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셋째 날이자, 이탈리아 여행의 4일차가 시작됐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에는 바티칸 투어, 그 다음 날에는 와이너리 투어를 연달아 다녀왔기에 짜여져 있는 일정에 약간의 피로도를 느끼던 차였는데 드디어 오늘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날이다. 오늘은 피렌체 곳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남편에게 무계획은 있을 수 없다. 그의 이름을 딴 일명 '사환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극J 성향의 남편은 계획을 굉장히 철저하게 세우는 편이다. 하루에 몇 군데를 둘러볼 것인지, 식사는 어디서 할 것인지를 미리 계획한다. 뿐만 아니라 휴식을 취하더라도 정확히 '몇 분 정도' 쉴 것인지 정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그이기에, 나는 대체로 80%의 편함과 20%의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파레토의 법칙인가..
내가 계획을 짤 필요가 없고, 남편이 가자는 대로 가면 되는 게 약J인 내 입장에서 편하다. 반면 특정 장소가 너무 좋거나 갑자기 피곤해지는 경우 즉흥성을 발휘하는 나에게는 탄탄한 남편의 계획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남편이 볼 것이라고 생각하니, 편함과 불편함의 비율이 90%와 10% 정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남편의 성향이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이, 대부분의 관광지가 사전예약을 해야만 입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방문할 날짜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정하여 예약하기 때문에 전날 저녁, 내가 잠든 사이 남편이 부지런히 알아보고 우리가 가려는 몇 군데의 사전예약을 해두었다.
아침에 준비를 마치고 나와 걸어가던 중,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카페를 발견해 급 들어갔다.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동네 맛집인 듯했다. 이탈리아의 카페는 바와 자리가 구분되어 있고, 그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바에서 먹을 때에는 음식 가격만 지불하면 되지만, 자리에 앉으면 자릿세가 붙는다. 대체로 인당 1-2유로씩 붙는다. 그래서 우리도 다리가 정말 아픈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에서 먹었다. 돈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이탈리아의 바 문화를 경험해보는 재미도 있다.
남편은 카푸치노를, 나는 카페라떼를 골랐고 종류가 다른 크루아상을 2개 주문했다.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는 보통 1.2~2유로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동네 기준, 관광지는 조금 더 비쌀 때도 있다) 그다음으로 카푸치노가 저렴하고, 카페라떼는 조금 더 비싸다.
이탈리아에 와서 카푸치노와 카페라떼의 차이를 비로소 이해했다. 카푸치노는 거품이 많고 우유가 적은 반면 카페라떼는 거품이 적고 우유가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더 비싼가 보다.
여기서 먹은 커피와 크루아상은 환상적이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루아상의 맛도 좋았고, 커피맛도 진하고 고소했다. 분주한 직원들을 구경하며 바에서 커피를 마시니 이탈리아 주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만족스럽게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나와 피렌체의 메인거리로 향했다.
피렌체에는 훌륭한 미술관과 성당들이 아주 많다. 가기 전에도 '이탈리아는 성당이 모두 미술관이니 성당이 보이면 꼭 들어가보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는데 그만큼 유럽은 종교의 역사가 길고 성당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보이는 성당마다 들어가다 보니 운좋게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우리가 여행을 떠난 시기가 부활절과 겹친 덕분이었다.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마다 마치 중세시대로 돌아간 듯했다. 곳곳에 가득 찬 오래 된 벽화들, 높은 천장과 빛나는 촛불, 그리고 화려한 제단화를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나는 무교이지만 아빠가 천주교 신자이시기에 어렸을 때 성당에서 교육을 받았었다. 워낙 외워야 할 것들이 많아 조금 다니다가 세례를 받기 전에 포기했는데,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천주교의 매력을 느꼈다.
대부분의 미술관들의 경우 입장료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두 군데만 유료로 입장하고 나머지 미술관들은 밖에서 건물만 구경하거나 무료입장이 가능한 부분까지만 둘러보기로 했다. 피렌체 하면 우피치 미술관이지만, 이미 바티칸 미술관에서 멋진 작품들을 많이 보기도 했고, 작품들에 대한 공부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가면 감동을 느끼기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더욱이 미술관 투어를 두 번이나 하기에는 피로도가 클 것 같아 패스!
