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나는 천생 여자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체구와 키도 자그마하고 무엇보다도 유순한 성격도 한몫을 한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여자는 이렇게 온순해야만 어른들한테 귀여움 받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국민학교 생활기록부에도 온통 온순하고 착하다는 담임선생님의 멘트가 도배되곤 했었는데, 국민학교 6학년 1학기 생활기록부에서 돌변한다.
'싸움을 잘하고 저돌적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통지표를 받고선 저돌적이 뭔가 하고 국어사전까지 찾아볼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당시의 나를 생각해보니 일찌감치 사춘기가 시작되었는지 매사에 불만이 많았다. 누군가 옆에서 조금만 내 심사를 건드려도 참지 않았다. 상대방은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해 주먹을 쥐었을 뿐인데도 내가 먼저 주먹을 날렸을 정도로 제어가 안되었다.
나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것도 있었지만, 대담하게도 담임의 부당함까지 참지 않고 저격한 것이 문제였다.
당시 담임은 몇몇 반 아이들을 상대로 고액 과외를 하면서 수익을 챙겼었는데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줘서 그 아이들 모두 백점을 얻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더럽게 치사해서라도 모른 척했을 텐데,
백점 맞은 그 애들만 빼고 모두 손바닥을 때린 것이다. 매 맞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겠노라고 소리치라고 했는데 내 차례가 와서는 담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저도 선생님께 과외 공부해서 백점 받고 싶습니다!
손바닥을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집에 올 때 책가방을 손에 쥘 수 없었고 저녁 먹을 때 숟가락도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뒤로 계속되는 담임의 괴롭힘은 말도 못 했는데 그 한 해가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일로 벌을 받을 때는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 정도였다. 당시 읽었던 위인전 중에 혀를 깨물어 자살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걸 따라 하려고 진짜 혀를 깨물어보았다.
길고 긴 6학년 1년 동안 나는 점점 순하게 길들여졌다.
일단 담임 앞에 서면 오금이 저려와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까불면 두들겨 패서 꼼짝도 못 했던 아이들까지 나를 깔보기 시작했다.
나를 괴롭혀도 담임 무서워 반격 못할 걸 뻔히 알고 있으니 진짜 형편없는 찐따들까지도 나를 툭툭 건드렸다.
담임의 괴롭힘은 한나절만 견뎌내면 됐지만 아이들의 달라진 태도는 정말 힘들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름 담임들에게 귀여움을 받았었기에 주변에 친구들도 많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어느 순간 나를 등지고 모르는 척하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요즘 말로 썸 타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까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져있는 게 아닌가.
가끔 나를 귀여워해 주셨던 5학년 담임선생님을 못 잊어 그 반 앞에 가서 서성이곤 했다. 그러면 나를 보고 반기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도 했는데, 잠시 위로가 될진 몰라도 그 당시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권력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버렸으니까.
이모두가 내가 순종적이지 못하고 되바라져서 생긴 일이라는 걸 인식하면서 나도 변해갔다.
일단 온순해지기로 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불의를 보더라도 모르는 척하며 절대로 앞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점점 비겁하게 변해가면서 그리하는 게 살 길이라는 걸 터득한 것이다.
게다가 6학년 막판에 가서는 나도 담임에게 과외를 받게 되면서 드디어 담임의 괴롭힘도 멈추었다.
학기 말이 되자 담임에게 과외를 받던 아이들이 하나 둘 그만두면서 자리가 나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들이 과외를 그만둔 것은 일종의 레임덕 때문이기도 했지만 담임의 불성실함에 질려서 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달 과외받으면서 겨우 두어 번 담임의 얼굴을 봤을 뿐 매일 술타령으로 사모님의 근심 어린 얼굴만 보고 집에 돌아온 기억밖에 없다.
불의에 참지 않았던 내 성격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모르겠는데, 난 이미 비겁한 사람이 세상 살아가기가 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순하게 복종했을 뿐이다.
시험문제를 미리 가르쳐주는 꼼수도 없는 겨울 방학을 앞둔 시기에 과외를 허락한 엄마만 좀 원망했을 뿐이었다.
내가 중학교 시험에 합격했다며 우리 집 와서 술을 얻어먹는 담임을 보면서 오금 저리던 트라우마는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러나 여자는 순종적이어야 하고 얌전해야 하며, 무엇보다 불의에 나서면 내 손해라는 성격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지금 내 눈앞에 그 담임이 나타난다면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 그나마 남아있는 내 성깔 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