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힐레~울레리
일자 : 2018년 12월 8일 - 트레킹 1일차(2)
코스 : HILLE(1,430m) → ULLELI(1,960m)
거리 : 약 4.6km
시간 : 약 3시간 20분
이제 진짜 내 다리로 트레킹을 시작해야 할 때다. 약간의 긴장과 흥분한 기분이 나쁘지 않다. 놀이터 사장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팔이 90도보다 약간 내려갈 정도로 스틱 길이를 조정하고 스틱 끈을 팔목에 끼고 끈에 지탱한다는 느낌으로 스틱을 잡았다. 잘 부탁한다 스틱아, 이제 내 발이 되어주렴.
각자 장비를 체크하고 13시 50분 드디어 트레킹의 한 발을 내디딘다. 시작부터 계단들을 올라가야 한다. 씨얀이 20분만 올라가서 롯지에서 점심을 먹을 거라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내가 히말라야를 걷고 있다니 마냥 신기했다. 난생처음 보는 히말라야의 경치에, 네팔리들에, 네팔 소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하나하나 감탄하며 계단을 오르다 보니 점심 먹을 LAXMI 롯지에 도착했다. 씨얀이 이야기한 대로 정확하게 30분이 걸려 롯지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롯지에 쨍한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데 산과 어우러져서 롯지가 무척 예쁘게 보인다. 락스미는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인도의 부와 풍요의 여신 이름이다. 네팔리들은 락스미 여신이 집에 부와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고 한다. 네팔에 와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현지식이다. 음식 맛이 어떨지 몰라 가장 무난해 보이는 야채 볶음밥, 에그 볶음밥을 고르고 토마토 치즈 스파게티와 먹고 싶었던 모모를 주문했다. 모모는 커리가 들어있는 만두로 우리나라의 갈비만두가 한국식 만두라면 모모는 네팔식 만두다.
워낙 방콕에서 향신료를 많이 접해서인지 걱정과는 다르게 음식이 다 입맛에 잘 맞는다. 스파게티도 예상외로 맛이 있어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메뉴다. 가격대는 500~600루피 정도이다. 산의 아랫마을이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가격이 비싸다. 어쩌면 우리가 시설이 좋은 롯지에 와서 비쌀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나온 롯지에 비하면 깨끗하고 잘 정비된 롯지였다. 고소를 예방하려면 진저 티를 많이 마시라고 해서 우리는 거의 매끼 진저 티를 마셨다. 나는 진저 레몬티를 시켰는데 진저 티와 비교해보니 이건 진저도 아니고 레몬도 아닌 밍밍한 맛이었다. 나도 다음부터는 진저 티 마셔야지.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올라간다. 계단을 열심히 오르다가 엄청나게 많은 양 떼들을 만났다. 산에 사는 양들이어서 양들이 우리보다 산을 잘 탄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양도 있었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새하얀 양을 처음 봤다. 뒤를 돌아 풍경을 보니 저 멀리 산에 있는 계단식 고랭지 논이 머리 위에 있었는데 어느새 우리 발아래 놓여있었다. 우리는 이 논을 '고랭지'라고 불렀다. 고랭지가 낮아지는 풍경을 보면서 '와, 우리 진짜 많이 올라왔구나.'를 느꼈다.
히말라야 후기를 보면서 걱정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출렁다리였다. 엄청나게 높은 곳에서 엄청나게 오래되어 보이는 위태위태한 출렁다리 사진을 여럿 보았었다. 평소 놀이기구를 잘 타는 편이라서 몰랐었는데 관악산을 가보니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트레킹 첫날부터 출렁다리를 만나게 될 줄이야.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다르게 출렁다리가 아주 튼튼해 보였다. 아마도 보수공사를 한 모양이다. 동영상을 찍는 여유를 부리며 발끝이 찌릿찌릿했지만 무사히 출렁다리를 건넜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공식이다. 안나푸르나를 올라가는 건 큰 산을 조금씩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산을 넘고 산을 넘고 산을 넘어서 안나푸르나에 가는 것이다. 그냥 산을 넘기에 힘들다고 판단한 곳에 다리가 생겼을 것이다. 출렁다리를 통해 다음 산으로 이동하고 거기서부터 그 산을 다시 힘겹게 올라가야 하는 셈이다. 돌계단을 계속 오르는데 계단 높이가 있어서 한걸음 한걸음이 힘이 든다. 자전거나 등산이나 오르막은 천천히 꾸준히 올라가는 것이 체력을 아끼면서 올라가는 방법이다. 거북이가 아니라 나무늘보처럼 한 걸음씩 계단을 올랐다. 첫날인데 뭐 이렇게 힘들어. 히말라야가 이런 거였구나.
드디어 울레리 마을에 간판이 보인다. 울레리는 가파른 지형에 롯지들이 지어져 있다. 한참을 올라가서 꽤나 높은 곳에 위치한 KAMALA 롯지에 도착했다. 16시 20분이다. 씨얀이 화장실 선택지를 주었을 때 'Inside or outside'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INSIDE!'라고 대답을 한 덕분에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 2층 방을 배정받았다. 거의 2,000m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한라산보다 높이 올라와있었다. 게다가 해가 지고 있으니 낮과는 다르게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난방시설이 전혀 안되어 있는 데다 화장실 창문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만 물이 몸에 닿지 않는 순간 오들오들 떨게 되는 상황에서 얼른 핫 샤워를 마쳤다.
날이 흐려져 기대했던 밤하늘의 별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핸드폰 충전도 무료고 느리지만 인터넷도 터진다. 식당에 큰 난로가 있어 속옷과 수건을 말리고 루미큐브를 했다. 보드게임 카페가 유행하던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었는데 오랜만에 하니 새록새록 기억이 나면서 재미있었다.
게임을 하고 있다 보니 주문했던 저녁 메뉴가 나왔다. 뭔가 네팔 느낌의 피자였지만 충분히 맛있었고 갈릭 수프는 닭백숙 국물처럼 맛있었다. 첫날이니 아직은 쌩쌩해서 피곤하지 않고 입맛도 전혀 없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일기를 쓰고 사진을 보며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가이드 씨얀과 포터가 피곤한 얼굴로 난로 한켠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자러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눈치다. 우리가 얼른 들어가야 그들도 들어가서 쉴 것 같아 내일 아침식사를 주문하고 8시 40분쯤 날진물통에 핫 워터를 받아 방으로 들어왔다. 날진물통을 끌어안고 침낭에 들어가 머리가 베개에 닿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