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낮음 Sep 20. 2023

유목

 언니는 캐리어 가방을 활짝 열어둔 채로 내 옆에 와서 누웠다. 노란색 옷가지가 가방에 반쯤 걸쳐 있었다. 나는 왜인지 그런 것들이 눈에 밟혔다. 집에 도착한 후로부터 언니는 줄곧 밝고 씩씩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그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언니는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런 상태로 무슨 표정을 짓는지, 어떤 형태의 마음을 감추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아래 있는 것은 분명한 그녀였다. 캐리어 가방을 열기 전까지의 그녀는 거짓된 모습이었다.


 몇 년 동안이나 소식도 제때 전하지 않으며 살아오던 언니는 오늘 갑자기 불쑥 집으로 돌아왔다. 거짓된 얼굴과 태도로. 이불속에 숨은 그녀는 이제야 껍데기를 내려놓고 본질의 것으로 돌아왔다. 두려움과 패배감에 짓이겨져 몸을 한껏 웅크린, 탈피에 실패해 허물어진 곤충과도 같은 모습.


-


 나는 실패가 두려워 실패했다. 내가 바라던 것들이 멀었고, 내가 동경하던 이들은 거대했다. 차마 닿을 수 없음이 나를 무너뜨리고 비웃었다. 저들은 어찌 모든 것을 아는가. 모든 것을 가졌는가. 하염없이 빛나는가. 나는 낙엽처럼 말라가는데. 무언가 잡은 듯하면 이리저리 달아나고, 이루었나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무너지는 것들의 파편이 패배감이 되어 나를 난도질한다.


 결국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채. 패배감만 가득히. 가방의 부서진 바퀴는 여기 보라는 듯이 시끄럽게 울며 굴러갔다. 아 이리도 비참한 모습. 부끄러움조차 머물지 못한 나. 애써 지은 어색함이 들통났다. 웃음이 익숙하지 않아 근육의 경직이 여실히 드러났다. 모른 척 지나가 줘.

공기가 무거워 이불을 뒤집어쓴다. 내가 구두를 신발장에 넣었던가. 내가 그릇에 물을 받아 놓았던가. 내가 가방을 닫아 놓았던가.

내일 아침의 해가 뜨지 않았으면.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


그리운 사람. 보고 싶은 얼굴아. 어서 저 문 열고 들어와 주었으면.

비가 이리도 쏟아지는데 어서 지붕 밑 따뜻함에 돌아와 주었으면.

사냥개 같은 어둠에 쫓겨 다니지는 않는지, 교활한 세상이 속이지는 않는지.

지금이라도 돌아온다면 따뜻한 밥을 지어줄 텐데.

냉기가 전부 녹아 없어질 만큼 모락모락 오를 텐데.


너의 발을 씻겨 주던 날들을 기억해.

함께 봤던 새벽 바다의 안개를 기억해.

그런데도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니.

그런데도 사랑하지 않는다니.


작았던 손아 내게 돌아와. 작았던 숨아.


구독자 8
작가의 이전글 반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