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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Oct 13. 2019

#11. 의료 영업의 명과 암 [2]

버티거나, 떠나거나

의료기기 영업 사원의 일터는 아픈 사람들로 가득한 병원이다. 고객을 만나기 위해 대기하는 폐 센터 진료실에는 기침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하는 환자들이 보인다. 매일같이 지나가는 유방암 센터에서는 항암 치료에 지친 내 또래들과 마주한다.

출처 = unsplash


사람마다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 정도는 다르겠지만 공간과 상황이 풍기는 특유의 향기가 있음은 분명하다. 결혼식장보다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무겁고 콘서트보다 범죄 수사 현장의 분위기가 어두운 것처럼 말이다. 나는 유달리 그런 향기에 쉽에 취하는 편이었다. 부축 없이 걷기 힘든 환자들과 그 옆에 지친 보호자들을 보면 '어디가 저렇게 아프실까', '보호자도 연세 지긋한 할머니네. 간병하시기 힘드시겠다.'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이런 오지랖 때문에 혼자서 울컥하는 일도 잦았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이면 나의 유난스러움을 탓하며 견뎌볼 법도 했지만, 월화수목금 업무와 관련된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다보니 점점 지쳐갔다. '얼마를 받으며 어떤 일을 하는지' 만큼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에서 일을 하는지'도 중요했던 것 같다.


생명이 들어오고 나가는 병원은 웬만한 직업적 사명감 없이 견디기 힘든 곳이다. 이 점에서 나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을 미워하면서도 그들을 포함한 모든 병원 관계자분들을 존경했다.

물론 일터의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의료기기 업계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긴 시간 관련 지식과 경험을 채워도 맡은 바를 완벽히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부담이 가장 컸다. 제품에 대해 공부하고 고객 피드백을 열심히 수집해도 영업 사원인 나는 실제 수술에 내 제품의 성능이 대단한지도 결과적으로 환자의 예후에 영향을 주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가 던지는 질문에 100% 옳은 대답을 했는지 확신을 가지기도 힘들었다. 내가 제품에 대해 공부하지 않아 틀린 대답을 할까 걱정했던 것이 아니. 단 몇 달 해부학, 제품 교육을 받은 영업사원에게는 환자의 다양한 상황을 감안하여 명확한 답을 줄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객들이 내게 그 정도 수준의 답을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곳에 말을 보탤 용기와 배포가 없었던 것이다.


[어려운 점 1.] 고객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출처 = unsplash


의료기기 영업사원이 담당하는 제품에 대해 잘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완벽한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제품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익히고 이를 영업적으로 활용할 수는 있지만 직접 그것을 사용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영업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되었을 즈음에 본사로부터 담당 제품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출시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존의 단점을 보완한 제품이 나온다는 소식에 회사도, 고객들도 큰 기대를 가졌고 나를 비롯한 영업 사원들은 이번 기회로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본사에서 보내준 자료와 관련 논문을 읽고 또 읽었다. 새로운 제품 스펙을 바탕으로 신제품이 각 수술별로 어떤 강점을 가지고 있고, 기존 단점을 어떤 식으로 단점을 보완했는지 분석했고 우리는 고객의 예상 질문에 자사 제품의 구버전, 경쟁사 제품과 비교하며 대답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훈련했다.


기다리던 신제품이 출시되었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교수님을 찾았다.

"교수님 이번에 신제품 사용해보시니 어떠셨어요? 확실히 코팅을 입혀서 발열도 적어지고, 지혈 속도도 빨라졌죠?"

교수님이 날 쓱 쳐다보고 대답했다.


아니던데? 지혈도 안 되고 별 거 없이 똑같던데?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말을 잃었다. 기술적으로 신제품이 구제품과 성능이 같을 수가 없다며 제품을 매뉴얼대로 사용한 것이 맞는지 되물을 수 없었다. 동일한 수술 케이스를 50개 넘게 봐왔지만 늘 당신 수술은 지혈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고, 제품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술기 문제가 아니냐며 따져볼 수도 없었다. 의료에 '의'자도 모르는 영업 사원이 후자처럼 말하는 것은 범죄에 가까웠다.

위의 상황에서 제대로 응대하지 못한 것이 바로 아마추어 영업 사원이었던 나의 한계였고, 본질적으로 제품을 활용하여 술기를 바꿔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식도, 경험도, 자격도 없는 의료기기 영업 사원의 한계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의료기기 회사가 (기부 명목으로) 큰 학회에 지원함으로써 저명한 의사가 자사 제품의 장점을 어필하도록 독려하지만 이를 필드에서 고객이 '아니던데?'라고 할 때 '당신이 틀렸던데? 맞던데?' 라며 맞서기 위한 무기로 활용하기에무리가 있다.


