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숙이 음악인의 길로
음악하는 자녀들을 둔 부모들의 온라인 카페에 올린 고등학교 입시후기입니다.
벌써 3년 전 이맘때네요, 음알못 부모의 아들이 예중에 가게 된 스토리를 나눴던 때가요. 중학생 아들의 3년은 시속 10킬로의 속도를 갔는지 모르겠는데, 저의 시간은 40킬로 혹은 그 이상의 속도로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3년동안 수많은 콩쿠르에 도전하며 도전 만큼이나 많은 눈물의 기록을 썼고 예외 없이 사춘기의 기나긴 터널을 지났습니다(아직 터널의 끝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때마다 뭐라도 기록을 남기고 싶었는데 매번 게으름에 굴복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고등학교 입학 결과를 받아든 지금, 어쩌면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시작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게으른 마음을 추스르고 지난 3년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25일 오후4시
그동안 “떨어질 자신이 없다”며 기세 등등하던 아들놈은 실기시험 전날이 되자 “입술 상태가 안 좋다”, “소리가 답답하게 느껴진다”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최근 1년동안은 집에 방음방을 두고도 서초동 연습실 출근 도장을 찍고 밤 12시가 다 되어 집에 오는 터라, 잘 먹이는 것 말고는 엄마로서 해줄 게 별로 없어 그저 마음으로 기도만 했습니다.
결과 발표날, 저희 가족은 오랜만에 시부모님 댁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합격자 발표 1시간 전부터 홈페이지를 새로고침하는 아들. 발표 시간 정각이 되자 버벅대는 서버. 차 안에는 노랫소리만 흐르고…5분쯤 지나 아들이 씩 웃으며 핸드폰 화면을 보여줍니다.
"합격"
도전
아들은 A로 갈지, B로 갈지 꽤 오랜동안 고민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들은 어느 곳을 쓰더라도 크게 걱정은 안 한다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같은 재단의 학교로 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크셨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두 학교 사이에서 고민을 한 이유는 금관악기에 대한 학교의 낮은 관심이 가장 큽니다. 아무래도 3년을 다닌 학교이니 학교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눈에 띄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학교에서 학교폭력 피해자가 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학교나 선생님들의 실망스러운 대응방식과 태도도 경험했습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다는 말도 가끔 했고,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음악에 관심이 없는 친구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도 종종 했었습니다.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짜 그 떡이 더 큰지 아이에게 스스로 취재를 해서 리스트를 써보라고 했습니다. 워낙 소수가 하는 악기이다보니, 학교와 선생님은 달라도 선후배와 동년배들 대다수가 한 배를 탄 동료들 같아서 각 학교의 장단점은 금세 파악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결국 A로 마음을 정한 것은 롤모델 중에 A학교 선배가 많은 것과 학과공부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듯 보였습니다.
대략난감
아들은 "난 공부 안 하고 악기만 불면서 살고 싶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공부가 싫어서 음악을 좋아하는 척 하는 것인지, 진짜 음악을 좋아하는 것인지... 저는 아직도 관찰 중입니다.
아이가 1학년 첫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은 2022년 4월의 어느 날, 제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네요. "충격의 도가니." 듣도 보도 못한 점수가 줄을 서 있었습니다. 기말고사 때는 좀 더 잘 해 보겠노라 약속한 아들은 기말고사 후 스스로 수학학원행을 결정했습니다. 모든 과목이 총체적 난국이었지만 아들은 일단 수학학원에 보내달라 했습니다. 아빠가 수학을 가르치는 게 싫어서 도피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간 부자지간의 연을 끊지 않으려면 수학학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2학년 때는 반짝 성적이 올랐지만, 3학년이 되자 공식 입시생이 되었음을 선언한 녀석은 다시금 손에서 공부를 슬슬 놓았습니다. '머리가 텅 빈 음악가가 되지 않으려면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이라도 평타는 치자'고 그렇게 회유를 했건만... 본인이 재미, 혹은 유익함을 느껴야 하는데 이 아이는 공부에 도통 욕심을 내지 않고 있네요. 학교 상담에 가서 담임 선생님께 공부를 너무 안 한다고 고민을 말하니 "어머니, 관악기 하는 아이 치고 이 정도면 잘 하는 편이에요"라는 본전도 못찾는 답만 듣고 온 적도 있습니다. 부모 빼고 아이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저는 '대략 난감' 모드입니다. 아이랑 친한 금관악기 전공 친구 한 명은 실기도, 공부도 모두 최상위권인데, 이 아이에 대해 저희 아들은 "엄마 걔는 그냥 천재야"라고 천진난만하게 말합니다.
아들이 모든 걸 다 잘하기를 원하는 건 아닙니다만, 공부는 포기하고 실기에만 집중하라고 말하는 게 저는 주저됩니다. 저는 목표가 무엇이 되든 태도가 성과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인데, 이게 음악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기에 지금도 계속 고민 중입니다.
