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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 Bori May 19. 2023

해야 할 일을 하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마르쿠스의 <명상록>으로 스토아학파를 처음 접했다. 철학자라지만 황제였기 때문인지 그가 말하는 받아들임과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는 메시지에 크게 설득되지 않았다. 그러다 정확히 한 달 후 노예였던 에픽테토스의 입장이 되어 다시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바라보니 정말 다르게 느껴진다.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내 몸 까지도)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해 (잠시 빌려 쓸 수 있음을) 감사하기

본능의 영역처럼 여겨지는 나의 생각과 감정까지 철저히 통제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기. 하지만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살아가는 동안 채워가고 싶은 만족을 수치화한다면, 당연하게도 절대적으로 숫자가 클수록 만족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대치라는 세팅값에 따라 만족도는 달라질 수 있다.

스토아학파는 반복해서 말한다. 세팅값을 0에 두라고. 


몰랐던 분야를 알아가는 재미로 40페이지를 네 시간 동안 즐기며 수집한 스토아학파와 에픽테토스의 문장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으며 아마도 가장 많은 문장을 수집한 날이 아닌가 싶다.) 



받아들임

흔히들 아는 스토아학파의 권고는 “자연에 순응하는 삶"
스토아학파는 유리잔에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에게 유리잔이 있다는 사실을 기적으로 여긴다.
스토아 철학을 실천하면 작은 기쁨을 더 섬세하게 느끼게 된다.
코트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건 당신이 코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그 자리에서 즉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해라.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몸조차도 내 것이 아니다. 잃어버릴 것이 없다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할 것도 없다. 
스토아학파에게 '이성적'행동은 냉정한 행동이 아니다.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는 행동이며 우리는 신적인 섭리를 따르는 대리인이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사는 것은 곧 이성의 왕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다. 
운명이 허락한다면. 

ㄴ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며 순응하고 받아들인다. '무'가 디폴트가 되기에 부족한 것이 없고 무언가가 주어졌을 때 감사할 수 있는 듯. 



자발적 박탈 (=간헐적 사치)

자발적 박탈의 목표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대대로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을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에 더욱 감사하게 되고, 덜 얽매이게 된다. 
자발적 박탈은 자제력을 길러주며, 자제력을 키우면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기쁨을 포기하는 것은 삶에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 자발적 박탈은 용기를 길러준다. 또한 그리 자발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박탈에 대비해 예방 주사를 놔준다. 
여름인데도 가끔씩 차의 에어컨을 껐다. 더위가 어떤 느낌인지를 상기하고, 현대식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스 캐리어에게 깊은 고마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간헐적 사치라 생각하고 싶다. 
만약 목욕탕에 간다면 그곳에는 물을 튀기는 사람들, 거칠게 떠미는 사람들, 욕을 하는 사람들,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태도다. 

ㄴ 평소라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겠지만, 묘하게 설득된다. 기준을 높은 곳에 두지 않고 기대치를 낮춰서 불행보다 행복을 더 많이 느끼게 하는 방법 같기도. 



나의 생각과 감정은 내가 지배한다.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철저하게 실용적. 소크라테스처럼 에픽테토스도 무지를 진정한 지혜로 향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 여겼다. 철학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감정적 삶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고압적인 상사나 인스타그램 팔로어 같은.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이런 고난을 스스로 부여한 속박에 빗댄다.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에픽테토스는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몸을 맡기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터무니없지 않나?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마음속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타인에게 이양해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만든다.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ㄴ 결과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릴 것.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최선을 다할 것.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다. 스토아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 
감정이 드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 생각과 행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반사반응