[아쉬운 점 2.] 내가 정말 옳은 대답을 한 것일까?

출처 = unsplash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외과 수술 장비를 판매한다는 은 내게 큰 영광임과 동시에 극복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제품과 관련된 모든 스펙, 사용법, 세척법, 보관법, 오류 시 대응을 외우고 또 외워도 내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가 많았다.

 

한창 수술을 집도하던 의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진땀 흘리던 기억이 난다.


이 혈관 이걸로 잡아도 아무 문제없는 것 맞죠?


본사 제품 매뉴얼이나 관련 논문에 따르면 내가 담당한 제품으로 의사가 말한 혈관을 잡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난 자신감 있게 "네! 따로 조치 없이 저희 제품으로만 혈관 잡으셔도 됩니다." 라는 대답을 할 수 없었고 이렇게 답했다.


"돼지 실험을 바탕으로 한 논문에 따르면 수직 *mm 이상은 저희 제품으로 잡아도 무방하지만, 상황에 따라 오차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판단하시어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사용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내 제품만큼 지혈이 잘 되는 것이 없다며 그렇게 고객을 쫓아다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담당 제품에 대한 신뢰를 등지고 가장 보수적인 방식으로 대답을 해버렸다. 환자의 컨디션과 혈관을 잡는 미세한 각도에 따라 지혈 가능 여부가 다를 수 있고, 솔직히 내게는 수술과 관련된 사항을 판단하고 100%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품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들은 실시간으로 어떤 전압 모드로 사용해야 하는지, 에러 알림이 울리다가 한동안 멈췄는데 조치 없이 사용해도 되는지와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다른 동료들은 매뉴얼에 따라 응대하고 에러 알림이 안 울리면 그냥 계속 사용해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늘 내가 과연 환자 상태도 모르면서 전압 모드에 대한 확답을 주어도 되는지, 기계 내부의 어떤 오류로 제품의 이상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계속 사용하라고 안내해도 되는지 헷갈렸다. 거의 모든 응대에 강한 부담을 느꼈다. 제품이 가진 강점에 대한 확신이 생겨도 이 부담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이 점이 내가 의료 업계를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한 커다란 이유 중 하나였다.


출처 = unsplash


버티거나, 떠나거나


휴대폰 시장이 삐삐에서 폴더폰 폴더폰에서 터치폰으로 바뀐 것과 같이 의료기기 시장도 빠르게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전에는 대부분의 수술을 위해 환자의 배를 열어야 했지만 의료용 카메라 기술이 발전하면서 가능한 한 작은 구멍을 뚫고도 똑같은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술 시 사용하는 카메라 화질도 계속 업그레이드되어 현재 영화관에서 쓰는 3D 안경을 쓰고 수술을 하는 병원도 많고, 4K 화면을 통해 뱃속을 들여다보며 수술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처럼 휴대폰과 의료기기 모두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의료기기 사용자는 휴대폰 사용자와 달리 상당히 보수적이다. 이미 익숙해진 장비로 수술을 잘하고 있는 의사가 성능이 좋다는 이유로 새 장비 사용법을 익히고 환자에게 사용하지는 않는다. 보수적인 고객은 계속해서 제품의 성능과 효과를 의심하고 사소한 질문을 던진다.


제품에 대한 고객의 부정적인 피드백과 질문에 강한 중압감을 느껴 업계를 떠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본인만의 방식으로 잘 버텨내는 친구들도 많다.


내 동기 중 한 명은 교수가 하는 질문에 조금이라도 확신이 없으면 이렇게 말한다.


알아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몇 시간이든 며칠이든 다양한 자료를 보고 나서야 고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답을 준비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런 일이 반복되자 고객이 소리쳤다고 한다.


야 너는 뭐 아는 게 없어!


평소 호탕한 동기가 대답했다.


알 때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객과 친구는 한 참을 웃었다고 한다.


비록 업계는 떠났지만 난 이것이 의료기기 영업사원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본다.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부분이 있으면 모른다고 대답할 것. 최대한 정확한 답을 주되 정답이 아닐 수 있는 경우 부가적인 설명을 꼭 덧붙일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큰 중압감에 시달리거나 내가 하는 말에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정신 건강을 위해 과감하게 업계를 떠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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