향상 실기 콩쿠르, 또 향상 실기 콩쿠르
매학기 향상음악회와 실기시험, 그 사이에 방학마다 몇 번의 콩쿠르. 지난 3년간 무대에 오른 횟수를 따지자면 20회가 조금 넘는 듯 싶습니다. 금관악기는 상대적으로 콩쿠르가 많지 않은 편이라 대략 이 정도네요. 끊임 없이 무대에 오르지만, 아이는 여전히 무대 체질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중 첫 향상음악회에서는 두 다리가 후덜덜 떨리고 입술이 파래질 정도였다고 반주쌤이 걱정을 많이 하셨었습니다. 인*놀이란 약의 존재도 그때 알았죠. 약을 처방 받으면서 의사쌤이 '약에 너무 의존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자 건강염려증이 있는 이 아이는 그 이후로도 웬만하면 먹지 않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익숙해진 학교 무대에서는 약 없이 이제 꽤 편하게 불게 됐지만, 콩쿠르에 나가면 늘 아쉬움을 남기고 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저희 아이를 '연습실의 세르게이(피아노계의 조성진과 같은 비유?)'라고 부르십니다.
무대 경험을 쌓아가면서 아이 스스로 많은 부분에 대해 나름의 루틴을 만들어가는 듯 싶습니다. 최근에는 아침 일찍 연습실에 가서 홀로 웜업을 하고 근처 단골 국밥집에서 배를 채운 뒤 콩쿨장으로 가곤 합니다. 2학년 즈음 서로 말만 하면 부딪히는 일이 잦아져 홧김에 콩쿠르 당일 라이드도 그만뒀는데, 이제는 쿨하게 집에서 빠이빠이합니다. 이게 서로의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무대경험'을 중시하셨지만, 그래도 무대에 오르는데 이왕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너무도 행복한 일일테죠. 1학년 때는 '경험'이 중요한 포인트였고 2학년부터는 입상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2학년 때 나간 콩쿠르에서는 절반쯤 입상을 했고, 3학년 때는 거의 대부분 입상은 했지만 만족스러운 순위는 단 한 번이었습니다. 특히 가끔 심사평을 살펴보면 저희 아이는 굉장히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심사위원들 간 점수 편차가 매우 커서 '입시에 적합한' 연주를 하는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이의 감정이 매우 풍부한데 가끔 이게 너무 지나치기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입시를 위해 이 개성을 다 깎아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다"고도 하시네요. 대한민국에서 대학입시를 하고 쭉 콩쿠르에 나간다면, 절충안을 잘 찾아내는 것이 아이에겐 큰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근데 이게 정말 좋은 방향인지에 대해서도... 또 고민이 많이 됩니다.
사춘기의 긴 터널
날이 갈수록 아이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없어집니다. 사실, 아이의 전곡 연주를 들은 게 언제인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놀아도 연습실에서 노는 게 낫다"고 하시니 이제는 제 눈 앞에 이상한 게 보이지 않으면 그냥 신경을 끕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게 되기까지 꽤 큰 진통이 있었습니다. 방음방에서 아이패드만 잡고 있는 아들에게서 아이패드를 빼앗으려다가 육탄전을 벌이고 결국 아들의 힘만 확인한 날이 있었더랬죠.
2학년 즈음부터 '이게 중2병이구나'라는 걸 느끼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3학년이 되면 나아질 줄 알았지만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아들 방 컴퓨터와 핸드폰의 비번도 바뀌었습니다. 집에 오면 자기 방에서 핸드폰만 붙잡고 있고, 평일에 집에서 밥을 먹는 날은 '제로'입니다. 주말 아침에나 "같이 먹어달라"고 사정해야 얼굴 보며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아들은 점점 더 부모와 집에서 멀어지고 있고, 저는 이제 주말이면 비자발적으로 혼자가 되곤 합니다. 제가 이 아이를 위해 할 일은 당분간 돈을 열심히 버는 일 뿐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가 비워낸 자리를 이제 아들과 비슷한 꿈을 꾸는 친구들이 차지합니다. 예중, 예고에 다녀서 좋은 건 음악에 진심인 친구들과 맘껏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고, 함께 음악을 갖고 놀 기회가 많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1학년 봄 즈음에 아들이 친구 몇몇을 집에 데리고 왔는데, 피아노, 성악, 호른, 플룻 등 전공하는 악기가 제각각이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좁디 좁은 방음방에 들어가서 합주를 하며 노는 걸 보고 문화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런 아이들과 함께 3년을 보내고 이제 더 깊숙이 그 세계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합격의 기쁨은 잠시일테고, 이제 더욱 가혹한 평가와 채찍질, 성공에 대한 기대와 좌절의 반복, 무엇보다 스스로와의 긴 싸움이 이어지겠지요...그럼에도,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이 이 모든 순간들을 이겨내는 힘이 되길 바라봅니다. 합격의 기쁨을 누리는 아이들, 그리고 잠시 고배를 마신 아이들 모두가 단단하게, 멋지게 음악인의 길로 나아가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