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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음 Jun 12. 2022

복합

식사 자리.

테이블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남녀.


로즈

우리, 시간을 조금 갖자.


침묵. 이어서 동시에,


      헤어지자는 말이야?     /     로즈      헤어지자는 말은 아니야.


침묵. 이어서,


그러면, 뭔데?


로즈

그냥, 시간을 조금만 갖자고. 우리.


그러고 나면, 뭐가 달라져?


로즈

달라지다니. 정해진 것도 없는데 뭐가 달라지겠어.


그럼 뭘 위한 시간인데?


침묵.

이어서,


로즈

우리 많이 봤잖아.

동해도 보고 서해도 보고 남해도 봤잖아.

지중해.. 는 안 봤지만…

꽃밭에도 가고 산에도 갔잖아. 양 떼도 보고 젖소 무리도 봤잖아.

많이 봤잖아 그러니까,


폴, 빤히.


로즈, 눈 피하며


로즈

잠깐이면 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


나, 오는 길에 택시 탔어.

너 말대로, 네가 그러라고 해서 한동안 안 타고 다녔었는데

오늘은 일부러 택시 잡아서 타고 왔어.

택시 기사님이 엄청 큰 소리로 통화하더라.

짜증 나는 거야. 기껏 택시 잡았건만.. 못해도 이삼 만원은 나올 텐데

조용히 가지도 못하고 말이야.

 

근데 나 엄청 행복해졌어.

기사님이 행복해하셨거든.

막 통화를 하면서, 소리를 빽빽 지르면서

자기 땡잡았다고, 삼만 원짜리 건수를 두 개나 연속으로 잡았다고

상대방한테 자랑을 하는 거야. 내가 바로 뒤에 있는데도.


나 정말로 울 뻔했어.

겨우겨우 참았어.

나 덕분에 누가 행복하다는 말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 봐서,

그런 말을 들어 본 지 오래됐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서

정말로 겨우겨우 참았어.


있잖아, 너는 행복해? 나 덕분에 행복을 느껴?

나는 어때 보여, 행복해 보여?

나는 그냥 빙글빙글 웃을 줄만 알고 네가 그렇게 말하면 엉엉 울면서 붙잡아 줄 것 같았어?

있잖아, 나는 행복할 줄 알았어.

우리가 남들처럼은 못 지내도

친구들이 좋은 거 먹고 좋은 거 하고 다닐 때

조금 못 한 거 먹고 조금 못 한 거 하고 다녀도

그냥 너랑 바다 보러 가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어.

편의점에서 산 조각 케이크 먹어도 행복할 줄 알았어.

그리고 자신 있었어. 그렇게 살아도 행복할 자신 있었어.

그런데 너는 내가 어떤지도 모르잖아.

내가 어디서 행복을 느끼는지, 내가 너의 어떤 부분을 사랑하는지

내가 왜 상처받는지, 내가 왜 참아내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런데 너는 똑같아.

시간을 좀 갖자… 시간이 필요해…

필요하겠지. 필요하겠지.

뭐가 달라지겠어? 결과를 말하는 게 아니야.

원하는 만큼 시간을 갖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내가 몰랐을까? 매일같이 네 표정들을 보면서 행동들을 보면서

내가 아무것도 몰랐을까..

숨소리만 바뀌어도 알아차리는데…


있잖아, 시간 줄게. 네 말대로 시간을 줄게.

네가 원하는 만큼, 그 이상으로 줄게.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무슨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봐.

기한은 내가 저 문으로 나가서 저 문으로 다시 돌아올 때 까지야.

부족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줄 테니까,

그래, 우리 시간을 가지자.




폴은 그대로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는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로즈는 한참 동안이나 잠자코 있다가 그것이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듯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벽에 걸린 목재 시계는 로즈의 손목시계와 시간이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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