감정이 생기는 과정 : 외부사건(스토아식 표현은 '인상') > 동의 > 반사반응 
우리가 이 반응에 "동의"할 때에만 감정이 된다. 우리의 반응에 동의함으로써 반사 반응을 정념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부정적인 최초의 정념을 존중하고 증폭시키기를 선택할 때마다 우리는 불행하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임을 깨달아야만 더 나은 선택을 내리기 시작할 수 있다. 
최초 정념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면 정념에 다른 이름을 붙여라.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고독에 평온함이라는 이름을,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에 가면 그 상황에 축제라는 이름을 붙이고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받아 들여라."
어느 면에서든 불평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ㄴ 본능의 영역이라 여겼던 것도 무의식 속에서 불행을 선택하고 있었던 것. 감정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부정적인 감정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이런 고민을 했다는 게 철학자들은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추구하는 스토아학파가 사람에게 느껴지는 감정까지 통제하고자 하는 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피나는 노력 같기도 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무관심하기 = 유보 조항

스토아 철학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무관한 것들에 ‘무관심’하다. 삶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스토아철학의 또 다른 기술.
스토아 철학을 공부한 간디는 “누구도 나의 허락 없이 나를 해칠 수없다”라고 했다.
“내 몸은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내 몸을 통제한다는 환상을 전부 제거했어요.” - 에픽테토스
스토아철학의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이 있다. 우리는 그저 연기자다. 자기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스토아철학은 '지금 가진 것을 욕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운명에 체념하거나 그저 받아들이지 말고 운명을 사랑하고 욕망하라고 말한 니체처럼. 
유보 조항은 이슬람교의 인샬라(신의 뜻이라면)나 유대교의 비에스랏 하샴(신의 도움으로)에서 종교적 색채를 벗겨낸 것과 유사하다. 

ㄴ 통제 불가한 것은 그저 받아들인다. 




프리메디타치오 말로룸 (premeditatio malorum) = 최악의 상황에 대한 예상 

세네카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유배, 고문, 전쟁, 난파 사고를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 하라고 말한다.
스토아철학은 미래의 고난을 상상하는 것은 미래의 고난에 대해 걱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걱정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지만 고난을 예상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이다. 네가 말하고, 듣고, 걷고, 숨 쉬고, 삼키는 능력을 읽었다고 상상해 보라. 예상된 고난은 힘을 잃는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두려움은 그 크기가 줄어든다.  
마르쿠스는 그 무엇도 옳거나 그르다고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상정하지 않는다. 마르쿠스는 고질적 자기 회의와 싸우고, 인간으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일 뿐이다. 
"삶의 아름다움을 곱씹어라. 별을 관찰하라. 별과 함께 움직이는 스스로를 보라." 

ㄴ 최근에 명상록을 읽어서 그런지 마르쿠스의 문장들이 더 와닿는다. 그때는 로마의 황제가 자기 암시와 확신을 위해 좋은 말들을 그저 열거해 놓은 일기라고 생각했는데, 스토아학파의 이런 정수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 읽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 같다. 




스토아철학의 '위에서 내려다보기' 개념 

"이 세상은 꽤나 넓고, 나는 아주 작은 존재이지요."
에픽테토스는 나를 격려해 준다. 지적인 우주의 관객으로 여긴다. 


(덧) 스토아철학은 힘들어. 

스토아철학의 모든 것이 그렇듯 신체 단련은 덕, 구체적으로는 자제력과 용기, 인내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우리 어깨 바로 위에 자기 행복에 대한 책임을 지운다. = 자립심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경기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펼칠 것.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신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말 것. 


 




기타 철학 관련 문장들 

다양한 철학은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소로의 저항 정신은 10대의 마음을 끈다. 니체의 불꽃같은 강렬한 아포리즘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인다. 자유를 강조하는 실존주의는 중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스토아 철학은 나이 든 사람을 위한 철학이다. 몇 번의 전투를 이겨내고, 패배도 해보고, 상실도 경험해 본 이들을 위한 철학이다. 크고 작은 인생 역경의 시기를 위한 철학이다.
스토아철학의 흐름은 미국 역사를 관통한다.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를 포함한 건국의 아버지들에게서 시작해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라는 스토아 사상의 정수를 드러내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빌 클린턴은 마르쿠스의 <명상록>을 지혜가 가득한 경이로운 작품으로 여기고 가장 사랑하는 책으로 삼았다.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인생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
견유학파는 고대의 히피들이었다. 이들은 아주 조금만 먹었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며 권위에 도전했다. 고집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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