업을 연이어 들었다. 마스터 ceo. 인스타. 블로그, 마케팅 유튜브, 릴스, NFT , 마케팅 최고경영자과정, 인스타 사진, DID, 인터널 코치, 마인드 파워, 미션인 커미션, 마인드 코치, 부동산 경매, 글쓰기 심화반, 등 정말 많은 것들을 내 안에 채웠다. 통장에 잔고가 늘어나는 기쁨처럼 내 안에 채움이 늘어날수록 20대에 못다 한 나를 완성시켜 가는 듯 뿌듯했다.
사실 내겐 미친 듯이 자기 계발을 한 이유가 있었다. 이른 결혼과 임신으로 20대에 이제 막 성장하던 무역 회사를 하루아침에 정리해야 했던 미련 때문이었다.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공백으로 남겨진 다음 페이지를 완성시키고 싶었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사업적으로 필요할 때 바로바로 꺼내 쓰기 위한 낭비하는 시간 없이 빨리 가기 위한 전략이랄까? 사업이라는 전장에 나가기 위해 비상식량을 비축하듯 나름의 철저한 준비를 해 나간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비상식량만으로 치러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 보면 전쟁준비를 비상식량으로만 대체하려 한 꼴이다.
화려함이 채워질수록 나는 너무 무거웠다. 내 안에 채워진 것들이 너무 많았다. 채워지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더 빨라지기보단 더뎌졌고, 드리워진 무게에 휘청거렸다. 수업을 듣느라 바빴던 내 하루는 잠시라도 쉬는 게 사치라고 느낄 만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때의 나는 열정으로 가득 찼었다. 많은 행사 일정 속에서도 다양한 수업을 수강하느라 내 하루하루는 전력질주였다고나 할까? 많은 일정 속에 시간을 쪼개가며 들었던 강의는 나에게 깊은 영향력과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렇게 지식과 정보를 채우는 것은 좋았으나, 문제는 정작 나 자신의 해야 할 일과 목표로 한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나는 엄마였다. 수업에서의 깨달음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사라지고,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가 나의 현실을 말해주었다. 밀려있는 빨래며 청소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가사 도우미도 더 이상 부르지 않았던 시기였다.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꿈꾸던 남편이 몇 년간 주 3일 출근을 하면서 아이들을 챙기며 살림을 함께 해줬지만, 아이들 셋 있는 집안이 늘 깨끗할 리 없었다. 나의 열정은 어수선한 집에 들어오자마자 현실과 마주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살고 싶은 모습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 속의 괴리감은 내가 어느 쪽에 서야 할지 헷갈리게 했다.
나를 채워갈수록 엄마의 역할이 방치되기 시작했다. 큰아이에게 집중해도 작은아이, 막내 아이에게 빈자리가 생기는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사치였을까? 많은 수업과 공부로 채워가는 시간은 오히려 미래에 해야 할 일들을 미리 가져와 지금 해야 할 일들을 놓치게 만들었다. 아이들을 챙기지 못해 생기는 죄책감은 커져만 갔다. 행사준비 하느라 정신이 없어 아이들 학교 선생님의 전화를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대표로 불가리아 세계대회에 출전하여 합숙하고 있을 때 큰아이 눈에 염증이 생겨 수술을 하였다. 한동안 눈에 통증과 붓기를 이따금씩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던 큰아이였다. 나는 바빴고 세계대회 이후 잘 챙기리라 마음먹었다. 고등학생인 큰아이는 엄마가 챙겨주지 못했음에도 투정은커녕 나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말 한마디 없이 혼자 가서 수술을 했던 것이다. 큰아이는 늘 그렇게 배려와 성숙함이 묻어난다. 그런 큰아이를 알기에 늘 부족한 엄마인 나는 미안함이 더 컸다.
내가 세계대회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며칠 후 큰아이 눈에 염증이 재발하였다. 수술했던 병원에 진료를 다녀온 큰아이는 대학병원 진료 의뢰서를 나에게 내밀었다. 조직검사가 필요하니 대학병원에서 수술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산병원에서 수술 후 조직검사를 하게 되었다. 수술실에서 나온 아이의 두 눈에는 거즈가 붙어 있었고, 아이는 앞을 볼 수 없었다. 하루 이틀간은 지혈을 위해 절대 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186cm의 키도 덩치도 나보다 큰 아이를 부축해 집으로 오는 길. 이미 세계대회의 영광은 꿈처럼 희미해졌다.
밤새 아들의 두 눈에 붙어 있던 하얀 거즈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너졌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나로 살겠다고 하는 걸까? 나로 살겠다고 엄마의 본분을 잊었던 미안함에 나는 아이 곁에 있고 싶었다.
"언니에게 1억을 빌려줄 사람이 누가 있어요?"
이어진 동생의 물음에 잠시 생각이 멈췄다.
일억... 백만 원도. 천만 원도 아닌. 일억...
...
" 남편? 우리 언니?"
가족들 외엔 떠오르는 사람이 딱히 없었다.
"바로 그 사람들과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제일 중요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냥 스쳐갈 시절인연이거나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에요. 결국 내가 힘들 때 정말 나에게 일억을 빌려줄 마음만큼 무조건적으로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중요해요 "
내게 일억을 빌려줄 사람들. 그동안 내가 늘 후 순위로 미뤄두었던 가장 소홀했던 사람들이었다. 함께 집 앞 한강공원 산책은커녕 언제부턴가 저녁은 배달로 대신하고 있었다. 한국에 오랜만에 나온 언니네 가족들과 함께 여유로운 식사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바빴고, 아이들에게 치킨조차 만들어 먹였던 나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작 조건 없이 1억을 빌려줄 사람들에게 나는 소홀했구나.
나는 무엇을 위해 바쁘게 살았던 거지? 주어진 환경 속에 많은 것들을 돌보지도 즐기지도 않고 방치하며 살았던 것이다. 즐기지 못한 채 초조하게 조급하게 앞만 보며 달렸던 내 삶에 경고등이 켜진 것 같았다. 알면서도 내려놓지 못해 외면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덜컥 겁이 났다. 경험, 기억, 감정, 생각이 만들어내는 소음 속에 평온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소음 속에 묻혀버린 고요함을 다시 찾아야 했다.
수많은 경험들이 얽히고 섞여 혼란스러움이 소용돌이치는 순간. 혼란스럽기만 한 감정과 경험을 넘어 온전함을 찾고 싶었다. 내가 얼마큼 잘 해낼 수 있는가에 집중하느라 생각과 마음을 통제하는 삶을 놓치고 있었다. 온전함은 내가 무엇을 이루어 냄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비워내고 내려놓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애써 무언가를 할수록 내면의 공허를 느낀다는 건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온전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미래의 시간을 당겨 쓰느라 오늘을 잃어버리는 삶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다 쓰는 것. 그게 잘 사는 것이다. 지금 내 손에는 새어나가지 않을 가장 소중한 것들이 올려져 있다. 더 이상 나는 모래를 담은 두 손을 움켜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