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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살아보니

후회의 종류 (2023년 저장한 글인데 발행을 안했네)

by 우연

한국 나이로 올해 70살이 되었다. ㅠㅠ

올해부터는 법적으로 나이를 한 살씩 낮춰서 세라고 기껏 깎아 줬는데도 내 주위에서부터 잘 지켜주질 않는다.

당장 자식들이 물어온다.

"엄마, 올해 생신은 칠순인데 뭐했으면 좋겠어?"

"나 올해 칠순 아니야, 내년이야."

"우리 시어머님은 작년에 칠순이라 여행 보내 드렸어. 엄마하고 한 살 차이니까 칠순 맞잖아."

"그건 법 개정되기 전인 작년 얘기고."


여행 보내준다는 것도 마다할 정도로 한 살 덜 먹는데 집착하는 나이가 되었다.

운동하면서 만나는 새로운 친구끼리도 서로 몇살인지 민증 깔때면 나 아직 60대라고 바득바득 우긴다. 그럴 땐 비교적 정확도가 높은 띠를 말하라고 하는데 말띠라고 하면

"칠십이네 뭐"

하면서 기어이 확인사살을 하는 심통이라니.


이 나이쯤 되니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때 강남의 아파트를 팔지 말았어야 했는데.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게 악처 노릇을 했더라면.

수능 점수를 잘 받아온 딸 대학 갈때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봤더라면.

그런데 이런 굵직한 후회들은 이상하게도 세월이 지나다 보니 별 감흥이 없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 자주 떠오르며 후회가 되니 참 별일이다.

치매에 걸려 나를 괴롭혔던 친정 엄마에게 좀 더 잘해드릴 걸 하는 후회야 당연하겠지만


오래전 부터 마음에 걸리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였다.

시가와 친정 모두에게 첫 손주이니만큼 관심도 많이 받았으니 첫 기념일인 백일잔치부터 거하게 치뤘다.

작은 신혼집에 양가 가족이 다 모여 축하를 해줬는데 당연히 백일 떡도 돌렸다.

백일떡은 백명이 나눠먹어야 된다는 어르신들 말씀에 따라 온동네에 떡을 나르기 시작했다. 이웃집은 물론이고 아이의 분유를 사다먹던 수퍼마켓에 가서 전 직원에게도 돌릴만큼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마지막 떡을 가지고 약국에 갔는데 마침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있어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경비실 앞을 지나면서 아차 싶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회사 사택의 경비원들은 주로 나이가 젊은 20대 청년들이었다. 회사의 산업체 근무자들로 군대 가는 대신 대체 복무를 한다고 들었다.

내가 떡 쟁반을 들고 왔다갔다 하는 것을 지켜본 청년이 '우리도 있어요.' 하는 얼굴로 떡 쟁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쟁반에는 떡이 달랑 한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 경비실 안에 있는 다른 청년까지 먹기엔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다. 얼른 집에 올라가서 떡을 대여섯개쯤 더 담고 다른 먹을거리도 가져와야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경비실 안쪽을 보며 눈빛으로 '얼른 갖다 올게요.' 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청년도 '네, 기다릴게요.' 하는 눈빛을 내게 보내줘서 우리는 무언의 약속을 했다.

그런데 ... 하

집으로 올라간 나는 청년들과의 약속을 그만 까맣게 잊고 말았다.

아마도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양가 어른들과 아기에게 정신을 쓰다보니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잔치가 끝난 며칠이 지나서야 생각이 났는데 그 청년들은 이미 다른 초소로 옮겨간 뒤였다.

내가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사람들에게 얘기 했더니 아이 낳은지 백일 되었으면 그렇게 건망증으로 깜빡깜빡 하는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해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쟁반에 남아있던 떡 하나라도 두고 올걸, 한창 먹성좋은 청년들이 얼마나 떡을 기다렸을까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했다. 눈빛이라도 주고받지 않았으면 기대라도 하지 않았을 텐데 곧 갖다줄 것 처럼 굴었던 함흥차사 새댁이라니.


두번째 후회부터는 어느정도 내 사심이 들어있다.

약 20년쯤 전에 남편과 나는 동강으로 리프팅을 떠났다.

내친구들이나 남편 친구들이나 모두 무섭다며 안가겠다길래 용감한 우리 부부만 떠난 여행이었다.

여행사에서 준비한 버스에 올랐는데 우리가 제일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대부분 20,30대들이었고 많아봤자 40대의 용감한 대한민국 아줌마들 몇몇이었으니.

8명씩 조를 짜서 보트에 올랐다. 마침 장마 끝이라 엄청 불어난 강물을 따라 보트를 저었다. 보트를 타야만 볼 수 있다는 동강의 비경을 감상하면서 역시 오길 잘했다며 흡족해 했는데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도 있었다.

두 명의 가이드들이 아는 집인지 주막 같은 곳으로 안내를 한다. 분명히 음주 금지인데도 막걸리와 파전을 사먹으라고 부추겼다.

핸드폰을 비롯해 지갑까지 모든 소지품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음식값은 당연히 후불이었다.

우리 부부는 30대 아가씨들 세 명과 합석을 했는데 파전과 막걸리 등을 먹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가이드가 인당 얼마씩이라고 계산까지 미리 해줬다.

리프팅이 끝난 후 버스 문 앞에서 계산서를 내미는 가이드에게 우리 회비를 냈더니 우리와 합석한 다른 아가씨들이 아직 안냈다며 같이 계산해 달란다. 버스가 곧 떠날 참이라 우리 팀 계산을 다해주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아가씨 세 명에게 가서 회비가 얼마라며 내라는 듯이 얘기했는데 그 표정들이 쌔하다. 생각해보니 얼마되지 않는 그걸 굳이 받아야겠냐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같은 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갔고중간에 주막집에 앉아 합석해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나눈 인연이면 나이 많은 우리가 냈어야 하는 사회적 통념을 잊고 있었다. 인당 얼마씩이라는 계산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융통성 문제가 아니라 당시엔 그렇게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보다.


아직도 이불킥을 할 정도로 민망한 장면이 있다.

몇년 전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와트 여행 때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되는 일이다.

앙코르와트 사원 앞에서 사진사 한 명이 가이드에게 다가오더니 우리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장당 2천원씩인데 자기가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찾지 않아도 된단다.

사진사는 우리 팀을 따라다니며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식당으로 커다랗게 인화된 사진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사진이 너무 흐리고 정말 조잡했다.

더군다나 내 사진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정말 많아서 짜증이 났다. 내가 제일 만만해 보였나?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찾지않아도 된다는 약속대로 나는 열댓장 쯤 되는 사진들 속에서 10장만 고르고 2만원을 줬다. 아예 찾지도 않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자위하면서.

여행에서 돌아온지 한참 지나서야 한 가정의 가장일 그 사진사의 눈빛이 떠올랐다. 약간의 원망스런 눈빛과 함께.

이후 자꾸 마음에 걸려서 오죽하면 다녀왔던 여행사를 통해 가이드와 연락해서 그 사진사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하고 싶은 걸 참았다.


그러고보니 후회되는 일이 주로 다른 사람에게 좀 더 후하게 대해줄걸 그랬다 싶은 마음인 것 같다. 확실히 나이가 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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