다만 우피치 미술관은 외관만으로 압도감이 컸다. 특히 대가들의 조각상이 기둥마다 설치되어 있는데, 두오모 쿠폴라를 설계한 브루넬레스키가 쿠폴라 방향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조각상을 실제로 보니 감탄스러웠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건물을 간단히 구경한 뒤 남편이 선물용 제품들을 판매한다는 향수 매장을 알려주어서 함께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했다. 이 건물 자체도 오래 전부터 지어졌던 건물을 그대로 활용했기에 벽과 천장에 멋진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과거의 것을 유지하면서 고풍스럽게 꾸며놓은 매장이 아름다웠다.
향수, 비누, 화장품까지 다양한 제품들이 테스터와 함께 진열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유리 용기여서 무게감이 나가기도 했고, 향이 너무 강해서 받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다 싶어 간단히 둘러보고만 나왔다.
다음 코스로 향하다가 서점을 발견했는데, 희귀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었다. 몇 계단을 내려가는 반지하 구조의 서점에 들어가니 피렌체의 명소들을 그린 엽서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쿠폴라 배경의 엽서를 한 장 구매했다.
반대편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베니스의 상인 등 익히 알고 있는 책들이 있었는데 표지가 예쁘기도 하고, 책 자체도 한국보다 훨씬 가벼워서 소장욕구가 강해졌지만 이미 캐리어가 무거우니 꾹 참았다.
성당을 나와 걷다가 어젯밤 예약해두었던 산타 크로체 성당에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남편이 핸드폰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밤 12시가 지나고 새벽에 예약을 하다가 날짜를 착각하여 오늘이 아닌 내일자 티켓을 구매한 것이었다.
둘 다 전화가 불가능한 심카드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문의전화도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잠시 멈춰 환불/예약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언제 확인할 지 모르지만 문의메일만 보내두고 일단은 가서 물어보기로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스스로의 실수에 대해 미안해하는 남편을 안심시켜주고 싶어 만약 못가면 티켓은 기부한 셈 치고 다른 곳을 더 둘러보자고 다독였다. 나중에 남편이 말하길, 우리 부부가 서로 멘붕을 느끼는 문제의 유형이 달라서 다행이라고 했다. 보통 남편의 멘탈이 흔들릴 때 내가 침착하게 반응하는 반면 내 멘탈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남편이 침착하기 때문이다. 역시 우리는 잘 맞는다.
다행히 산타 크로체 성당의 직원분께 문의하니, 무전기로 소통 후 바로 입장을 도와주셨다. 성당 내부는 안왔다면 후회했을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또 미켈란젤로 등 거장의 시신이 묻힌 곳이라고 하니 더욱 경건해지는 마음이었다.
볼거리가 많은 곳이어서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나오니 배가 출출해졌다. 이탈리아의 식당들은 점심식사 후 저녁식사 전까지 문을 닫는 곳들이 많다. 보통 6시 반~7시부터 저녁식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전에 식사를 하려면 구글맵의 영업시간을 잘 참고해야 한다.
이탈리아에 와서 아직 화덕피자를 맛보지 못해서 테라스가 있는 피자집을 찾아갔다. 손님이 많고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걸 보니 맛집이다 싶어 테라스의에 자리를 잡았다.
1인1피자를 하자며 나는 화덕피자의 대표메뉴 마르게리따를, 남편은 햄이 올라가 있는 피자를 주문했고 라거맥주와 레몬 스프리츠를 주문했다.
조금 후에 나온 피자를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왜 이탈리아가 피자의 본고장인지 깨달았다. 얇고 쫀득하고 짭짜름한 도우와 토마토, 치즈의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피자가 싱싱하게 느껴질 정도로 맛이 좋았다. 이탈리아의 화덕피자는 도우가 얇기 때문에 혼자 8조각을 먹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남편과 반반 나누어 먹으며 엄청난 행복감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원래 이번 글에서 피렌체 셋째 날의 이야기를 모두 담으려 했는데 쓴 만큼의 이야깃거리가 남아있음을 깨닫고 부랴부랴 글을 마친다. 역시 사환투어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 많은 일정을 소화했다니, 그때의 나도 대단해. 그럼 식사 후의 일정은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