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이탈리아 신혼여행, 드디어 그 시작이다.
일본 오사카 해외답사를 2박 3일 다녀온 뒤 하루 쉬고 곧바로 출발하는 일정이었기에 하루 전날까지 바쁘게 짐을 싸고 밀린 일을 처리하다 보니 하루가 훌쩍 지났다. 새벽이 되어서야 침대에 누워 오빠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중, 설렘에 잠이 안올 것 같다는 우려섞인 말을 내뱉자마자 곧바로 잠들었다. 일본여행의 여독이 풀리지 않아 피로가 쌓였었나 보다^^;
다음 날 아침, 부지런히 남은 짐들을 챙기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매사에 꼼꼼한 남편이 집 구석구석을 살피며 창문은 잘 닫혀 있는지, 전기는 잘 껐는지, 빼먹은 짐은 없는지 아~주 꼼꼼히 살피는 동안 현관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이 말하길, 어느 글에 의하면 집을 나설 때마다 꼼꼼하게 살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면 나서기 전에 집안 곳곳을 사진으로 찍어두는 방법이 마음의 안정을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 집을 나선 뒤에도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영상으로 집의 곳곳을 찍고 나서야 남편은 드디어 신발을 신었다.
일본여행을 떠날 때에는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로 갔는데, 유럽행 비행기는 제2여객터미널에서 타는 듯하다. 공항선 끝까지 달려 도착한 터미널은 며칠 전 일본여행을 떠날 때의 번잡한 공항 분위기와 180도 달랐다. 굉장히 한산했기에 공항이 훨씬 넓어보이기까지 했다.
출국수속을 속전속결로 완료하면서 출국수속대의 직원분께 여쭤보니, 주로 아침에 사람이 많다고 한다. 우리는 오후 1시 반 비행기였기에 더욱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면세점 구경도 하고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미리 주문해둔 면세품을 받았다. 면세품 인도장에는 두 번째 가보는데, 역시나 설렌다. 몇 개 사지도 않았는데 남편은 "뭘 산거야?"라며 궁금해했다. 정말 궁금했던 걸까?
그리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이를 닦고 여유롭게 비행기에 올랐다. 자리를 찾아가니 치약칫솔을 비롯해 슬리퍼, 유선이어폰, 담요, 물이 자리에 놓여 있었다. 매번 저가항공만 타서인지, 가까운 거리만 비행해서인지 이런 것들이 제공된다는 사실을 잊고 미리 다 챙겨갔는데 괜스레 머쓱.
긴 비행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우리는 여러가지를 준비했다. 우선 넷플릭스에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몇 개 다운받았고, 각자 책을 챙겼다. 내가 챙긴 책은 '90일 밤의 미술관'이라는 이탈리아 주요 미술관 작품들을 주제로 한 책이었다.
여기에 모자라 혹시나 들고 간 책이 질릴까봐 밀리의서재 구독료를 내고 몇 권의 책을 다운받아두었다. 여차하면 노트북도 들고가니 글이라도 써야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10분 정도 대기하자, 드디어 큰 소음과 함께 비행기가 하늘로 향해 날아오른다.
11시간 비행이니 대략 3-4시간 정도에 한 번씩 기내식이 나오리라 생각하고 꽤 든든히 밥을 먹었는데, 이륙한 지 1시간 반 정도 후에 바로 첫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기내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는 후기들이 많아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첫 번째 기내식은 아주 훌륭했다.
연어 샐러드와 화이트 와인을 선택했는데, 연어와 샐러드의 야채가 싱싱했다. 무엇보다 함께 곁들인 화이트와인이 아주 맛있었다. 다만, 치즈는 꼬릿한 맛이 내 입맛에 안맞아서 맛만 보고 남겼는데 의외로 남편이 맛있다며 다 먹어치웠다.
기내식을 먹은 뒤에는 남편과 각자 독서도 하고, 잠도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직전에 다녀온 일본여행 후기글을 썼고, 기내에서 볼 수 있는 콘텐츠들 중 <이탈리아 미식여행>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도 보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기차나 비행기에서 개인작업하는 시간이 참 재미있다.
중간에는 미리 다운받아온 <냉정과 열정 사이> 영화를 남편과 함께 봤는데, 우리도 방문할 예정인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영화여서 설렘이 더욱 커졌다.
맥주도 마시고 간식과 두 번째 기내식도 맛있게 먹으면서 장거리 비행을 즐긴 후 11시간 뒤, 드디어 로마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 도착했다.
