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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쓰 Jan 11. 2019

나의 할머니, 나의 구름

구름을 좋아하게 된 이유





 한밤중에도 환했던 중환자실의 불빛 아래 내 마음은 어두운 창밖이었다




할머니는 마지막 일주일을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중환자실에 두 번 입원하셨는데, 첫 번째 입원은 내가 열 살 때였고, 두 번째 입원은 내가 열여덟 살 때였다. 할머니가 심장마비로 첫 번째 입원을 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실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듣고 어린 나는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으셨고 곧 일반 병실로 옮기셨다. 그리고 무사히 건강을 회복하셨다. 그때 이후로 꽤 시간이 흘렀던 것 같지만, 돌이켜 보면 할머니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나는 처음에도 그다음에도 할머니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는 보지 못했다.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건 구태여 누군가 일러주지 않아도 아는 것이지만, 돌아가신다는 건 할머니가 진짜로 죽은 후에도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죽음은 할머니를 찾아왔고 우리는 서로에게 작별하지 못한 채로 헤어져야 했다. 할머니는 그 그림자를 봤을까.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일 년 전에 쓰러지셨고 그때는 일반 병실에 입원했다. 입원했을 때부터 줄곧 밤에만 나타나던, 할머니 말에 의하면 ‘귀신’이라는 그것은 어쩌면 죽음의 그림자였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퇴원하신 후에 혼자 걷기 힘들어하셨고, 밤에만 보이는 귀신 때문에 혼자 주무시지도 못하게 되셨다. 그럼에도 나는 죽음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목의 가래 때문에 수술을 받으셨다. 목에 호스를 끼운 탓인지, 말씀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저 기운 없이 나를 쳐다봤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는 할머니의 퉁퉁 분 손을 잡았다. 먼저 할머니의 손을 잡았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손은 금세 차갑게 변했다. 할머니의 세세한 얼굴은 이제 사진을 보면 흠칫할 정도로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할머니가 그때 병실에 누워 나를 보던 눈은 잊지 못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떠올리면 어제의 일이 된다. 그래서 아직도 할머니의 죽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해에 많은 일이 있었어도 내 기억은 추운 겨울 한편에 웅크리고 말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중환자실 앞에 앉아서 이렇게 죽으면 삶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글에서 죽음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하게 된 게. 나에게 죽음이란 건 그때까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삶만 보던 나는 죽음을 마주하고 그 허무함을 무마하려고 습관적으로 죽음을 끄적였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낯설고 언제나 허무한 것이었다. 얼룩진 열여덟을 지나 스물한 살 때도 나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마주했다. 그 이야기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선뜻하긴 어렵다. 그건 할머니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죽음이다. 죽음은 각기 다른 모양이라서 어느 조각이 맞는지 이렇게 저렇게 대봤지만, 깨달은 건 죽음은 절대 풀지 못할 퍼즐이라는 거다. 이해를 못 하니 억지로 끼워 맞춰야 했던 그런 퍼즐.


이런 이야기는 누구와도 했던 적이 없다. 같은 슬픔을 나눴던 가족들, 친구들과도. 지금도 혼자 떠드는 것이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이렇게 심정을 정리하며 글을 쓰니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진다. 사실 처음에 글을 쓰려고 했을 땐, 몇 문장 적다가 할머니가 떠올랐고 떠오르면 그 기억을 따라가다가 글도 같이 멈췄다. 그 기억들 중에 유독 마음이 아픈 기억이 왜 없을까. 유난히 어두웠을, 할머니를 잃었던 그날 밤. 집안에 남은 할머니의 흔적 중 나를 가장 마음 아프게 했던 것은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할머니는 귀신이 보여서 무섭다고 혼자 주무시지 못하셨다. 그래서 할머니와 나는 한 방에서 1년 동안 같이 잤다. 할머니가 사라진 밤은 그래서 더 허전했다. 외로운 마음에 할머니 대신 할머니의 베개를 옆에 두고 자려다가 발견한 하얀 머리카락을 보고 영안실에서도 울지 않았던 나는 그제야 할머니의 죽음을 깨달은 것처럼 숨죽여 울었다. 그 후로도 종종 할머니의 머리카락이 집안에서 보였지만, 이제는 너무도 시간이 흘러버린 탓에 그런 흔적조차 사라졌다.


