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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 Bori Jul 18. 2023

대중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의 순수함과 낭만에 대하여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 


여름감기로 며칠 앓고 무기력하게 늘어져있던 지난주, 조금씩 조금씩 컨디션을 힘겹게 끌어올리던 중에 날개를 달아주는 책을 만났다.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 기획, 만드는, 일! 자동반사적으로 나를 자극하는 단어가 이미 제목에 잔뜩 포진한 책은 본능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었고, 역시나! 책과 함께 하는 동안 쪼그라진 풍선에 헬륨가스가 충전된 듯, 기분이 업되고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설렘이 차올랐다.


장수연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터틀넥프레스(2023)


좋았던 문장들 필타하며 정리하는 독후감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가 졸업식 축사에서 ‘성공한 사람’이라는 단어를 무어라 수식했는지 떠올려보자.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된’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게 성공이다. 땀 흘려 노력한 사람 전부가 아니라.
성공한 사람에게만 들을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성공한 프로그램이 아닌데도 뒷이야기가 궁금한 것들이 있다.

ㄴ 대중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과 수다를 나누는 팟캐스트 <보면 뭐 하니>의 장수연PD님이 그중 10개의 이야기가 엮여 나온 책. 유명한 이들의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소비되는 것에 질린 상태였는데, 이미 충분히 하이라이트 받은 사람이 아닌 PD나 감독이나 작가의 이야기가 너무 귀했다. 장수연PD님은 책을 통해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이 분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다정함과 통찰력에 완전 팬이 되어버렸다


일을 잘하는 것만으로 생존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걸 청춘들이 가장 잘 안다. 이 일이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일인지 끊임없이 확인받길 원한다. 누구에게? 리더에게. 이성준PD는 이걸 ‘일의 생명력’이라고 표현했다. 서른네 살 젊은 팀장의 강점은 아마 이 지점일 것이다. 동료들의 불안과 갈증을 함께 느끼고 이해한다는 것. - 픽시드/썰플리 이성준PD 인터뷰 중
처음 PD 일을 시작할 때는 단순히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이건 내가 열심히 해야 하는 직업이 아니라 스태프들이 열심히 하도록 독려하는 직업이구나. 그게 PD에게 제일 중요한 능력이구나’ 하고요. 왜냐하면 이건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 뜨거운 씽어즈 신영광PD 인터뷰 중

ㄴ 동료와의 관계, 리더의 역할을 고민하는 인터뷰이들. 방송국에서 일하는 이들은 왠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흠.. 오해가 있었네? 이렇게 의리 있는 사람들이 많다니! 나 하나 살기도 벅차다는 세상에서 기꺼이 ‘서로 함께’를 고민하는 이들이 멋있게 보인다. (멋있다고 밖에 못하는 이 표현력이란)

 

댄서들의 삶 자체에서도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아요. 자기가 좋아하고 원하는 길을 우직하게, 10년 혹은 그 이상 걸어온 분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어떻든, 누가 뭐라고 말하든 개의치 않고요. (…)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어!’라는 태도, 그렇게 살아온 시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대단했어요. - 스우파/스걸파 최정남, 김나연PD 인터뷰 중

ㄴ 좋아하고 원하는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늘 존경심을 느낀다. 그래서 스우파도 좋아했고 여지없이 이 문장에도 밑줄을... 


영조, 정도 시대를 다루는 콘텐츠들은 많지만 거기서 궁녀들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잖아요. 궁녀에게도 감정이 있고, 야망이 있고, 우정, 비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 궁녀도 입체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극은 본 적이 없거든요. - 옷소매 붉은 끝동 정지인 감독 인터뷰 중 
우리 인생도 기쁜 순간은 사실 짧고, 일상과 기다림의 시간이 훨씬 길잖아요. 그런 삶의 속성을 드라마에서도 마치 리얼타임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셨어요. - 옷소매 붉은 끝동 정지인 감독 인터뷰 중  
요즘 시청자들이 ‘위기’ 단계를 보기 힘들어하기 때문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점점 ‘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시대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생각하면, 좀 우울해진다. - 작은아씨들 김희원 감독 인터뷰 중

ㄴ 신기하게도 밑줄의 지분 절반이상이 장수연PD의 문장이었다. 작품에 대한 관점과 해석, 시선과 문장이 너무 좋았다.  





