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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Mar 03. 2021

장미와 임플란트

노부부가 살아가는 법

아침 일찍 혼자 운동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남편의 손에 화사한 장미 꽃다발이 들려있다.

설마 날 주려고?

오늘 무슨 날인가? 무슨 날이라도 그렇지 꽃 선물 받아 본 지가 언제더라? 게다가 장미꽃이라니!

남편이 꽃을 내밀다 말고 내 얼굴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 . .이제 괜찮아졌네?"

"뭐가?"


몇 년째 속 썩이던 오른쪽 송곳니를 빼버렸다. 오래전에 신경치료를 해서 더 나빠진 치아를 세심하게 봐주던 치과의사였는데 최근에 와서는 아예 임플란트를 하는 것이 낫겠다고 권했다. 임플란트가 획기적인 시술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연치아를 보존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보자던 의사였으니 나름대로 내린 결론인가 보다.

마침 나는 평생 2개의 임플란트 보험 혜택을 적용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비용 부담도 덜 수 있단다.

그렇게 날을 잡은 첫날, 발치부터 시작했는데 이건 완전히 생니를 뽑아내는 기분이었다. 마취를 해서 나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잘 뽑히지 않는걸 얼굴을 꽉꽉 눌러가며 힘껏 뽑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방금 전 싸인했던 동의서 내용이 생각났다. 굴이 붓고 멍이 들 수 있으며 심지어 입술이 찢어질 수도 있으니 그래도 수술을 진행하시겠느냐는 형식적인 동의서였다.

다행히 입이 찢어지는 불상사 없이 무사히 수술실을 나오니 간호사가 발치한 부위에 냉찜질을 해줘야 붓지 않는다며 얼음팩을 내주었다.

발치하면서 의사나 나나 얼마나 용을 썼는지 몸살기까지 있어 약을 먹고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간호사가 준 아이스팩 찜질이고 뭐고 다 귀찮았다. 약을 먹기 위해 죽을 사다 먹으면서도 허전해진 송곳니 자리만 신경이 쓰였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이 완전히 두배로 부어올라있었다. 뺨을 넘어 눈까지도 부어올라 한쪽 눈앞이 보이질 않을 지경이 되었다. 놀란 남편은 어쩔 줄 몰라하며 병원에 가자는데 나는 통증이 하나도 없어서인지 그냥 견딜만하고 다음날 점검 예약도 되어 있기에 괜찮다고 했다. 거울만 보지 않으면 되니까 말이다.

그다음 날은 더 심하게 부어오른 데다가 시퍼런 멍까지 나타났다. 이틀을 그런 상태로 지내고 점검차 병원에 가니 내 얼굴을 본 간호사가 '헉! 많이 부었네요.얼음 찜질 안하셨어요?' 하며 놀랬다. 그러나 의사는 나만큼이나 무심한 표정으로 다들 이런 거라며 내일부터는 온찜질을 해줘야 멍이 빨리 없어진다는 조언만 해주었다. 코로나 덕분에 외출할 일이 있으면 마스크 쓰면 되니까 어쨌든 코로나 세상이 아니었다면 부부싸움하다가 얻어터진 것 같은 몰골이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을 때 우리 연배의 노부부가 서로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폼이 아무래도 '부부싸움하다가 이가 부러져서 왔나 봐'하는 것만 같아 여차하면 다가가서 '이 병원에서 임플란트 하시면 이런 얼굴을 각오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심술이 발동했다. 임플란트 잘하는 경험 많은 의사라고 남편이 추천해준 곳인데 이 꼴이라니.

마침 동생도 볼일이 있어 우리 집에 왔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기함을 했다. 자기도 임플란트 했지만 이렇게까지 붓지는 않았단다. 남편도 마찬가지라고 하며 둘이 걱정을 하고 있는데 나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심드렁하게 둘의 대화를 듣고 앉아있었다. 나중에 동생 말로는 그 얼굴 표정이 너무 으스스했단다. 그리고 언니 걱정하느라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전화해 부종은 좀 가라앉았는지 병원엔 가봤는지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니 남편은 오죽했을까. 나에게는 말도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었나 보다.

생전 안 하던 짓으로 장미꽃까지 사들고 와서 나를 위로하려 했었나 본데 하룻밤 사이에 말간 표정으로 돌아온 내 얼굴을 보니 반가우면서도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억울했는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니까 장미꽃은 아픈 나를 위한 병문안 꽃다발인 셈이었다.

꽃다발이라고 말하기엔 무색하게 달랑 장미 두 송이에 안개꽃으로 두른 소박한 것이었지만 오랜만에 집안에 들어온 꽃이니 적당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했다.

장미꽃을 우리 집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크리스털 꽃병에 담아 들고 식탁 위로 서재방 책상 위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세팅하는 걸 남편이 보더니 내가 굉장히 설레 보였나 보다. 그리고 빈약한 꽃다발에 대한 변명인지 요즘 장미 밭을 갈아엎어 장미가 귀하다고 해서 겨우 구했다고 묻지도 않는 부연 설명까지 했다.

'그러면 다른 꽃으로 사든 지 하지. 요즘 프리지어 철이라 얼마나 싸고 많이 나오는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걸 다시 밀어 들여보냈다. 옛날에 신혼도 한참 지난 어느 때 남편이 장미꽃 사들고 들어왔다가 나한테 지청구 듣고는 다시는 꽃구경을 못해봤기 때문이다.

그때의 미안함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꽃을 코에 대고 킁킁거리는 듯 오버했으니 적당한 리액션은 완성된 셈이렸다.


결혼해서 40년 넘게 살다 보니 그동안의 서운했던 감정이나 분노조차도 노글노글해진 요즈음이다.  자식들 키우며 즐거웠던 일이나 가슴 졸였던 일 등 함께 하면서 키운 전우애 덕분인지 서로의 기분을 눈빛 만으로도 알만한 사이인데 한동안 우리가 좀 무료했나 보다. 가끔 이런 이벤트 하나쯤 터져 줘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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