이탈리아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주의를 수없이 들었기에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긴장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기차를 타러 가는 길은 안내 사인물이 많아 어렵지 않았다.
드디어 기차표 키오스크 앞에 섰다. 책과 여러 블로그들에서 배운대로 우리의 목적지인 termini행 기차표를 선택한 후 결제단계에 들어섰는데, 여기서 첫 번째 고난을 마주하게 된다. 카드만 넣으면 바로 결제가 되는 줄 알았는데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안내가 뜬 것. 그런데 카드 비밀번호 4자리를 입력하니 잘못된 번호라는 경고가 뜨며 결제가 거절되었다. 혹시 다른 비밀번호인가 싶어 몇 번을 다시 눌러봐도 여전히 경고 메시지. 슬슬 땀이 나기 시작했다.
옆에서 열심히 검색하던 남편은 숫자 00 + 비밀번호를 눌러보라고 했다. 그러나 역시나 경고 메시지가 뜬다. 우리가 키오스크 앞에서 끙끙대던 사이 우리의 뒷편에는 기다리는 줄이 길어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와서 다시 뒤로 가서 줄을 섰다. 이번에도 안 되면 그냥 티켓창구에 가서 직접 구매하자고 생각하던 찰나, 남편이 비밀번호를 먼저 누른 뒤 비밀번호 00을 눌러보자고 했다.
다시 우리 차례가 되어서 남편 말대로 비밀번호 4자리 + 00를 누르니 드디어 결제가 된다! 키오스크에서 PIN번호가 틀렸다고 뜨는 분들은 숫자 00을 꼭 기억하시길!
이탈리아는 기차를 타기 전, 티켓을 역에 설치된 기계를 통해 직접 펀칭해야 한다. 펀칭하지 않고 티켓만 들고 탔다가 불시에 검문하는 직원에게 걸리면 벌금을 문다고 한다. (온라인으로 구매한 티켓은 제외되는 듯하다)
우리가 구매한 기차표가 곧 출발하는 시간대였기 때문에 긴장을 유지한 채로 빠르게 플랫폼으로 향했다. 이미 기차는 도착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기차로 바삐 뛰어가고 있었기에 우리도 서둘렀다. 타기 직전에 남편이 펀칭기를 발견해서 티켓을 넣었다 뺐고, 이미 자리가 꽉 찬 기차에 겨우 탈 수 있었다.
각국의 외국인들이 모두 함께 탄 기분이었는데, 여기서도 소매치기를 피하기 위해 가방을 움켜쥐고 피곤한 와중에도 눈을 부릅떴다.
긴장감 넘치는 30분이 지난 뒤, 드디어 테르미니역에 도착! 했지만 여러 블로그를 통해 로마의 첫인상이 예상보다 실망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익히 들었기에 너저분한 거리와 건물이 그리 실망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진으로 많이 봐서 정겨운 느낌이었달까?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잠깐, 숙소까지의 길을 찾아봤더니 무려 1km가 넘는 길을 걸어야 했다. 울퉁불퉁한 길을 15kg에 달하는 캐리어를 끌고가며 우리의 피로도는 급격히 쌓여갔다. 긴장과 허기짐, 그리고 깜깜해진 로마의 밤거리는 두려움마저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숙소 앞, 우리는 두 번째 고난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커다란 문과 수많은 초인종 때문이었다. 초인종 아래에는 각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듯한 이탈리아어가 잔뜩 쓰여있었는데, 문제는 그 중 우리의 숙소명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도무지 어느 버튼을 눌러야 할 지 모르고 둘 다 통화가 되지 않는 유심, 이심이었기 때문에 당황하던 중에 다행히 문을 열고 나오는 여성분이 계셔서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문 안의 상황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역시나 숙소이름은 보이지 않았고, 한참을 서성이며 숙소 예약앱을 통해 보낸 메시지의 답을 기다리던 중, 한 아저씨가 나왔다.
짧은 영어실력으로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는데, 알고보니 숙소 사장님이셨다. 다행히 사장님은 친절하셨고, 숙소 이용을 위한 여러가지를 설명해주셨다. 그러나 예상해보건데 우린 그 중 30% 정도만 알아들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영어발음은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이었다. 발음이 너무 강해서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미리 안내받았던 도시세를 내고 열쇠를 받아 숙소에 들어선 뒤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긴장을 놓았다. 웰컴 와인이 제공되었지만 너무나도 피곤했던 우리는 바로 씻고 잠들어버렸다. 과연 내일부터는 행복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