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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게 만드는 문학의 힘

정보라 <아무튼 데모>, <저주토끼>

by 보리 Bori

“집회에 한 번 나가봐. 치유받는 기분이야.”

시국이 너무 답답해서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난다고 토로하던 나에게 선배가 말했다. ‘한번 가보고 싶은데’ 하면서 독감 때문에 2주를 집콕하던 나는 이번 주말엔 집회를 꼭 가보리라 다짐했다. 이런 다짐이 또 희미해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같은 날 즐겨 듣던 팟캐스트에서 운명 같은 제목의 책을 추천받았다. 정보라 작가의 <아무튼 데모>. 데모를 이야기하는 글자 하나하나에 진심이 전해졌다. 이런 분이 쓰는 소설은 어떨까? 호기심에 <저주토끼>도 집어 들었고, 이틀 만에 완독 했다. 그리고 그 주말에 인생 첫 집회를 다녀왔다.


집회에 참석한 이들의 똑똑하고 논리 정연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감정일기를 쓸 때처럼 답답함이 비워지는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래 아직 세상에 희망은 많아.' 양보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사람들 사이에서 에너지를 풀 충전받아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생각했다. 시선의 높이를 들어 올려주고, 행동하게 만든 책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구나. 어쩌다 집순이가 집회까지 나오게 되었는지, 책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고 뭘 느꼈는지 적어봐야겠다.


2024년 12월은 난생처음, 뉴스를 아침저녁으로 챙겨보며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다. 재택근무자로서 점심을 먹으며 OTT로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나를 위한 사치의 시간이었는데, 지난 연말에는 그 시간에도 드라마보다 뉴스가 땡겼다. 이 시기 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느낀 것처럼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게 현실이었으니까.


나는 늘 의무감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회사원 때는 일을 잘 해내는 것이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효율을 최고 가치로 여겨서 독서에 드는 시간이 비효율이라고 느꼈다. 성적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 외에는 본 적이 없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1년에 한 두권? 그것도 자기계발서만 보면서 늘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하며 뒤통수 맞은 느낌으로 역시 책에는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진짜 독서의 맛은 비교적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무려 서른 중반이 되어서. 더 일찍 알았다면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만, 늦게나마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효율을 추구하는 기간 동안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 누구보다 잘 적응하는 사람이었다. 어른들이 추천하는 지름길만 취급했다. 대신 시선과 인간관계는 편협했고, 이기적이었다. 탄탄대로에서 이탈해 커리어 전환을 하며 방황하던 시절, 소설을 읽으며 시골 고향으로 돌아간 40대 노총각을 이해하게 되었다. 평소라면 루저라고 생각했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때 문학의 힘이라는 걸 처음 느꼈다. 처음엔 나에게도 포용력과 인류애의 씨앗이 있었다는 사실에 우쭐했는데, 한 권 두권 마음을 움직이는 책을 읽을수록 왜 그동안 이런 데 관심을 두고 살지 않았을까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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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데모>를 읽으면서 이런 류의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연이어 몰려왔다. 일상에서 시위를 접할 때면 그저 시끄럽고 불편했고, 자유를 침해당한다고 생각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내 할 일만 중요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저렇게 투정 부릴 시간에 생산적인 행동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무섭고 바보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처절한 마음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세월호부터 쌍차 노조 사건, 각종 노동 사건, 소수자들의 집회가 이렇게 많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고, 오체투지라는 시위의 방식도 처음 알았다. 에에올을 보며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이런 문장을 열심히 수집했으면서 진짜 다정함이 뭔지 몰랐고, 세상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집회에 참석해 힘을 보태는 이들이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이런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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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데모>에서 피어난 정보라 작가의 덕심은 <저주토끼>라는 소설로 이어졌다. (제목도 강렬했지만, 2022년에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도 올랐다는 사실에 주저 없이 첫 소설로 픽) 10개의 단편은 모두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인공인데, 장르가 무려 환상호러다. 호러는 정말이지 취향과 거리가 멀지만 이렇게 감상을 남기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다는 것도 놀랍고, 오싹하고 기분 나쁜 상황이 전개되는데다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전개됨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이슈가 겹쳐 보이며 씁쓸해질 수 있다는 점이 경이롭다. <아무튼 데모>에서 작가가 언급한 이들이 소설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 분명 비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호러라는 깨달음이 남는다.

20세기를 살았던 언론인이자 소설가 이병주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해가 느리게 지고 달빛이 굴절 없이 비추던 시절엔 밋밋한 현실에 독을 부어 소설을 쓰곤 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는 현실의 독이 너무 지독해서 물을 타지 않으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이 목도한 지독한 현실을 <아무튼 데모>라는 에세이로, 그리고 환상과 호러라는 물을 타서 <저주토끼>라는 소설로 풀어낸 게 아닐까.


<저주토끼>의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들이므로 공통된 관점이나 태도가 보일 수는 있지만, 책 전체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특별한 교훈이나 메시지는 없다. <저주토끼>는 환상호러 단편집이고, 환상호러 장르는 대중문학에 속하며, 대중문학은 교훈이나 가르침보다는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장르이다.
그러므로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자기 입으로 ‘호러’라고 해놓고 즐겁게 읽어달라니 모순되는 것 같지만 오싹한 즐거움을 느껴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리고 독자님들이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거나 등장인물에게 공감하실 수 있다면 글 쓴 입장에서는 더없이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즐겁게 읽으며 공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글. 그게 진짜 문학의 힘이 아닐지.



뒤늦게 책을 읽고, 타인을 공감하고,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가면서도 부끄러워서 이런 마음을 꽁꽁 감추며 지냈다. 하지만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와서 이렇게 변한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늦게라도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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