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심어놓은 상추와 감자 등 수확 중인 농산물이 넘쳐나니 빨리 와서 가져가라는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 부부는 두 사람 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적이 있는 사람들로, 진짜 歸農한 경우라서 귀농을 꿈꾸는 주변 사람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다. 요즘 너도나도 나이 들면 시골로 귀농하겠다는 낭만파들이 많이 있지만 선뜻 결심을 못하는 이유가 뭔가 겁나고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낯설다니, 자연으로 이주하는 것이 뭐가 낯설단 말인가? 말하고 보니 좀 멋쩍긴 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고민을 해야 하는 건 맞다. 그러니까 귀농을 꿈꾸고 있지만 도회지에서만 살아온 우리 부부가 그 친구 집을 찾아간 것 또한 일종의 염탐?일지도 모르겠다.
우선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강원도나 남쪽 지방 등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경치가 뛰어나고 산 좋고 물 좋아도 자식들 자주 못 보고 친구들도 자주 만날 수 없는 곳에 살게 된다면 그도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 부부는 강남역이나 인사동에서 친구들 만나자고 하면 광역버스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으니 최적의 귀농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농해도 한 발은 도시에 담가놓을 수 있어 이 정도면 도전해봐도 되지 않을까 우리 부부는 열심히 계산을 굴렸다.
네비가 찍어준 대로 달려가 밭에 도착하자 친구가 내 차림을 보고는 웃는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밭에 오는 사람 차림이 그게 뭐야'
친구는 작업복에 장화에 햇볕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모자를 쓴 전투복 차림이다. 나는 그래도 밭에 온다고 샤방샤방한 외출복 차림을 피해 집 앞 마트 드나들 때 입는 가장 편한 면 원피스를 입었는데도 완전 공주 차림이라며 놀린다.
농촌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안됐다는 걸 안 것은 상추와 아욱을 따면서였다. 얼마든지 뜯어가라는데도 상추 몇 잎 똑똑 따면서 치맛자락이 걸리적거리고 밭고랑 사이에 빠지고 난리다. 남편은 나보다는 좀 나아서 제법 한아름 뜯었는데도 내 거랑 합쳐서 친구가 잠깐 동안 뜯은 상추의 반의 반도 안된다. 다 지어놓은 농사도 수거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감자는 아예 미리 캐서 한 박스 가득 담아놓았다. 감자밭을 쳐다보니 우리 몫이 된 한 귀퉁이가 겨우 조금 파헤쳐져 있을 뿐이다. 나머지 저렇게 많은 것을 언제 다 캐려나 쳐다보기만 해도 질려버렸다.
넓은 밭을 바라보며 남편이 그제야 밭을 이만큼이나 가꾸시느라 무척 힘들었겠다고 진심 어린 말이 나왔는데 친구는 요즘 농사는 예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봄에 전문가가 포클레인으로 밭을 한바탕 갈아주고 잡풀을 막기 위한 비닐 멀칭까지 해주니 농사의 절반은 이미 먹고 들어간다고 보면 된단다. 일이 서툰 낭만 농부들에게는 희소식이겠지만 이런저런 비용을 빼면 농사로 얻는 소득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겠다. 아니 오히려 밑질 수도 있는 이 화려한? 취미생활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래도 밭에서 금방 따온 채소들을 바로 먹을 수 있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친구가 바리바리 싸준 채소들을 얻어와 집에서 먹으려니 마트에서 사다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싱싱함은 차치하고라도 뭔가 진품을 대하는 느낌이다.
남편과 함께 친구집다녀온 소감을 서로 나누었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자연으로 가까이 가는 건 좋은데 농사를 짓지 않으면 할 일이 없는 농촌생활에 자신이 없어서다. 남편은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없다는 것을 가장 큰 단점으로 꼽았고 나는 대형마트가 너무 멀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내심 겁먹게 한 것은 농부가 된 그 부부가 그동안 너무 늙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종일 햇볕을 받으며 밭에 나가 고된 일을하다 보니 얼굴은 새카맣게 탔고 등까지 굽어 전형적인 농부가 되어있는 것을 보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한다.
나는 가끔 그 친구를 만나기도 해서 자연스레 서로 늙어가는 모습이 익숙해져 있는데 친구 부부를 오랜만에 만난 남편은 충격이 무척 컸나 보다.
그동안 자기도 늙었다는 건 생각 않고 옛날엔 참 잘생긴 친구였는데 그 모습이 안 보인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한 번 다녀온 그 밭의 푸른 상추며 고추 토마토들이 눈에 아른거리고, 세상 근심 걱정 없는 듯 자연과 한 몸이 된 것 같은 부부의 편안하고도 맑은 얼굴이떠오르며 자꾸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