특히 좋았던 두 인터뷰이 


그 해 우리는 : 김윤진 감독

 ‘이렇게 하면 성공할 거야’, ‘이 배에 올라타면 잘될 거야’ 이런 계산 없이 ‘이 이야기에 나를 한번 던져보겠다’는 결심들이 모이는 순간이랄까요. (…) 하지만 여전히 이런 선택을 하는 분들이 있고, 이런 순간이 있다는 게 이 일의 낭만이자 매력인 것 같아요.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문장들로,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순간을 황홀하게 만들어주시는 걸 보면서 ‘나 또한 그 시간을 지나왔다’는 감각이라고 할까요. 뭔가 모르게 세포가 활성화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D.P : 김보통 작가

때리는 구조를 없애는 게 탈영병을 줄이는 제일 확실한 방법인데 그런 고민보다는 잡아올 생각만 하는 거죠. 탈영병을 잡아오는 일을 병사한테 시키는 것, 징집제도하에서 서로가 피해자인 것이 너무 희극 같았어요. 상황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걸 보면 제게 ‘작가로서의 무언가’가 있긴 있나 봅니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점점 도망치는 걸 무서워하게 되고 ‘도망이 아니라 도전을 해야 한다’며 비장해져요. 도망의 좋은 점은 비장하지 않다는 거예요. 비장해지지 말고 도망쳐서 일단 뭐라도 하자. (…) 도전은 높은 확률로 깨져요. 깨지면 좌절하게 되고요. 저는 그게 악순환이라고 생각해요.




‘이거 드라마로 꼭 만들고 싶다!’고 느끼는 순수한 마음

서로의 특별함을 살릴 수 있게 애쓰는 노력

사람들이 일상에서 평범하게 느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다정함

시청률과 대중성도 중요하게 여기는 책임감


이런 것들을 보고 있자니 들었던 일에 대한 생각들 


하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한 번 해볼까? 하며 조금씩 끊임없이 자극이 몰려왔다. 내가 드라마를 너무 좋아하고 드라마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가.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외의 부분들이 많아 흥미로웠다. 죽기 전에 드라마 대본을 써보 싶다는 꿈이 있다. 드라마와 대본 그 어디에도 접점이 너무 희박하기에 ’꿈‘이라고 막연히 이름 붙여주었는데 책을 읽고는 꼭 대본이 아니라 일단 어떤 형태의 글로든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은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도망치듯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냥 했어요’로 끝나는 에필로그처럼.


둘. 

최근에 다양하게 거쳐온 나의 커리어가 깨끗하지 않음에 불만과 위축이 있었는데 문득 그 생각이 전환되는 느낌. 깔끔하게 닦인 길 위의 회색인간들 사이에 휩쓸려 가지 않고, 이쪽저쪽으로 샛길 만들어가는 내 커리어 쫌 매력적이잖아? '이길도 아닌가벼' 하면서 자꾸 넘어져도, 꿋꿋하게 일어나서 또 새롭게 도전하는 내가 참 멋있잖아! 생각해 보면 처음 회사를 그만둘 때 하고 싶다던 경험을 계속 채워가고 있는 중이야. 

치열하게 고민하며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렇게 재밌게 다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정적으로 수동적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최근 나를 잠식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순수한 아이 같은 모습과 치열하고 고되게 하루하루를 이겨나가고 책임감 있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 감각이 그리워졌다.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다 하게 되다니. 




나에게 끝까지 완독을 하게 하는 책은 참 드문데, 간만에 완독하고 단숨에 밑줄까지 아카이빙. 내 안에 숨어있던 솔직한 마음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고마운 책이었다. 숨 쉬고 있자면 문득문득 수족관 속 물고기가 된 게 아닐까 싶은 요즘. 무거운 공기에 축축 처져서 산뜻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분들이라면 지금이 이 책을 읽을 타이밍! 



터틀넥프레스의 첫 번째 책, 볼수록 너무 사랑스러운 거북이�


나만의 무엇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기를. 

일과 조직, 리더십의 이야기에 늘 귀가 쫑긋하다면 분명 흥미롭고 영감 가득할 것. 


그리고 이 책을 보고 나면 분명 보고 싶은 콘텐츠가 생길 거예요. 

그럼 전 이제 책에 소개된 콘텐츠 중 유일하게 보지 않은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러 총총총. 주문한 책이 도착하면 소설로도 다시 한번 읽어보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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