 그 짧고 시리던 머리카락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할머니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나는 그 흔적을 찾았다. 언제부턴가 습관처럼 하늘을 찍었던 나는 내가 그런 사진을 찍는 이유가 단지 하늘이 예뻐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냥 파란 하늘이나 어두운 하늘을 볼 땐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다지 찍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를 그동안 찍은 사진을 하나씩 보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하늘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빛나던 하얀 머리칼 같은 구름을 좋아했던 거다.


곱슬곱슬한 할머니의 머리칼 같은 하얀 구름


흔적을, 그리움을 담고자 여전히 구름을 보면 사진을 찍는다. 이제는 찍고 싶어도 찍지 못하는 할머니를 대신하듯 구름을 눈과 사진에 담는다.


할머니를 보러 가던 날 본 구름


너무도 낯선 죽음과의 첫 대면에 그 후를 어떻게 보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준비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장례식에서 쓸 영정 사진조차 없었다. 결국 할머니와 해외여행 가려고 찍어둔 여권용 사진을 확대해서 써야 했다. 영정으로 쓰게 될 줄 몰랐던 사진을 영정으로 쓰고, 가족들과 서투른 장례 준비를 하며 할머니만 두고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는 무분별한 기억의 조각이 제자리 없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닌다. 애초에 끝까지 맞추지 못할 퍼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빈자리를 포근한 구름으로 채웠기에 이제 더는 할머니를 시리게만 추억하지 않는다.


할머니를 잃었던 겨울은 가고 봄이 왔듯이 빈 가지에 벚꽃이 채워졌듯이 나는 나의 텅 비었던 하늘에 하얀 구름을 피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서글픈 마음은 남는다. 할머니의 고단했던 삶 자체도 그렇지만, 그 삶이 끝나기 전에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주지 못 했던 것 같아 드는 후회와 죄책감에 못내 서글프다.


살갗이 터지고

등이 휘어진

고목 한 그루


망망대해

육지는 아득한데

노 잃은 사공


꽃과 같이 피었던가

나비같이 날았던가

이정표도 없이


내세에는

꽃으로 태어날까

나비로 태어날까


소설가 박경리 님이 쓰신 시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이 시는 할머니가 쓴 것처럼 느껴진다. 할머니도 내심 저 시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꽃과 나비의 생도 그들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테지만, 이왕이면 할머니가 나비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힘겨웠던 삶은 나비가 되기 위한 번데기 과정이라고 믿고 싶다. 끝내 돌아가지 못했던 고향에서 나비로 다시 태어난 할머니가 고단했던 전생을 날개로 훌훌 털어냈으면 좋겠다.






나를 이룬 문장


할머니가 그때 병실에 누워 나를 보던 눈은 잊지 못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떠올리면 어제의 일이 된다. 그래서 아직도 할머니의 죽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해에 많은 일이 있었어도 내 기억은 추운 겨울 한편에 웅크리고 말았다.

삶만 보던 나는 죽음을 마주하고 그 허무함을 무마하려고 습관적으로 죽음을 끄적였다.

죽음은 각기 다른 모양이라서 어느 조각이 맞는지 이렇게 저렇게 대봤지만, 깨달은 건 죽음은 절대 풀지 못한 퍼즐이라는 것이었다. 이해를 못 하니 억지로 끼워 맞춰야 했던 그런 퍼즐.

그동안 찍은 사진을 하나씩 보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하늘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빛나던 하얀 머리칼 같은 구름을 좋아했다는 것을.

이제는 찍고 싶어도 찍지 못하는 할머니를 대신하듯 구름을 눈과 사진에 담는다.

무분별한 기억의 조각이 제자리 없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닌다. 애초에 끝까지 맞추지 못할 퍼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빈자리를 포근한 구름으로 채웠기에 이제 더는 할머니를 시리게 추억하지 않는다.

할머니의 힘겨웠던 삶은 나비가 되기 위한 번데기 과정이라고 믿고 싶다. 끝내 돌아가지 못했던 고향에서 나비로 다시 태어난 할머니가 고단했던 전생을 날개로 훌훌 털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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