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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 Jan 06. 2022

저녁 여덟 시, 제주도 한림 자전거에는 바람이 머문다

잠시 쉬어가도, 다른 길로 돌아가도 괜찮아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으면 체인을 거쳐 뒷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삶의 주체성을 가지기로 결정한 스물한 살, 그 해의 나는 주구장창 페달만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손잡이를 틀어 방향을 바꾸지도, 브레이크를 잡아 잠시 쉬어가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때의 나는 지하세계에서 무거운 바윗덩어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를 반복하는 시지프스와 같았다. 너무 지쳐 그 바윗덩어리를 내팽겨 치고 도망가고 싶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고, 내겐 인공호흡이 필요했다. 탁 트인 멋진 풍경 속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도로를 달려 구석구석 누빈다면, 어깨를 짓눌러오는 바윗덩어리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삶의 브레이크를 잠시 밟기로 하고,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학생 신분이었던 나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하루 4천 원에 자전거를 렌트할 수 있는 곳을 찾아내 예약했다. 수학여행을 제외하고 처음 가보는 제주도이기에 설렜고, 한 번에 제주도 전체를 훑고 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3박 4일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하기‘를 계획했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 땅 위에 올랐다. 제주도의 첫째 날은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낭만적이지 못했다. 페달을 밟았고, 또 밟았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하루에 제주도 1/4씩 돌아야 나의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하기’가 완벽해진다는 생각은 계속해서 페달을 밟게 했다. 푸른 바닷속으로 뛰어들 것 같이 펼쳐진 해안도로 위를 자유롭게 달리는 나를 상상하고 왔지만, 숙소까지의 최단거리를 찾아 멋진 풍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둑어둑한 길 위를 헤맸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가로등을 지나 저녁 여덟 시 무렵 한림읍에 위치한 첫 번째 숙소에 도착했다.


 내가 도착했을 무렵 게스트하우스에서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파티는 이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자꾸 펑크나 날 괴롭힌 싸구려 자전거(자전거 렌트비보다 수리 비용이 더 들었다.)에 무더위까지 더해 녹초가 된 나는 잠시 그들을 지켜봤다. 다들 내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뜨거운 열기와 거칠 것 없는 자유를 보며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과 하나가 됐다. 땀에 절어 몸빼바지를 입고 늦게 등장한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내가 4천 원짜리 자전거를 끌고 제주항에서부터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놀랐고, 나의 야심 찬 ‘3박 4일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하기‘ 계획을 듣고 걱정을 표했다.


“메리 씨는 제주도에 자전거 타러 온 거예요? 여행 온 거예요?”

 같은 테이블에 함께한 남자가 내게 말했다. 순간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아 덮어놨지만, 눈을 흘기며 의식하고 있던 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라고 꾸짖는 듯했다.


 이곳에 오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도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를 채찍질했고,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쉼일까? 제주도 일주일까? 그렇다. 나는 쉬러 이곳에 왔다.


 그날 밤, 제주도의 1/4바퀴를 마저 돌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는 걱정은 접어두고 그들과 함께 밤을 불태웠다. 그 자리에 함께했던 공대 오빠는 내게 자전거 앞바퀴를 분해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욕심부리지 말고 가다 쉬고 싶으면 쉬고, 구경하고 싶으면 잠시 멈춰 즐기라고, 늦으면 앞바퀴를 분해해 버스를 타고 돌아가라며 일러줬다.


 그렇게 어깨의 짐을 한림에 내려두고 홀가분하게 안장 위에 올라 타 페달을 밟았다. 길 위를 달리다 쉬고 싶으면 잠시 멈춰 쉬었고, 더 머물고 싶은 곳이 보이면 자전거에서 내려와 풍경을 음미했다. 그렇게 푸른 길 위를 달리다 도착한 중문에 위치한 쉬리의 언덕, 그 위에서 나는 떠나기 전 꿈꿨던 나를 만났다.


 푸른 언덕 위에 올라 그림 같은 풍경 앞 벤치에 몸을 묻고 앉았다. 수평선 너머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잿빛의 먹구름이 잔뜩 낀 내 마음속에 구름이 걷히고 반짝이는 파도가 넘실대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야.


 제주도를 다녀온 후 나는 손잡이와 브레이크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됐다. 끝없이 나를 몰아세우기보단 목적지로 향하는 길 위에서 잠시 브레이크를 밟고 쉬어가기도 하고, 험한 길이 나오면 오래 걸리더라도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계획에 없는 낯선 길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도전 정신도 갖게 되었다.


살기 위해 떠났던 제주도,

그 숙소에 묵지 않았더라면

다른 테이블에 앉았더라면

난 아직도 손잡이와 브레이크 사용법도 모른 채 페달만 밟고 있지 않을까?

나의 무모한 도전과 그 순간의 선택을 칭찬한다.

‘잘했어.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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