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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 Jan 06. 2022

내가 여행하는 이유

K-장녀의 너무 늦은 사춘기

 숫자 1을 연상시키는 1번, 1호, 첫째, 심지어 1등이라는 일체의 단어들을 나는 모조리 싫어한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우리 외할머니도 장녀, 우리 엄마도 장녀, 그리고 나도 장녀이다. ‘첫째가 잘 돼야 동생들이 따라 배우지.’ ‘엄마가 없으면 네가 엄마야.’라는 말은 나를 장녀라는 틀 안에서 멀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옭아맸다. 내 인생에서 1이라는 숫자가 왜 나를 옭아매는 목줄 같을까?


 외할머니는 구 남매 중 맏이였다. 시내에서 산을 두 개는 넘어야 나오는 깡촌 마을에 살던 외할머니는 여덟 명의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 탓에 배움은 짧았고, 일평생 까막눈으로 사셨다. 외할머니는 아직까지도 손아래 동생들에게 김장철마다 김치를 보내며 자식처럼 살뜰히 챙기고 계신다.


 증조할머니 댁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곳에 살림을 차리고 시집을 온 외할머니는 사 남매를 낳고 살림을 꾸렸다. 그중 맏이였던 우리 엄마를 본인과 동일 시 하여 공부를 시키지 않았고, 집안을 위해 희생하라 강요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바깥일을 나가면 우리 엄마는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동생들도 돌봐야 했으며 심지어 증조할머니 댁의 집안일까지 거들었다.


 엄마는 너무 억울했다. 첫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빼앗긴 엄마는 동네 언니를 따라 집을 나왔고, 서울에서 공장 일을 하며 저녁엔 야간학교를 다녔다. 팍팍한 서울살이는 계속되었고, 너무 지쳐 기대고 싶었던 순간에 우리 아빠를 만났다. 그렇게 만난 지 두 달 만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시집을 갔다.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생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났다. 딸만 내리 셋을 낳은 엄마는 할머니에게 박복하다며 구박을 받았다. 뻑 하면 바람을 피우는 할아버지 탓에 시댁은 조용한 날이 없었으며, 언젠간 든든히 지켜줄 부적처럼 쥐고 있었던 재산을 가족 간의 보증으로 날렸고, 돈 문제로 시동생과의 관계는 험악해져 갔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딸 부잣집 장녀인 나는, 본의 아니게 엄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사촌 형제들보다 내가 더 잘 살아야 할머니에게 딸만 낳았다고 구박했던 과거를 사과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불안정한 자영업에 주말 없이 목숨을 걸고 일만 하는 아빠를 대신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우리 집안의 기둥이 되어주었으면 하셨다. 난 내 어깨에 지워진, 양 어깨를 짓누르는 환경에서 오는 책임감에 시달렸고, 이렇게 3대를 거쳐 내려온 장녀의 한을 엄마의 거친 한숨과 투사로 다 받아냈다.


 사실, 어린 시절 나는 막연하게 알았다. 어리광을 부릴 수 없는 장녀의 역할을 인지했고, ‘엄마가 없으면 네가 엄마야.’라는 말은 낭떠러지 끝에서 겨우 버티는 나약한 나를 보게 했다. 그 누구도 낭떠러지 끝에서 나를 위해 손을 잡아주거나 떨어져도 좋은 안전한 지지대를 받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세상의 무게를 다 짊어진 듯 사춘기 없이 청소년기를 보냈고,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을 억누르고 엄마가 원하는 철밥통 공무원이 되었다.


 문득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잃어버린 채 대물림된 그녀들의 결핍을 대신 채우기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이. 내가 이 결핍을 채우려 노력해도 그녀들은 계속 불행했고, 나도 함께 불행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나 또한 미래의 내 딸에게 이 감정을 고스란히 물려줄까 무서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끊어내기로. 그 시작점에 여행이 있었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성인이 된 이후로 뒤늦은 사춘기가 시작됐다. 대학도 직장도 가능한 가족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려 했으며 가족들이 정서적으로 나에게 기대려 하면 날카로운 독설로 그들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냈다. 그동안 억눌려 채우지 못했던 결핍들을 하나둘씩 나 스스로 채워 나갔다. 결핍을 제대로 직면해야 했다. 그것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고, 낯선 공간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여행은 내 마음속 겹겹이 쌓인 묵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숨구멍을 다시금 트여 주는 먼지떨이 같은 존재였다. 스무 살 겨울,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강릉 여행을 떠났다. 넉넉지 못한 형편, 주말 없이 일만 하는 아버지로 인해 가족여행은 매번 당일치기였고, 남쪽 동네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내게, 강릉은 미지의 세계였다.



 기억해 보면 야간열차를 타고 도착한 강릉은, 차갑지만 포근했다. 그 새벽 공기의 온도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강릉역 앞에 펼쳐진 온통 하얗고 고요한 세상에서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듯 한껏 들떴다. 대설주의보를 오가는 날씨 탓에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경포대 앞바다였지만 탁 트인 바다의 경치는 내 일상의 무게를 잠시 잊게 했다. 요동치며 다가오는 거센 파도는 내게 ‘너의 걱정, 근심 내가 다 쓸어갈게. 내려두고 가’라고 위로하는 듯했다.


 나는 그 후로 내 어깨에 쌓여가는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때면 여행 가방을 싼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온 걱정, 근심 덩어리들을 훌훌 털어버리기 위해 짐을 싼다. 스무 살 그 강릉 여행은 단순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 그 이상으로 나를 위로하는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현실은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나의 일상에 해방과 자유를 주지는 않았다.

여전히 늦은 사춘기를 재촉하고 있었고, 그 위에 근심과 염려를 채웠다.

짐을 싸면서 생각한다. 자, 그럼 어디로 떠나볼까? 그래, 나에게는 여행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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